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 경전인 사서, 즉 《논어》 《대학》 《중용》 《맹자》와 삼경인 《시경》 《서경》 《주역》의 원문에 한글로 음과 토를 달고 다시 우리 말로 번역한 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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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숭조(柳崇祖) ·이황(李滉) ·이이(李珥)에 의해 경전에 토를 붙이는 노력이 이어지고, 유희춘(柳希春)은 1574년(선조 7)에 사서와 오경을 언해하라는 선조의 명령을 받아 먼저 《대학》과 《논어》의 주석서를 만들어 바쳤다. 이러한 학문적 성과들이 바탕이 되어 경전에 대한 번역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삼경 언해본에 앞서 사서 언해본이 먼저 이루어졌다. 1585년에 왕명에 의해 교정청(校正廳)이 설치되고 정구(鄭逑) ·최영경(崔永慶) ·한백겸(韓百謙) ·정개청(鄭介淸) ·정철(鄭澈) 등 당대의 학자들이 대거 참여한 가운데 그 이듬해에 《소학》과 사서의 언해가 완료되었다. 1590년에 금속활자인 을해자체 경서자(乙亥字體經書字)로 간행된 초간본은 도산서원에 소장되어 있다. 이와는 별도로 이이도 언해작업에 전념하여 사서에 대한 ‘율곡언해(栗谷諺解)’를 완성하였는데, 교정청의 언해가 일반 독자의 이해를 위해 순수 국어를 많이 사용한 데 비해 율곡언해는 원뜻의 손상을 피하기 위해 원문의 한자를 많이 이용하였다는 차이가 있다. 여기에 비해 삼경은 언해가 늦어져 1585~1593년 교정청에서 행하여졌으며 간행도 임진왜란 후까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1606년에 간행된 《주역언해》 초간본이 규장각에 있어 그때 삼경언해가 함께 간행되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시경언해》는 표기상의 수정을 거쳐 1613년(광해군 5)에 간행된 훈련도감 목활자본이 확인될 뿐이며 《서경언해》는 그 시기의 것도 확인되지 않아 전체적인 간행상황을 단언할 수 없다. 이 책들은 그 후에 광해군대 ·인조대 ·순조대 ·철종대에 여러 차례 중간되었으며 지방에서도 여러 방식으로 많이 간행되었다. 현대에 들어와서도 영인본이 여럿 간행되었다. 초간본은 중세국어의 마지막 모습을 전해주고 그 후의 이본(異本)들이 음운변화를 담고 있어 국어학에도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예를 들어 사서언해의 초간본에서는 ㅿ이 사용되면서도 대부분 ㆁ으로 변화하였으며, ㄷ과 ㅅ이 어말 자음에서 구분되었고 자음동화현상이 표기에 나타난다는 특징들이 담겨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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