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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삼경언해 [四書三經諺解]

이경희330 2008. 9. 13. 22:24

유교 경전인 사서, 즉 《논어》 《대학》 《중용》 《맹자》와 삼경인 《시경》 《서경》 《주역》의 원문에 한글로 음과 토를 달고 다시 우리 말로 번역한 책.
본문
대학언해 /
논어언해》 4권 4책, 《대학언해》 1책, 《중용언해》 1책, 《맹자언해》 14권 7책, 《시경언해》 20권 10책, 《서경언해》 5권 5책, 《주역언해》 9권 6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교 경전에 대한 번역사업은 이미 세종대집현전에서 시행되고 있었음이 확인되지만 그 성과가 간행되는 데는 미치지 못한 듯하다. 성종대 이후 진출한 사림파는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이 하면서, 그들이 이해한 성리학의 이념을 사회에 고루 전파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소학()》을 비롯한 윤리서와 사서() 등 유교 경전의 전파운동을 일으켰다.

유숭조() ·이황() ·이이()에 의해 경전에 토를 붙이는 노력이 이어지고, 유희춘()은 1574년(선조 7)에 사서와 오경을 언해하라는 선조의 명령을 받아 먼저 《대학》과 《논어》의 주석서를 만들어 바쳤다. 이러한 학문적 성과들이 바탕이 되어 경전에 대한 번역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삼경 언해본에 앞서 사서 언해본이 먼저 이루어졌다. 1585년에 왕명에 의해 교정청()이 설치되고 정구() ·최영경() ·한백겸() ·정개청() ·정철() 등 당대의 학자들이 대거 참여한 가운데 그 이듬해에 《소학》과 사서의 언해가 완료되었다. 1590년에 금속활자인 을해자체 경서자()로 간행된 초간본은 도산서원에 소장되어 있다. 이와는 별도로 이이도 언해작업에 전념하여 사서에 대한 ‘율곡언해()’를 완성하였는데, 교정청의 언해가 일반 독자의 이해를 위해 순수 국어를 많이 사용한 데 비해 율곡언해는 원뜻의 손상을 피하기 위해 원문의 한자를 많이 이용하였다는 차이가 있다.

여기에 비해 삼경은 언해가 늦어져 1585~1593년 교정청에서 행하여졌으며 간행도 임진왜란 후까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1606년에 간행된 《주역언해》 초간본이 규장각에 있어 그때 삼경언해가 함께 간행되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시경언해》는 표기상의 수정을 거쳐 1613년(광해군 5)에 간행된 훈련도감 목활자본이 확인될 뿐이며 《서경언해》는 그 시기의 것도 확인되지 않아 전체적인 간행상황을 단언할 수 없다. 이 책들은 그 후에 광해군대 ·인조대 ·순조대 ·철종대에 여러 차례 중간되었으며 지방에서도 여러 방식으로 많이 간행되었다.

현대에 들어와서도 영인본이 여럿 간행되었다. 초간본은 중세국어의 마지막 모습을 전해주고 그 후의 이본()들이 음운변화를 담고 있어 국어학에도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예를 들어 사서언해의 초간본에서는 ㅿ이 사용되면서도 대부분 ㆁ으로 변화하였으며, ㄷ과 ㅅ이 어말 자음에서 구분되었고 자음동화현상이 표기에 나타난다는 특징들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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