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의 이론적 배경〉 훈민정음의 제자(制字) 및 그 결합의 철학적 배경은 성리학적(性理學的) 이론인 삼극지의(三極之義)와 이기지묘(二氣之妙)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삼극은 천·지·인 삼재를 말하고, 이기(二氣)는 음(陰)·양(陽)을 말한다. 성리학적으로 이 삼재와 이기로 우주일체의 사상(事象)을 주재하는 기본이념으로 이해되고, 이 삼재와 음양을 떠나서는 우주일체의 사상이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의 성음(聲音)도 그것이 개념을 표상(表象)하는 그릇이므로, 근본적으로 삼재와 음양의 원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며 말소리의 체계는 삼재·음양의 체계와 반드시 합치해야 한다는 것이 당시의 언어관(言語觀)이었다. 따라서 훈민정음은 그 음(音)의 분류에 있어서나 제자 원리에 있어서 그 철학적 이론은 모두 이러한 언어관에 입각하고 있다. 성리학에 따르면 모든 사상은 음양(陰陽)·오행(五行)·방위(方位)의 수(數)가 있으므로 음의 분류도 오행의 수에 맞추었다. 오행 ·방위, 그리고 초성에 있어서의 춘하추동, 궁상각치우(宮商角徵羽), 중성에 있어서의 천·지·인, 일·이·삼…(一 二 三…)의 수와 같은 것은 모두 성리학적 원리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음의 특징은 음성적 특징과 성리학적 특징의 양면에서 기술되어 있다.
〈창제 동기와 목적〉 훈민정음의 창제 동기와 목적은 '훈민정음(訓民正音)'이란 이름 자체에도 나타나 있지만 세종이 직접 서술한 훈민정음 본문의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그 서문은 다음과 같다. "국어가 중국과 달라서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일반 백성이 말하고자 하나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할 자가 많은 지라, 내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28자를 만드나니 사람마다 쉽게 학습하여 일용(日用)에 편케 하고자 할 따름이다(國之語音 異乎中國與文字 不相流通 故愚民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 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易習使於日用矣)."
첫째, 한국어와 문자가 일치하지 않는 데서 오는 여러 가지 모순과 불합리를 제거하자는 데 그 창제 동기와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한자(漢字)는 원래 중국어에 의하여 발생, 발달해온 글이다. 따라서 그것은 중국어를 표기하기에 합당한 글자이지, 구조적으로나 음운체계를 달리하는 한국어의 표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글자이다. 그러므로 한국어의 구조와 음운체계에 맞고 배우기 쉬운 글자를 만들어, 우리의 음운과 의사를 그대로 표기할 수 있을 때 한국은 보다 적극적으로 민족문화를 육성,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둘째, 모든 백성에게 문자 이용의 혜택을 균등하게 입게 하자는 데 동기와 목적이 있었다. 한자의 체계는 그 구조·형식 때문에 기술적(記述的)으로 대단히 복잡하고 특수한 훈련이나 기술(技術)이 없으면 익히기 매우 힘들고 또 그것을 완전히 익히려면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중국 자체에서조차 이 한자를 완전히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일부 소수의 지식·귀족계급에 한정되었다. 그러므로 특히 한국의 경우에도 그것이 귀족·지배 계급의 문자는 될 수 있을지언정 전체 백성을 위한 서민의 문자는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문자는 문화의 소산이며 문화의 매개체이다. 문화는 전체 백성의 것이지 결코 일부 지배계급의 특권적 소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 훈민정음 창제를 주도한 세종의 의도이며 이상이었다. 이와 같은 그의 이상 실현은 문자생활로 그에 적응할 수 있도록 개방하는 것이 당연한 길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세종의 뜻을 받들어 훈민정음 해례 서문을 쓴 정인지도 그 글에서 "문자가 언어와 불일치하기 때문에 학자와 서생(書生)은 그 뜻을 밝히기가 어렵고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옳고 그름을 가려내기가 어렵다"고 개탄하였다. 따라서 학문의 연구나 국가의 정사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셋째, 선진문화 섭취에 도움을 주자는 데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세종은 훈민정음의 제정과 동시에 《동국정운》의 편찬과 《홍무정운(洪武正韻)》의 역훈(譯訓)을 시작하였다. 전자는 한국 한자음을 바로잡아 통일하려는 것이었다. 후자는 중국음의 표준을 정하자는 데 있었다. 이 《동국정운》의 편찬은 자주적인 입장에서 중국문화를 적극적으로 섭취하기 위한 방편에서 나타난 것임을 뜻한다. 《홍무정운》을 역훈하게 한 것도 빈번한 중국과의 접촉에서 중국어 습득이 불가피한 만큼 중국어에 대한 표준적인 운서를 정함은 당연하였다. 그러나 이 두 책에 수록된 한자음을 정확하게 표기하기 위하여는 재래의 반절식(反切式)으로도 불충분하고 또 불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여기에서 훈민정음과 같은 표음문자(表音文字)의 제정이 절실히 요청되었던 것이다.
〈제정의 경과〉 세종의 훈민정음 제정이 언제부터 구상되었고 착수되어 어떤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는지에 대하여는 기록이 전혀 없어 알 수 없다. 다만
《세종실록(世宗實錄)》에 의하면 세종 25년 12월조에 “이달에 상께서 언문 28자를 친히 제정하였다(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라고 기록했을 뿐, 그 경과에 대하여는 전혀 언급이 없다. 다만, 처음에는 세종 단독으로 구상하였다 하더라도 여러 신하의 중지(衆智)를 모아 상당한 기간에 걸쳐 추진되었을 것으로 추측될 따름이다. 이리하여 훈민정음이 제정되자 문자 창제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하여 집현전과는 별도로 궁중에 언문청을 설치하고, 훈민정음의 보급과 이에 부수되는 문헌의 간행 등을 추진하는 한편, 해례와 같은 원리면의 연구도 여기에서 나온 듯하다. 이후 훈민정음과 관련된 기사는 44년 2월 《운회(韻會)》를 언해하고 같은 달에 최만리(崔萬理) 일파의 반대 상소에 부닥친다. 반대의 골자는 한자를 버리고 새 문자를 만듦이 사대모화(事大慕華)에 어긋날 뿐 아니라 선인이 만들어 놓은 운서를 뜯어 고치고 언문을 다는 것이 모두 무계(無稽)한 짓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45년 4월 《용비어천가》가 완성되고, 이듬해 3월 《석보상절(釋譜詳節)》의 언해를 명하였으며, 그 해 9월 책으로서의 《훈민정음》이 이루어져 반포되고, 47년 9월 《동국정운》의 완성 및 《용비어천가》의 반포, 48년(세종 30) 11월 《동국정운》 반포, 55년(단종 3) 봄에 《홍무정운》 역훈(譯訓) 완성 등, 사업은 매우 의욕적으로 추진되었다. 먼저 《운회》를 번역한 것은 곧 《동국정운》의 편찬을 뜻하므로 그 사업은 이 무렵부터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훈민정음 해례의 작성은 아마도 1444년 최만리 일파의 반대 상소가 있은 직후부터 착수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이 동안에 중국 운학(韻學)의 이론을 연구하고, 한편으로는 《용비어천가》와 《석보상절》 등의 찬정(撰定)을 통하여 그 실제적 효용성을 실험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훈민정음 해례 본문에 나타나는 모든 자류(字類)를 추려 보면 처음 1443년에 제정하였던 28자를 훨씬 상회하고 있다. 그것은 그 동안 운서 편찬과정에서, 또는 국어 표기를 통해서 거기에 필요한 자류가 더 요청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보완하기 위하여 더 많은 글자를 만들어 내는 방법을 강구하였던 까닭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하여 훈민정음은 더욱 갈고 다듬어졌으며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 흠이 없는 것이 되었다고 믿기에 이르러 언문청에서 곧 간행에 착수, 46년(세종 28) 9월에 완성·반포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원본의 발견〉 반포 당시의 해례가 붙은 《훈민정음》 원본은 오랫동안 묻혀 있다가 1940년 7월에 경북 안동(安東)에서 발견되어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책은 첫 장과 둘째 장이 떨어져 나간 것(세종 御製 서문과 例義의 일부)을 복원하였다. 그 전까지는 세종 어제 서문과 예의만이 전해 왔으며, 《세종실록》에 실려 있는 한문 <실록본>과 《월인석보》 권두에 수록된 <언해본(諺解本)> 초간본으로 추정되는 판본이 최근 발견되어 서강대학에 보존되어 있고, 박승빈(朴勝彬)이 간수한 단행판각본(單行板刻本)으로 된 언해본, 그리고 일본 궁내성 도서료에 있는 사본인 <궁내성본>, 가나자와 쇼사부로[金澤庄三郞]가 간수하고 있는 사본인 <가나자와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