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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은 과연 박근혜 전 대표를 ‘오바마의 힐러리’처럼 기용할 의사가 있을까. 사진은 지난해 8월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 이명박 후보와 박근혜 후보. | |
한나라당이 박근혜 전 대표의 ‘역할론’을 두고 내홍으로 빠져들고 있다. 박 전 대표 역할론은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 오바마가 자신의 경선 경쟁자였던 힐러리 클린턴 미국 상원의원을 국무장관으로 내정한 것을 계기로 친이(친 이명박 대통령)그룹이 적극 주장하면서 표면화됐다. 친이계 의원들은 “총체적 위기 상황에서 대중적 기반이 있는 박 전 대표가 해결사로 나서야 한다”라고 요구하고 있다. 반면 친박(친 박근혜 전 대표)계는 “박 전 대표를 매도하지 말라”며 강력 반발해 양측 간 감정싸움의 골도 깊어지고 있다.
그런데 정치권 일각에선 친이그룹이 동시다발적으로 박 전 대표의 역할론을 적극 주문하는 것 자체가 ‘박근혜 죽이기’의 시작이라고 보고 있다. 이는 최근의 경제위기에 따른 이명박 대통령의 정치적 부담을 덜고, 국가 위기를 수수방관하는 박 전 대표의 무책임한 행보를 적극 드러내려는 친이그룹 고도의 전략이라는 것이다. 친이그룹의 ‘박근혜 죽이기’, 그 숨겨진 발톱을 추적해본다.
“박근혜 전 대표는 한나라당 사람 아니냐. 자신도 당 대표를 2년씩이나 했는데 지금 너무 고고한 척하는 것 아니냐. 지금 경제위기가 보통 위기냐. IMF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내년 실물경제는 최악이 될 것이다. 이런 비상시국에 ‘정치는 나를 버리는 것이다’라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나 하고 있으면 되겠느냐. ‘이 대통령을 돕기 위해 현안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라는 말은 지금과 같은 상황이 아닌 일반적인 상황일 때 가능한 얘기다. 지금이 그런 정치적 수사나 쓰면서 뒤로 빠져있을 정도로 태평한 때인가. 박 전 대표가 오로지 국민들을 위한다면,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 대안을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한나라당의 친이 성향 A 의원의 말이다. 그는 평소 차분한 성격으로 말을 가리는 편이지만 최근 경제위기에 따른 박근혜 전 대표의 역할론에 대한 당내 공방을 보면서 답답한 마음에 극단적인 말들을 쏟아냈다. 그는 또한 “박 전 대표가 이제는 적극 나서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과 머리를 맞대고 경제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사심 없이 도와주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결국 그도 살고 당도 사는 길이다. 대권은 말할 것도 없다”라고 덧붙였다.
대부분의 친이 성향 의원들은 앞서의 A 의원과 같은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동안 박 전 대표의 역할론 논쟁이 많이 있었지만 지금이야말로 이것을 공론화해 결론을 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의원들이 많아졌다. 이는 친이그룹이 이명박 대통령 집권 뒤 ‘박근혜 총리론’이 나왔을 때 그것을 소극적으로 대하던 태도와는 확연히 달라진 것이다.
친이 성향의 또 다른 B 의원도 이에 대해 “그동안 박근혜 전 대표에 대한 총리 추대론이 나오는 등 그의 역할론이 계속 논쟁거리였다. 하지만 그때는 경선 후유증을 극복하기 위한 당 차원의 화학적 결합을 위한 정치적 접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 세계적인 경제위기가 몰아치고 있는 이때에는 한나라당 차원이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박 전 대표의 역할론을 논의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박 전 대표가 계속 ‘이 대통령의 리더십을 존중하기 때문에 현안에 대해 발언하지 않는다’라는 입장을 견지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이 대통령이 잘못하면 회초리라도 드는 심정으로 쓴소리를 해야 한다. 박 전 대표가 당의 일과 국가 차원의 일을 구분해서 접근해야 역할론에 대한 해답이 나온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박 전 대표의 역할론을 주장하는 쪽은 친이 진영뿐만 아니라 중립 성향 의원들까지 확대되는 추세다. 중립 성향의 C 의원은 이에 대해 “박 전 대표로서는 이명박 대통령이 이제 막 집권을 해서 의욕적인 행보를 하는데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 자체가 예의가 아니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것은 정치도의상 당위론적인 이야기다. 물론 자신의 대권 행보를 위해서라도 일찌감치 현실정치에 뛰어든다면 집중 견제와 함께 국민들도 식상해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조기 부상은 여러모로 마이너스 요인이 많다”고 전제하면서도 “하지만 박 전 대표의 그런 ‘조신 모드’는 일반적인 대권 구도일 때 가능한 것이다. 지금은 세계적인 경제위기라는 중대한 대외 변수가 발생했다. 그렇다면 박 전 대표도 자신의 전략을 바꿔야 한다. 조심스런 행보 전략을 택했을 때와 지금의 정치적·대외적 환경이 달라졌다면 대권 전략도 다시 짜야 한다. 그런 점에서 보면 현재의 침묵 모드는 시시각각 변하는 계절에 두터운 외투 하나로 1년을 버티는 꼴이다. 이제 박 전 대표도 친이 진영의 역할론 주장을 정치적 의도가 담긴 생색용으로만 받아들이지 말고 보다 적극적인 대응을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친이 진영과 중립 성향 의원들마저 가세한 박근혜 전 대표 역할론 주장이 친박 그룹으로 옮겨가면 그 해석이 백팔십도 달라진다. 먼저 그동안 박 전 대표 역할론이 나왔을 때마다 ‘진정성이 없다’라는 반응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런데 정치권 일각에서는 ‘친이 진영이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박 전 대표 역할론을 계속 쟁점화시키고 있다’라고 본다. 그 정치적 의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이번 논란이 박 전 대표에 대한 본격적인 견제의 시작이라는 점이다. 지난 대선 기간 동안 이명박-박근혜 캠프를 오가며 메신저 역할을 담당해 양측 사정을 잘 아는 정치권 관계자 D 씨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내가 볼 때 이명박 대통령은 5년 집권 기간 동안 결코 박 전 대표를 예우하거나 ‘키우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는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한번 마음이 떠난 사람에게 절대 다시 기회를 주지 않는 이 대통령 특유의 인간성 때문이다. 만약 그가 박 전 대표와 화해할 의사가 있었다면 지난 총선과 조각 때 그 일단을 보였을 것이다. 그것이 권력 운용의 묘이자 정치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그것을 알면서도 차버렸다”라고 전제하면서 “이런 점에서 박근혜 역할론도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신기루 같은 제안이다. 이 대통령이 그럴 뜻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친이 진영이 계속 역할론을 주장하는 것은 박 전 대표를 본격적으로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역할론을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박 전 대표는 조용한 행보를 하고 있는 것 같지만 희망포럼 등을 통해 당내 중립 의원들을 계속 관리하고 있다. 또한 ‘박사모’와 함께 박 전 대표의 최대 팬클럽인 ‘호박가족’이 내년 초에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할 계획을 가지고 있는 등 소리 없이 대권 행보를 넓혀가고 있다. 내년 5월 원내대표 경선에 김무성 의원 출마설이 나오는 등 계속 세를 확대하는 것에 대해 친이 진영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이번 역할론 논란을 쟁점화시켜 박 전 대표가 여론의 비판을 의식해 주춤해지는 것을 노리는 것이다.”
D 씨는 또한 “친이 진영은 역할론 논란을 통해 ‘신뢰 있는’ 박 전 대표의 이미지에 상처를 줄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 같다. ‘국가 경제가 벼랑 끝에 몰렸는데 박 전 대표가 한가한 소리만 한다’라는 인식을 심어줘 그를 무책임한 리더로 몰아세울 수 있는 것이다. 일단 이 전략은 먹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친박 진영이 이번 역할론 논란에 대해 극도로 감정적인 대응을 하고 있는 것도 친이 진영의 박 전 대표 깎아내리기가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고 있다는 방증이 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박 전 대표의 역할론에 대한 논란 가열은 상대적으로 이명박 대통령에게 오는 정치적 하중을 일정 부분 덜어주는 효과도 낼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여의도의 한 정치 컨설턴트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지난 10월부터 ‘경제위기’가 급속하게 국가 아젠다의 중심에 서면서 정치권에 보이는 사람은 이명박 대통령과 강만수 장관뿐이라는 말들이 많다. 지난 노무현 정권 때 ‘엎어져 코가 깨져도 노무현 대통령 탓’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왔듯이 이번 경제위기 국면도 ‘경제 해결사’를 표방한 이 대통령에게만 그 시선이 쏠리고 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이 대통령 혼자서 해결할 문제도 아니고 그럴 수도 없다. 그러니 이 대통령은 촛불정국 이후 경제위기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회복할 모멘텀을 놓치고 계속 정치적 부담을 혼자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라고 밝히면서 “하지만 최근 보수층을 중심으로 오바마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자신의 경선 라이벌이었던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을 국무장관에 내정한 것을 두고 ‘우리도 이 대통령이 박 전 대표를 끌어안아 경제위기를 극복하자’라는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다. 홍준표 대표 등도 이에 편승해 박 전 대표 역할론을 적극 주문한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여권 권력 구도상 박 전 대표가 경제위기를 해결할 만한 위치에 올라설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 그럼에도 이런 주장이 계속 나오는 것은 이 대통령에게만 몰렸던 경제위기의 책임이 박 전 대표에게로 일부 옮겨가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박 전 대표 역할론 논란은 친이 진영 입장에서는 밑지지 않는 장사인 셈이다.”
박 전 대표 역할론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그동안 한나라당 내부에서 숱하게 논란이 됐던 ‘흘러간 드라마’다. 그럼에도 이번에 또 다시 ‘흥행’을 하는 이유는 세계적인 경제위기라는 변수 때문에 범계파적 단합을 요구하는 국민적 요구가 그 시청률을 더욱 높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여기에 출연하는 이명박 대통령이 진정성이 담긴 리얼 드라마를 만들 것인지, 아니면 말 그대로 ‘연기’만 할 것인지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