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박정희는 높은 수출증가율에도 불구하고 국제수지 상태가 만성적 적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외환 보유고가 자주 고갈되고 국가 채무가 날로 늘어나는 현상을 타개하기 위해, 외화 가득률이 높은 해운 산업을 국가 전략 산업으로 지정하고 해운 통폐합 조치를 단행하고, 국가 계획 조선 사업을 시행한다.
그러나 상기 두 사업은 박정희가 실시한 경제 시책 중 여러 졸작 중 가장 해당 사업에 악영향을 준 졸작 중 졸작으로 귀결되어 버린다. 나는 해운업계에 1985년 여름에 투신한 이후, 이 어이없는 정책의 후유증을 가장 민감하게 느낀 장본인이므로 이를 고발하여 박정희식 경제의 폐해 중 잘 알려지지 않은 이 분야의 폐해에 대한 세간의 관심을 유도하여 차세대 성장 엔진 중 하나인 대한민국 물류 산업의 재육성에 귀감이 되도록 할 목적으로 이 글을 쓴다.
부수적으로 아시아의 경제 성장과정에서 대한민국 수출 산업이 소위 구미 선진제국에게 어떻게 농락 되었으며 박정희가 이에 얼마나 무력하였는지, 그 결과로 당시 촌철 살인적인 열정으로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산업 현장에서 몸부림치던 젊은 산업 역군들이 그 당시 왜 그렇게 비참하게 살아야 했는지? 에 대한 해답의 일부나마 밝혀지기 바랄 뿐이다.
1970년 이전까지 대한민국은 물자 수송능력을 대표하는 국가 기간 산업의 하나인 해운 산업이 열악하기 그지없는 상태였으며 국내 선복량은 그저 미미한 정도였다. 다행히 당시 무역 의존도가 높았던 한일간 항로에는 이승만의 똥고집 덕분에 일본 국적의 선박의 취항이 금지되고 대한민국 선박의 출입만 허용되던 독점적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이 항로를 바탕으로 여러 중소 해운선사가 설립될 수 있었다.
외환위기의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해체된 조양상선은 현재 천일고속과 정기 화물을 운영하던 창업주가 한일정기 항로의 개설과 더불어 항로면허를 받아 시작하였던 회사이다.
그러나 소위 원양항로라고 불리우던 유럽항로와 미주항로에는 300년 이상 유지되어온 미국과 기타 구미 선진 제국과 일본의 해운 선사 카르텔, (Far East Europe Freight Conference/극동 유럽 운임동맹)이 존재하여 전 세계의 해운 물동량의 80%를 독과점하고 자기들끼리의 독점 카르텔을 구성하여 후발 제국의 신흥 선사들의 진입을 방해하곤 하였다.
이들은 300년간이나 단결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지켜 왔다. 이 키르텔이 조직된 이유는 18세기 초부터 시작된 유럽의 동양침략은 당시 항해기술상 10일 항해거리마다 선박의 기항과 안전 확보를 위한 해군 기지가 필요하였다. 그러나 한 나라의 힘만으로 이를 유지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서양의 여러나라는 영국을 중심으로 상선단의 카르텔이 조직되기 시작하여 1990년대 초 해체되기까지 무려 300년간 아시아 및 중국과 유럽간의 항로에서 해운의 이익을 독점하였다. 이는 근대에 나타난 상업 카르텔 중 가장 강력하고 오래 유지된 카르텔이었다.
이 카르텔이 비회원 선사의 영업을 방해하는 방법은 악랄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비회원의 선박의 출항 시간에 맞추어 정상운임의 70%라는 파격적 특별운임에 동시 출항하는 선박을 배정하여 비회원은 영업을 못하게 하였다. 비회원 선사와 거래하는 하주는 벌금을 부과하여 고객도 협박하였다. 비회원은 아예 씨를 말리는 방식이다.
이들이 이렇듯 횡포를 부릴 수 있었던 배경은 다음과 같다. 당시 부산에서 독일의 함부르그까지는 통상 항해일수가 35일 정도 소요되었고 주당 1척씩 출항시키기 위해서는 유럽항로에만 3000 TEU(20’ 콘테이너 3000 적재가능) 약 9척의 선박이 필요하였는데, 당시 어느 선사도 이러한 능력이 없었고 단독취항으로는 영업능력과 물동량도 넉넉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 카르텔은 물동량에 맞추어 투입 선복량을 조절하는 방법으로 시장을 장악해갔다. 당시 평균 선복 소석율은 약 85%이니 사실 상 만선이며 시기적으로 물동량이 몰리면 고객들은 선적을 위해 2-3주간 기다리기도 하였다.
당시 한국적 선사들은 조양상선과 대한선주가 유럽항로에 각각 2500TEU 2척씩을 가지고 동맹의 가장 말석에서 동맹 물량 약 3%씩 물량을 배정받았으며, 점유율을 올려달라는 요구는 번번이 유럽의 타 선주들에 의해 묵살되고 있었다.
1973년 당시 대한민국 국영선사 대한선주(현 한진해운 전신)과 조양상선의 경영진은 대만의 민간 선사 에버그린의 왕회장의 갑작스런 방문을 받았다. 왕회장은 같이 동맹을 탈퇴하고 대만과 한국적 선박으로 단독 선단을 구성할 것을 제안하였다. 전통적으로 유럽 선사들을 지원해온 유럽의 대 하주들에게 파격적인 운임(사실상 정상 운임)과 어느 정도의 합리적인 주 1회의 출항빈도와 33일 이내의 도착기간을 제시하면 동맹의 물량을 잠식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한국적 선사들은 이를 정부에 보고하고 허락을 기다렸다. 박정희 정권은 이 보고를 받고 묵살한 후, 자기들이 동맹과 교섭하여 점유율을 높이는 협상을 하겠다고 하였으나, 매년 니스 같은 유럽의 최고급 휴양지 호텔에서 호화롭게 열리는 선주회의에서 계속 찬밥만 먹었다.
그러자, 약 10년 후, 대만의 왕회장은 막대한 부담을 지고 한창 강력해지고 있던 화교자본을 끌어들여 단독 선단을 구성하여 미주와 유럽항로에서 단독 선단을 구성한 후, 가방 하나 달랑 들고 유럽의 여러 도시를 누비며 독일의 OTTO, 영국의 Campari, Martel 등 대 하주들을 설득해 1986년부터 단독 비동맹 서비스를 개시해 동맹의 점유율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하고, 현재 Evergreen Group은 해운뿐 아니라 화물 운송 전용의 항공사까지 소유하는 세계적 물류 운송 그룹으로 우뚝 섰다.
대만에서 Evergreen 신입 사원들은 실력은 말할 것도 없고 키도 173cm 이상의 건강한 남성들만 뽑는 선망의 초일류 기업인 반면, 당시 대한민국의 대표선사 대한선주는 막대한 부실을 국민들의 혈세로 메우고 문민정부 시절 선박의 대부분을 한진 해운이 인수하였고, (한진 해운은 대한선주를 인수하는 대신 엄청난 국책 자금의 공여를 정부로부터 받았다.) 대한 선주 인수의 경쟁자였던 조양상선은 뒤늦게 단독 선단 구성을 시도하다 적자를 이기지 못하고 현재 부도 처리 후, 회사가 해체되었다.
이 것은 정기선 시장에서만의 문제점이나 이 보다 덩치가 큰 부정기선 시장에서는 박정희 정부가 강제로 밀어붙인 해운 통폐합 정책은 재무 상태가 양호한 중형 선사가 내실 없이 껍데기만 키운 범양상선 같은 곳으로 강제 통합된 후, 역시 막대한 국민들의 혈세 낭비를 가져 왔고, 결국 범양상선 회장은 현대 정몽헌 회장보다 사무실 창문 투신의 선배가 되었다.
범양 상선 박회장 자살 당시의 신문 내용을 다시 보면, 그 흑막에 대한 추측들이 난무한 것을 알 수 있으며, 다시 파 보아야 할 문제이다. 모든 의혹은 죽은 사람에게만 집중이 되었으나, 당시 정권의 실세들이 개입되었을 것은 불 보듯 훤하다. 당시는 이 문제를 서둘러 덮었다. 과거사 조사에 포함시켜 진실이 밝혀지게 되면 좋겠다.
박정희 정권하의 실세들은 해운 산업 자체를 요리하며 살아남기 위한 선사들의 엄청난 로비를 부추겨 비자금을 챙겼고, 계획 조선과정에서 막대한 리베이트를 먹었으며 이 자금은 해외 비밀 구좌로 입금되었다. 이 내용은 범양상선 박회장의 행적에서 추적이 가능하다. 중고선 도입단가를 속여 두 세배 부풀린 후, 선가의 약 15-25%를 해외에 빼돌렸으니, 그 높은 원가를 누가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거기다, 당시 급등하고 있던 아시아 물동량을 선점하기 위한 어떤 대책도 비젼 제시도 없이 그저 바람부는 대로 자신들의 개인적 야욕에 이용하고 말았다.
결국 박정희 정권은 게걸스럽게 돈을 밝히느라 국가 기간 산업인 해운 산업을 황폐화 시켰다. 결과적으로 한국의 물류 산업의 경쟁력을 10년 이상 퇴보 시켰다.
지금의 현대상선은 신 고려 해운이라는 한일 선사의 미주 항로 면허와 선박을 인수하여 설립되었고, 한진해운 전술한 것처럼 대한선주를 인수하며 시작 되었는데, 그 합리화 과정에서의 혈세 낭비는 말할 수 없이 컸다. 공적 자금 투여와 함께 민간에 합병 시킨 것이다.
반면 비젼을 가지고 국제 해운 시장에 도전하였던 대만의 왕회장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반면 1995년을 기준으로 그 이전 확장을 거듭하던 반면 그 이후 금융 비용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미주 각지에 단독 물류 센터를 건립하려던 야심을 접고 내실화를 기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신 그 자금으로 화물 운송 항공사 Eva Air Line을 성공적으로 설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아마 한국 선사들과 공동으로 추진하였으면 왕회장의 이 계획은 완성되고 양국 선사들은 지금쯤 세계 해운을 석권하고 있을 것이다. 왕회장은 자금 부담 때문에 애초의 야심을 접은 것이다.
아마 박 정권이 욕심 없이, 그리고 안목을 갖고 국제 해운 시장의 흐름을 읽었다면 오늘 날 한국의 물류 산업은 그 전도가 무척이나 양양할 것이고 이의 효과는 양극화 해소에도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박정희는 대한민국의 해운 산업을 죽여 놓은 장본인이다.
당시 동맹이 부과하던 부산/유럽 운임은 약 $2500/20' 콘테이너이고 evergreen이 서비스 하던 운임은 $1500/20' 정도이고 197-80년대 우리나라 주 수출 품목인 섬유 제품의 수출가는 20' 당 평균 $20,000 이하였으니 콘테이너 당 약 $ 1000 불의 부당 이득을 구미 선사는 취한 것이고 이 금액은 수출 마진 보다 훨씬 큰 금액이다. 내가 받은 초봉이 3십만 원이고 당시 환율이 약 1200원이었으니 얼마나 큰 금액인지 느껴보라는 뜻으로 수출가를 적어 놓았다.
박정권의 잘못된 결정으로 엄청난 외화 손실을 가져 왔으니 하주들은 수출 경쟁력을 잃었으며 노동자들은 임금을 손해 본 것이나 다름없다.
이 글의 내용은 해운 경영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의 논문 주제로 쓰여질 수 있다. 본격적으로 학문적 연구를 해보라는 것이다. 이 글을 본 분들이 쓴다면 나는 권리 주장을 전혀 안 하겠다. 대신 대한민국 해운 물류 산업에 이바지할 수 있는 논문을 쓰기 바란다.
'박정희 고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정희 미화를 위한, 보편적 역사관 거부를 경계한다 (0) | 2008.06.21 |
---|---|
박정희 경제 신화 (0) | 2008.06.21 |
“박정희 개발독재, 美化마라” (0) | 2008.06.21 |
이영훈 "박정희시대 경제 고평가 돼야한다" (0) | 2008.06.21 |
"박정희 시대 저임금과 저곡가는 사실" (0) | 2008.06.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