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고찰

박정희 경제 신화

이경희330 2008. 6. 21. 14:00
한국의 경제성장, 물론 박정희 때에 있었다. 대단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무시하는 북한의 김일성 때는 없었나. 미국의 적으로서 (어떤 사람들에게는)살인마 정도로 간주되기도 하는 소련의 스탈린도 엄청난 경제 성장을 일구어냈다. 유럽에서 가장 낙후한 후진국가였던 소련이 미국에 앞서 우주선을 발사하게 될 정도로 경제력을 키웠다. 어디 그뿐이랴. 우리를 식민지배한 일본 제국주의도, 유대인 학살의 대명사 히틀러도, 이태리 파시스트인 무솔리니도 일정 기간 동안 놀라운 경제 성장을 이룩하였다.
 
6.25전쟁 중 미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구석기 시대로 돌아간(미군장교표현) 북한이, 100년은 지나야 다시 재기할 수 있을 것이란 진단을 뒤엎고 1970년쯤에는 다시 일어섰다. 그 업적에 대한 북한의 선전과 자랑은 익히 알려진 바이다.
 
고난의 행군이라고 했던가. 그런 자랑의 중심에는 빨치산 1세대를 대표하는 김일성이 있었고, 그의 업적을 높이려는 충성파들의 열정은 어느 정도 수치의 과장과 대국민 선전이란 결과를 낳았을 것이고, 그런 상황은 같은 독재체제였던 남한에서도 비슷하였을 것이다.
 
남한에서는 북한과 달리, 경제 개발이라는 박정희의 업적을 높이고 선전하려는 충성파들의 노력이 결코 없었다고 과연 장담할 수 있을까. 독재 체제하에서라면, 그 시대의 통계 수치 역시 과잉충성과 비위맞추기에 능한 자들에 의해 적당히 요리될 수도 있었다는 점을 무시할 수가 없다. 무엇인들 못 만들겠는가, 지엄하신 각하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그러니 그 시대의 경제성장 신화를 액면 그대로 너무 숭상하는 것도 북한의 선전을 그대로 믿는 것만큼 경솔한 일이다.
 
근대화 프로젝트를 수행했던 많은 나라들, 특히 공산주의 국가들은 단기적인 강제 동원을 통해 이른 시일 내에 급속한 경제 성장을 거두었다.(물론 그렇지 못한 독재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조금 길게 보면 그 성과를 이어간 나라는 많지 않다. 한국 경제가 1997년 말 외환위기를 당한 것도 박정희식 경제 모델의 파탄이 아니었을까?
 
박정희는 1966년 외자도입법을 개정해 해외에서 돈을 빌리기 힘든 재벌기업들한테 정부 명의로 지급보증을 해줬다. 이에 따라 기업들은 무리하게 외채를 빌려다 썼고, 기업 부실로 인해 1970년대 초에는 국가가 외채지급불능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특히 IMF사태 버금 갈 정도로 심각한 경제위기였던 1979∼80년의 공황은 중화학공업화 추진 과정에서 발생한 과잉 중복 투자의 모순이 폭발한 것이었다. 상위 10대 재벌의 평균 계열사 수는 1972년 7.5개에서 1979년 25.4개로 대폭 늘었는데, 재벌의 팽창 속도만 봐도 당시 중화학공업 과열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다. 이러한 과열 중복 투자는 1979년부터 대규모 기업부실을 낳았다. (출처: 조계완의 기사)
 
과연 10.26사태 없이 박정희 정부가 계속되었다면 한국은 어찌되었을까. IMF 사태가 훨씬 더 빨리 왔을 것이다. 그리하여 남미처럼 한국 경제는 풍지박산 나고 밑바닥을 벌벌 기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당시 이미 개발 독재로 인한 부작용이 만연한 상태에서 경제는 위기 상황이었다. 다행히 박정희의 죽음으로 전두환이 들어섰고, 박정희를 업고 위세 부리던 자들을 부패 사범으로 몰아 절단내 버리고 자기 세력으로 새로이 진용을 짜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경제 체제에 대한 어느 정도의 시정 조처도 가능해졌다.
 
또한 찬란한(?) 박정희 시대를 장식하고 있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란 것도 사실은 박정희가 만든 게 아니었다. 장면 정부가 이미 다 입안해서 실행 직전이었던 것을 박정희가 도용한 것일 뿐이다. 경제개발도 자금이 있어야 한다. 장면 정부는 경제개발 계획서를 바탕으로 미국 정부에 지원을 요청하고, 또 일본과 전후 배상금 협상을 통해 자금 마련의 길도 모색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 당시 한일 전후 배상 문제에 대한 협상 과정에서 장면 정부는 일본에 18억불 정도를 요구하였고 일본측에서는 12억불을 제시한 상태였다. 제대로 협상이 되었다면 한 15억불 정도 선에서 타협을 봤을 것이다. 그런데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는 고작 3억불(무상)만을 받아 냈다. 그것도 35년 동안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고 저지른 만행에 대한 한마디의 사과도 없이 말이다. 아니, 그런 사실 자체에 대한 언급조차 없었다. 정통성 없는 정권이다 보니 약점이 잡혀서 민족 자존심과 경제적 실익을 몽땅 헐값에 팔아먹은 것이다. 박정희 때문에 12억불(그 당시 우리 형편으로는 엄청난 돈 아닌가)이라는 경제개발 자금이 날아간 것이다.
 
'한일관계의 미래' 라는 제목의 1966년 3월 18일자 미 중앙정보국 특별보고서 따르면, 당시 박정희는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1961부터 한일협정을 체결한 1965년 사이 5년간에 걸쳐 6개의 일본기업들로부터 민주공화당 총예산의 2/3에 해당하는 6600만 달러를 제공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역사에 가정이란 없는 것이지만, 박정희가 아니었더라면 대한민국은 더 좋게 발전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 경제가 도약을 시작한 것은 1950년대 후반부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4.19 혁명 뒤에도 경제는 비교적 안정적인 성장을 지속했다. 이런 진실은 독재정권에 의해 철저하게 은폐되었다. 그리고 독재 정권은 마치 박정희가 우리 경제를 도저히 헤어날 길 없는 깊은 수렁에서 건져낸 것처럼 조작해냈다.
 
장면 정부를 이어 민주정권이 자리를 잡아 합리적인 의사결정구조 하에 착실히 경제개발계획을 실행에 옮겼다면 경제 성장과 분배 정의가 병행되는 보다 온전한 경제발전이 가능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 국민의 높은 지식욕과 근면성을 고려한다면 말이다. 그 당시에도 우리국민의 문맹률이 아시아 국가 중에서 가장 낮았다는 사실과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하는 백성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곤란하다. 경제성장의 동력은 바로 뛰어난 노동력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혹독한 저 임금과 열악한 작업 환경 속에서도 자식만은 교육시켜 보겠다는 일념(이것이야말로 경제성장의 힘이 된 교육열의 핵심이다)에 피땀 흘려 일했던 부모들, 자기가 못한 공부를 오빠나 형이나 동생만은 꼭 시켜 보겠다고 공장에서 밤낮을 지새운 공돌이와 공순이들이 있었기에 한국 경제는 성장할 수 있었다. 가족공동체에 대한 의무와 애정에 뿌리를 둔 강력한 노동의 힘이야말로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한국만의 강점이었다. 그 힘이 오늘까지 한국 경제를 이끌어 온 것이다. 단순히 공부를 많이 시켰다고 해서 경제 성장이 가능했던 것이 아니다. 공부를 시키겠다는 일념 하에 행해진 희생적 노동이 바로 성장의 근원적 동력이었던 것이다.
 
어떤 이들은 1960년 우리는 아프리카의 가나보다도 못 사는 세계 최저의 빈국이었는데 박정희 덕택에 잘 살게 되었다고 한다. 과연 이런 식으로 한국을 가나와 비교해도 되는 걸까. 우리 한국(조선)은 문명국가였다. 500년을 지속하며 온갖 물질적 생산력을 축적한 나라였다. 개성 상인으로 불리는 상업자본과 호남 평야를 바탕으로 한 농업 생산 기반과 대장장이, 도공과 같은 수공업 분야의 기술력 등으로 물질적 생산 기반을 이미 갖추고 있는 나라였다.
 
비록 증기기관이라는 새로운 동력에 바탕을 둔 서양 문물에 휘둘리다가 결국에는 근대적 군사력을 갖춘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지경에 이르기는 했지만 말이다. 오랜 동안 독자적인 물적 생산 기반을 거의 갖추지 못하고 있던 아프리카의 국가와는 질적으로 다른 나라이다.
 
일제가 전쟁 수행을 위해 행한 철저한 약탈과 3년간 지속된 6.25전쟁의 참화를 겪으며 그 물질적 생산기반이 손상을 입기는 했지만, 언제든 시간과 노력만 부여되면 얼마든지 재기할 수 있는 저력이 있는 나라였다는 사실을 간과한 채, 완전히 맨바닥에서 어느 날 갑자기 위대한 독재자 한 사람의 신출귀몰한 영도로 말미암아 경제가 발딱 일어선 것처럼 말해서는 곤란한 것이다.
 
예로부터 이어져온 한국인의 문화적 저력(석굴암, 청자, 한글, 거북선, 대동여지도 등등)과 희생적 노동력이 지금 세계를 향해 놀라운 포효를 하고 있다. 이는 민족 공동체의 저력이다. 과학 기술 분야와 문화 연예 분야와 종교 예술 분야 등 세계 문명의 선두를 비집고 앞서 가는 위력이 어찌 한 사람의 독재자 때문에 갑자기 생겨났겠는가. 18년간의 세뇌로부터 이젠 벗어날 때도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