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고찰

"박정희 시대 저임금과 저곡가는 사실"

이경희330 2008. 6. 21. 13:15
 
지난해 5월 교수신문 지상에서 제기한 필자의 비판에 대해 이영훈교수가 반론을 내놓았다(“장상환, 정성진 교수의 비판에 답한다”, ‘경제 교과서, 무엇이 문제인가?’, 두레시대, 2006). 이 반론의 타당성을 검토해보기로 한다.
 
저임금
 
우선 이 문제에 있어서 사실을 확인해둘 필요가 있다. 이영훈은 박기성의 연구결과에 의거하고 있다. 박기성은 이영훈을 방어하는 글(“1970-80년대 임금, 노동생산성만큼 지급되었다”, 교수신문, 2005. 5. 17)에서 “1988년-1997년을 제외하고 임금은 한계노동생산성과 거의 일치하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박기성·안주엽(“임금과 생산성”, <노동경제논집> 27권 1호, 2004)에서는 “1987년을 기점으로 기간을 나누어 보면 이전에는 임금이 한계노동생산성에 못 미쳤으나, 이후에는 임금이 한계노동생산성을 초과하였다”라 했다. 어느 쪽이 맞는 이야기인가. 또한 1988-2000년의 경우 박기성 자신의 분석결과에 따라도 이 시기 임금상승률이 한계노동생산성 증가율에 못 미쳤는데 박기성은 반론에서는 이에 대해서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자신의 주장에 유리한 사실만을 제시하는 것인가.
평균생산성은 측정하기 쉬운 반면 한계생산성은 측정하기 어렵다는 문제도 있다. 박기성·안주엽(2004)은 김동석·이진면·김민수, <한국경제의 성장요인 분석>(한국개발연구원, 2002)에서 제시된 노동 및 자본투입량, 총요소생산성, 노동소득분배율에 대한 자료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 자료는 무급가족종사자의 귀속임금을 어떠한 가정에 근거하여 추정하느냐에 따라 노동소득분배율과 총요소생산성의 추정결과가 상당히 달라질 수 있다는 한계가 있다. (신석하, “외환위기 이후 고용상황 변화에 대한 연구”, 유경준편, <한국경제 구조변화와 고용창출>, 한국개발연구원, 2004).
 
임금 상승이 한계생산성 상승과 거의 일치하거나 이를 상회한다는 것과 임금이 생계비와 일치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한계생산성 증가에 부응하는 정도로 임금이 상승하더라도 생계비에 못 미칠 수 있는 것이다. 생산에 기여한 만큼 임금을 지급했다고 하더라도 생계비 이하였다면 노동자는 초과착취당한 것이다. 
 
이영훈 교수는 이론생계비이든 실태생계비이든 계산에 큰 차이가 있어서 정치적으로 결정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론생계비는 계산방식에 따라서 큰 차이가 날 수 있지만 실태생계비는 큰 차이가 날 수 없다. 정부 공식기관인 한국은행의 <경제통계연보>(1973년) 자료와 통계청, <통계로 보는 한국의 발자취>(1995년) 자료에 의하면 1960-80년 제조업의 월평균 임금은 실태생계비의 49.7%(1965년), 1975년 77.3%, 95.9%(1980년)로 개선되고 있었으나 생계비를 모두 충당할 수는 없었다.
 
국세청 발표에 의하면 1978년 현재 전체 노동자 가운데 근로소득세 인적 공제 최저선인 5만원 미만의 비과세 인원이 전체의 76.7%를 차지했으며, 전체 노동자의 88.6%가 월 10만원 미만의 임금을 받고 있었다.(이원보, “경제성장 신화와 빈곤 그리고 불평등”, <내일을 여는 역사> 22호, 2005, 53-54쪽)
 
그러면 임금이 노동력 재생산비인 실태 생계비에 미치지 못했는데 노동자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이영훈 교수는 임금이 생계비에 미치지 못했다면 노동자의 숫자가 줄어들었을 터인데 그렇지 않았으니까 생계비만큼 임금이 지급되었다고 봐야 한다고 하지만 사태가 어떻게 돌아갔는지는 실태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바로 알 수 있다. 다수 노동자 가족들은 저임금을 받으면서도 살아남기 위해 열악한 생활을 해야 했고, 또 여러 명이 불완전 취업을 해서 생계비를 확보했다. 도시로 몰려든 농촌인구의 대부분은 낮은 소득과 도시의 부족한 주택사정 때문에 도시 주변에 판자집을 짓고 생활했다.
 
판잣집은 서울의 경우 1961년 8만4440호에서 매년 10-15% 씩 증가하여 1966년에는 13만6600호, 1970년에는 18만7500호에 이르렀고 도시주민의 약 1/3이 판자촌에 살았다. 단신으로 도시에 온 노동자들은 공장 주변에 밀집된 닭장집, 벌통집 이라 불리던 불량주택이나 기숙사에서 생활했다(오늘날에는 저임금을 받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이러한 불량주택에서 살고 있다). 정부는 청계천변 판자집 주민을 강제로 경기도 광주대단지(현재의 성남시)로 내쫓았다. 일자리를 얻기 어려워진 광주대단지 주민 3만여명은 1971년 8월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폭동을 일으켰다.
 
추가 취업희망자와 전직 희망자를 포함한 불완전 취업률은 1963년 21%에서 1971년 31%로 높아졌다. 70년대에 들어와서도 여전해서 임금 노동자 가운데 임시직, 일용직 노동자의 비중은 1971년 40%에서 1980년 36%로 거의 줄어들지 않았다. 윤진호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노동빈민층이라 할 수 있는 도시비공식 부문의 종사자 수는 1970년 약 230만명, 1975년 330만명, 1980년 약 450만명에 이르렀다(이원보, 2005, 52쪽).
 
이들 저학력, 생산직, 여성을 중심으로 한 불완전 취업 노동자들은 비참한 근로조건에서 일했다. 저임금을 보충하기 위해 잔업과 특근을 일삼았고, 산업재해와 직업병에 시달렸다. 청계천 피복 공장의 어린 여공들의 참상에 견디다 못해 분신한 전태일 열사의 절규는 바로 이러한 현실을 고발하는 것이었다.
 
한계생산성은 평균생산성보다 당연히 낮다. 따라서 한계생산성만큼 임금이 지급되어도 노동자의 분배몫은 감소할 수 있다. 분배 국민소득 가운데 노동자몫을 나타내는 피용자보수율은 1959년 38.2%에서 1964년 28.4%로 내려갔다가 1970년대말에 가서야 비로소 40% 수준에 이르렀다. 여기에는 피용자 비율의 증가가 반영되어 있다. 여기다가 전문직 기술직 관리사무직 노동자들이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받았으므로 실제 생산직 노동자에게 돌아간 노동소득 분배율은 훨씬 낮았다고 할 수 있다.
 
1960-69년 사이 제조업 노동자의 실질임금은 연평균 3% 증가에 그쳤는데 이것은 같은 기간 동 성장률 9%의 1/3, 노동생산성 상승률 13%의 1/4에 불과했다. 1970-80년에도 실질임금은 연평균 8% 증가한 데 비해 노동생산성은 10% 넘게 상승했다(이원보, 위 논문, 55쪽)
 
대기업과 중소기업간의 지배종속 관계
 
이 문제에 대해서 이 교수와 나의 견해가 일치하는 것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이중경제가 아니라 대기업의 중소기업 지배와 종속의 구조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교수는 비록 종속이라고 하지만 대기업이 성장함으로써, 즉 대기업 ‘덕분에’ 중소기업이 그래도 성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상은 대기업의 지배에도 ‘불구하고’ 중소기업이 연명해왔다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
 
박정희 정권은 사업 인허가, 외자 조달, 특혜 정책금융, 공업단지 조성, 등 전방위적 지원으로 재벌을 육성했다. 그 결과 재벌은 급격히 성장하여 국민경제 전체 속에서 20대재벌의 부가가치가 차지하는 비중은 73년 7.1%에서 78년 14%로, 46대 재벌의 부가가치의 비중은 73년 9.8%에서 81년 24.0%로 상승했다. 제조업에서 46대 재벌의 부가가치 비중은 73년 31.8%에서 78년 43.0%로 상승했다. 재벌체제는 박정희가 특혜금융 등으로 구축한 경제독재체제였다. 이런 속에서 중소기업의 종속성은 전차 심해진 것이다 이것은 대만의 중소기업이 상당한 자생력을 가지고 있는 것과 비교된다.    
 
저곡가
 
1960-1992년간 쌀 수매가는 한계생산비는 물론이고, 일반 물가상승률에도 못 미칠 때가 많은 저위, 불안정한 것이었다. 농가구입가격지수로 디플레이트한 수매가의 인상률은 마이너스인 해가 15번이나 되었다(황연수, “농산물가격정책의 방향”, <한국의 농업정책>, 미래사, 1995) 그래서 농업경제학계에서는 1968년 이후 도입된 이중곡가제와 1970년대 중반의 일반벼와 차별 없는 통일벼 수매 등에 대해 ‘상대적’ 고미가라고 한다. 수매가가 생산비와 소득을 충분히 보장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이나 이후의 현저하게 불리한 수매가에 비해 좀 나았다는 뜻이다. 이것도 그 이전의 공업화 집중지원으로 도시농촌간의 격차가 커진 것이 사회정치 불안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역점을 두어 시행한 대표적인 농업농촌 정책도 70년대 중반의 다수확 신품종인 통일벼 재배와 새마을운동이었다.
 
저농산물가격의 결과 도농간의 격차가 커졌고, 이에 농민들은 대규모로 농촌을 탈출했다. 배진한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1960년부터 1975년까지 약 680만명의 농촌인구가 도시로 밀려들었고, 그중 가구유출이 68.2%인 468만명, 단신유출이 31.8%인 218만명이었다. 이러한 농촌 과잉인구의 도시 유입이 바로 저임금의 바탕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 교수는 개방농정시대 구조조정을 우한 막대한 투자가 낭비된 것이 농민단체의 정치적 힘 때문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농민단체들은 직접지불제의 확대를 주장했다. 정부 관료들이 생산요소 구입 보조를 하여 농민들을 과잉생산과 가격폭락, 부채 누적의 구렁으로 몰아넣었다.
 
극단론으로는 생산적 논쟁이 될 수 없다.
 
이영훈 교수는 필자가 한국의 소득분배는 평등했다는 정부 작성 통계가 부정확하고 과소평가된 면이 있다고 지적한 것을 두고 “그러면 분배 열등생이라는 말이냐” 하고 되받는다. 이러한 단순 흑백논리의 논쟁자세로는 진실에 가까와지는 데 기여할 수 없다. 1960, 70년대에는 정부가 ‘선성장 후분배’론을 펼 정도여서, 분배 불평등도 미래의 높은 소득을 앞당기기 위해 감수하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그런 약속이 지켜질 가능성은 외환위기를 맞이하면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