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고찰

“박정희 개발독재, 美化마라”

이경희330 2008. 6. 21. 13:47

진보적 소장학자의 대표적 인물인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는 지난 19일 오전 10시 서울 중앙대에서 ‘해방 60년의 한국사회-역사적 궤적, 현재 속의 미래, 학문 재생산’을 주제로 열린 학술단체협의회 연합심포지엄에서 소위 ‘박정희 시대’ 재평가 논의를 강도높게 비판했다.
 
민주개혁세력의 헤게모니 약화가 주체적 원인 
 
조희연교수는 박정희 재평가를 진행하기에 앞서 민주개혁세력과 진보담론의 관성화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자기 자신도 예외일 수 없다”는 전제하에 조 교수는 그동안 소위 민주화 이후 집권한 민주개혁세력 및 진보담론의 관성화와 자기정체, 현실안주에 매몰된 채 개방적인 확장과 성찰적 전환을 이루지 못한 ‘주체적 문제’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했다.
 
이 과정 속에서 민주진보담론의 헤게모니가 약화되면서 소위 우파보수담론이 득세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김영삼 정부의 말미부터 소위 ‘박정희 신드롬’이 불기 시작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개혁세력의 현재적 위기와 미래적 전망 부재가 과거를 미화시키는 보수적 지향을 낳는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런 맥락에서, 개혁세력 및 진보담론의 가장 큰 문제는 복잡다기한 현실에 대한 분석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민중이 처한 ‘복합적 현실성’을 기존의 관성화된 언어와 개념으로만 이해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과 견해를 조 교수는 ‘본질적 동일성’으로 비판하면서 조 교수는 궁극적으로 ‘복합적 모순성’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주장한다.
 
이영훈, 독재시절 민중수탈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 교수는 ‘박정희 재평가’를 내세우면서 야만을 미화시키려는 학문적 시도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특히, 조 교수는 ‘민중수탈부재론’을 주창하는 서울대 이영훈 교수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을 전개한다.
 
박정희 재평가와 관련한 이영훈 교수의 주장은 “박정희 독재가 노동자, 농민, 중소기업의 일방적 희생 위에서 작동한 것처럼 논의되지만 이는 허구적 주장에 불과하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조 교수는 이 영훈 교수의 주장이 가진 취약성을 몇가지 관점에서 지적한다.
 
첫째, 이 교수는 “박정희 시대를 분석함에 있어 대단히 경제주의적 접근하고 있다.” 달리표현하면, ‘통계의 환상’에 빠져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경제주의 오류에 빠진 민중수탈부재론
 
이 교수는 노동자의 희생 위에서 개발독재가 진행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한계’ 노동생산성 만큼이나 임금이 증가하였다는 점을 제시한다. 그러나 하나의 단일한 경험적 지표에 의존하여, 박정희 독재에는 ‘민중수탈이 없었다’고 규정하는 것은 특정한 의도를 가진 논리적 비약에 다름 아니다. 
 
설사, ‘한계’ 노동생산성 대비 임금증가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그러한 임금 증가가 노동자, 민중의 고통 속에서 전개된 저항의 ‘효과’라는 점이 전혀 고려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시, 저항은 폭압적인 수탈에 대한 최소한의 인간적 요구였고 이로인한 임금상승을 근거로 박정희 독재를 정당화시킬 수는 없다. 
 
즉, 이 교수는 성장만을 배타적으로 강조하면서 ‘성장’ 안에 담겨진 노동자, 농민 등 기층 민중의 처절한 고통과 저항은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차라리, 이 교수는 ‘민중수탈부재론’이 아니라 “성장을 위해 수탈은 불가피했다”로 바꾸는 것이 보다 세련된 변신있겠지만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성장안에 담겨진 민중의 고통과 저항은 외면
 
전태일 열사의 분신으로 상징되는 처참한 현실에 눈감으면서 “수탈이 없었다”혹은 “수탈은 불가피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경제성장을 위해 인간성을 말살되어도 좋다는 주장과 본질이 다르지 않다.
 
이런 맥락에서, 또다른 진보적 소장학자인 김보현 연구자가 제시한 자료(돌베게 출판 '나의 죽음을 헛되이말라'에서 인용한)는 이 교수의 취약점을 명백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청년 재단사 전태일은 분신을 결행하기 1년전, 대통령 박정희에게 보낼 작정으로 진정서 하나를 남겨 놓지만 끝내 ‘부치지 못한 편지’로 남고 만다.
 
‘경제성장의 역군’인 전태일이 산업현장에서 매일매일 경험하고 목격해야만 했던 야만적 실상들은 이 편지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존경하는 대통령 각하 …
… 시다공들은 평균 연령 15세의 어린이들로서 … 하루에 90원 내지 100원의 급료를 받으며 1일 16시간의 작업을 합니다. … 저는 … 도저히 이 참혹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 1개월에 … 2일을 쉽니다. 이런 휴식으로썬 아무리 강철같은 육체라도 곧 쇠퇴해버립니다. … 숙련여공들은 … 대부분 … 안질과 신경통, 신경성 위장병 환자입니다. 호흡기관 장애로 또는 폐결핵으로 많은 숙련여공들은 생활의 보람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 기업주는 건강진단을 시켜야 함에도 … 2명이나 3명 정도를 … 지정하는 병원에서 형식상 … 마칩니다. X레이 촬영 시에는 필름도 없는 촬영을 하며 아무런 사후 지시나 대책이 없습니다. … 나라의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실태입니까?
… 왜 현 사회는 그것을 알면서도 묵인하는지 저의 좁은 소견으로는 알지를 못합니다. … 이 모든 문제들에 대해 한시 바삐 선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1969년 12월 19일, 전태일

 

조 교수에 의한다면, “박정희 시대의 개발독재하에서 “한국의 자본가는 ‘원시적’ 측적과정에서 국가의 막강한 경제적 지원을 받고 부동산 투기 등 경제외적 기회들을 십분 활용하면서 더구나 반공주의에 의한 노동자의 순응, 국가의 공권력에 의존한 노동자들의 조직적 행동에 대한 억압에 기초하여 초기 축적 과정을 압축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초기 축적 과정에서 한국의 자본가는 이른바 ‘저임금-장시간 노동’으로 상징되는 가혹한 축적전략을 가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태일 분신 등에서 보듯이 노동자들이 주체화되어 가면서 저항이 격화되고 다른 경제적 조건 등이 출현하면서 이러한 초기 축적 구조는 변화를 강요당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이영훈 등이 지적하는 노동자 임금 상승도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이를 ‘한계’ 노동생산성과 임금상승율의 상관관계로 박정희 시대의 축적과정의 특성을 설명하는 것은 일면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경제는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조 교수에 의한다면,  GDP 내에서 임금의 비중 같은 ‘보다 일반적인’ 경제적 지표를 고려한다면, 박정희 독재가 원시적인 노동수탈 체제였다는 것은 간단하게 증명된다. 더구나 경제는 사회와 동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정치사회적 요인들이 결합된 ‘현실의 구성적 일부’이다. 
 
이처럼, 이 교수는 “자본이 축적되는 전 과정을 가볍게 처리하고, ‘한계’ 노동생산성과 임금상승률의 관계로 단순화한 후, 그러한 ‘특정한 경험적 지표’만을 내세우면서 ‘수탈은 없었다“고 주장”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조 교수에 의하면, 이 교수의 이러한 과오는 ”소득분배의 역사구조적 조건과 현재적 변화과정에서의 연속성을 고려하지 않고 소득분배의 단기적 지표만으로 개발독재가 평등주의적이었다”고 결론짓는 이 교수의 주장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조 교수는 “복합적 현실을 자기 방식대로 단순화 한 후 거기서 규범적 결론을 도출해 내는 방식에 대해 동의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이러한 지적은 이 교수의 또다른 주장인 ‘대기업-중소기업의 균등한 관계론’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이 교수는 박정희 시절,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관계가 “수탈적이고 불공정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반박한다. 박정희 정권 하에서도 중소기업은 꾸준히 성장해왔다는 것이다.
 
대기업은 균형있고 공정했다?
 
그러나 개발독재 과정에서 성장의 과실을 대기업이 독점하다시피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며 그 실상과 폐해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발독재 하에서 중소기업이 성장했다면 이는 중소기업이 자신의 발전 동력을 대기업에 수탈당하면서도 그 희생 속에서 발전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이런 관점에서 조 교수는 “중소기업의 성장은 대기업-중소기업의 불균등하고 비대칭적인 수탈적 관계에도 ‘불구하고’ 중소기업이 희생을 통해 성장했다고 해석하는 것이 맞다. 중소기업의 불균형한 관계와 열악한 지위를 무시하고 대기업-중소기업의 관계가 수평적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명백한 역사적 사실에 반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일면적이고 경험적인 하나의 자료를 전체화시키는 이 교수의 오류는 개발독재 과정에서 수탈당한 농촌과 농민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에도 반복적으로 드러난다. 농촌경제외 붕괴와 도농간의 급격한 생활 격차라는 명백한 사실 앞에서 “농민 희생 없이 개발독재가 진행되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고 만다. 
 
평등주의 전통, 발전의 장애물인가 발전의 기반인가
 
또한, 이 교수는 한국에 존재하는 강력한 평등주의적 전통이 근본적으로 민주개혁의 과잉을 만들어 내면서 한국사회 발전에 장애물이 되었다고 평가하지만, 조 교수는 이에 대한 반대입장을 분명히 한다.
 
즉, “평등주의적 관점을 이영훈 교수가 비판하고 있지만, 평등주의야 말로 한국자본주의 합리화의 주요한 동력이자 한국의 천민적 자본주의의 가혹에도 불구하고 한국자본주의의 ‘인간화’를 촉진한 요인”임과 동시에 “한국의 민주주의를 진전시키고 경제적 불평등을 완화시켜가는 중요한 사회적 자산”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 교수의 지적은 이 교수 등 일부 보수학자들이 주도하고 있는 소위 ‘성찰 교과서’ 만들기 운동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이들은 기존의 교과서가 지나치게 역대 정권을 비판하고 있기 때문에 패배주의를 조장한다고 비판한다. 기존의 교과서가 그렇게 비판적인지도 의심스럽지만, 이들의 주장에 대해 조 교수는 반대입장을 분명히 한다.  
 
조 교수는, “역대 집권자들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야말로 한국사회 발전의 중요한 동력 중 하나이고,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모범적인 민주주의와 인권 국가로 나아가 친환경적이고 평등하고 인간다운 사회를 만들어가려는 실현가능한 정책으로 구체화시켜 나가는 동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 교수의 이러한 개발독재 비판은 2005년 우리의 현실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데 더 큰 의의가 있다. 
 
신자유주의로 부활한 개발독재의 망령
 
개발독재를 ‘정치적으로는’ 나빴지만 ‘경제적으로는’ 좋았다는 등속의 논리가 횡행하는 현실에서 개발독재의 망령은 화려하게 부활하기 때문이다. 


개발독재가 국가개입을 통한 ‘성장지상주의’를 정당화하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민중의 생존권과 인권 무시를 불가피한 것으로 정당화했다면, 신자유주의 논리 역시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자리를 시장이 대체하고 이윤 창출의 논리와 효율성의 원리를 절대선으로 간주하면서 이를 위해서는 기층 서민 및 민중들의 고통 해결은 유보되어야 하며, 평등에 대한 요구는 발전을 위해 ‘불가피하게’ 무시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비판과 저항을 무력화시키는 시장만능주의가 지배적인 현실을 정당한 것으로 강요하고 대중들이 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때, 사회 양극화 현상은 더욱 심화될 수 밖에 없다. 

시장이 양산하는 불평등과 민중의 고통을 교정하려는 국가의 역할을 (시장)발전의 장애물로 간주하게 만드는 것, 천문학적인 불법정치자금을 제공했거나 분식회계 등을 통해 막대한 공금을 유용했어도 ‘경제 충격’을 빌미로 재벌 총수에게 면죄부를 부여하는 것 등이 ‘현대판’ 개발독재의 또다른 징후이다.
 
인간이 빵만으로 살수는 없지만, “밥 없이 살 수 있는 인간은 없다”는 점에서, 그 밥을 사회가 어떻게 만들고 또 그것을 어떻게 나누는가의 결정권을 시장이 독점할 때, 고삐풀린 시장만능주의는 인류에게 불행한 고통과 파국만을 줄 뿐이다. 우리의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