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가 다른 건 몰라도 먹고 사는 기초만큼은 확실하게 해주었다는 것 하나가 박정희에 대한 우상화와 심지어는 그의 무지몽매한 딸의 인기의 동력이다. 사실상 진보진영에서도 박정희의 공과는 분명하게 구분하자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 걸 보면 지금의 박정희에 대한 논쟁은 앞으로 쓰일 역사에도 중요한 작용을 할 것임은 분명하다.
박정희와 IMF, 그 뗄레야 뗄 수 없는
1962년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면서 박정희 정부는 한정된 자원과 재화를 사용하여 경제를 일으키려 한다. 결국 국가의 모든 재원을 원조물자경제 체에서 수출 주도형으로 바꾸려는 노력 즉, 수출을 장려하는 특정한 분야에 집중하게 하고 이는 결국 일부 집단에 특혜를 주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뭐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박정희 정부가 수출주도를 주로 가격 경쟁력에 맞추려 하였고 그러다 보니 저렴한 노동력의 확보를 위해서 강력한 대 노동정책을 실시한다.
이제 대한민국의 일부 국민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이 동의하듯이 박정희 정권은 상당히 부패한 정권이었다. 그들은 쿠테타를 통해서 정권을 장악했고 그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소위 말하는 봉투정치가 횡횡하던 때였다. 결국 이러한 정권의 유지를 위해 막대한 정권 유지비용이 필요했고, 결국 박정희는 자신의 정권 출범 직후부터 정부는 경제계와의 합병을 모색한다.
결국 박정희는 수출주도형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서 한정된 자원과 자본을 불균형(Unbalanced)하게 투자할 명분을 획득했고 이를 자신의 구미에 맞는 몇몇의 재벌들에게 특혜를 주었으며 재벌들은 정부의 특혜와 보호 아래서 싼 노동력과 제한된 국부를 무한정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재벌에 대한 무한정적인 특혜와 투자는 유용한 정치자금을 쉽고 은밀하게 조달할 수 있도록 하게 하였다.
결국 박정희의 신화는 노동에 대한 대가를 정당히 지불하지 않고 그 혜택을 소수재벌과 정권안보에만 이용했다는 점과 국부를 다시금 무한정 재벌에게 투자했고 재벌들은 이를 사업부분에 활용하기 보다는 정권이 비호 하에 부동산의 투자에 집중하여 불법적으로 이익을 확대 재생산 했고 결국 이는 지나친 부동산의 과대평가와 과잉투자라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아마도IMF의 가장 큰 원인 제공자는 박정희 였던 것이다.
IMF 직전인 1995년의 통계를 살펴보면 상위 30대 재벌들이 총 GDP의 16%를, 총 수출의 50%를 차지하고 있었고, 특히 상위 4대 그룹(삼성, 현대, LG, 대우)은 GDP의 9%를 차지하고 있었다. 여하튼 재벌들의 한국경제의 지배력이 극에 달하는 순간이었다.
Northwestern 대학교의 Cumming 교수는 1997년 그의 논문에서 “The Korean economic system has always been intrinsically unstable”라고 말하며 한국의 경제는 항상 불안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Cumming교수는, 박정희 시대였던 1969년의 환란 상황이나 1997년의 IMF상황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했다. 1969년의 상황이 미국의 직접적인 원조로 그 상황을 탈출한 반면 1997년에는 미국이나 일본이 과거와는 다르게 직접 원조를 주저하고 IMF를 통한 다자간 원조를 해주는 정책으로 전환하여진 것만 달라졌다고 주장했다.
결국 1969년 박정희 때 있었던 한국의 1차 부도 사태나 1997년의 IMF는 한국의 경제 시스템이 항상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박정희정권 이래 IMF까지 재벌들의 이익구조는 중소기업의 그것보다 훨씬 저조했고 재벌들은 정기적으로 현금이 모자라는 악순환 구조에 빠져 있었다. 모자라는 현금을 정부 보증 융자에 대한 독점을 통해서 해결하는 구조였다. 결국 이러한 상황은 IMF직전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아래의 표와 같은 상황으로 전개된다.
▽ 한국의 재벌 부채 비율 (%)
South Korea Japan Taiwan US
1996 387 193 86 (1995) 154
1997 519 – – –
1969년과 1997년의 중간지점이자 전두환 정권 초기인 1983년경에는 계속되는 경기침체와 수출저조로 인해서 은행권의 Non-Performing Loan(돌려받지 못하는 융자)의 비율이 전체의 14%에 이르렀고 그 수준은 1997년 IMF수준과 동일하다. 재벌들의 채무상황 역시 그 액수에 있어서만 늘었을 뿐 1969년의 상황과 1997년의 상황이 거의 일치한다.
한 10년에 한 번씩 환란이 닥치고 경제 시스템에 항상 붕괴의 위험성을 안고 있는 한국경제의 모순은, 바로 박정희식 경제모델의 실패를 의미한다.
그나마 박정희의 지도력이 우리나라를 이만큼은 살게 했다?
1997년 우리나라와 같이 말레이지아도 엄청난 재정환란을 맞게 된다. 그렇지만 말레이지아의 환란은 IMF까지 가지 않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IMF의 원조를 받지 않으면 안될 만큼 훨씬 충격적인 상황에 이르게 된다. 그렇다면 어떠한 차이점이 말레이지아와 한국의 상황을 다르게 만들 수 있었을까?
1997년 현재 말레이시아는 세계 17위의 수출대국으로 성장해 있었고, 우리나라와 같은 수출주도형 모델로 변신을 꾀해 1980년대 이후 연평균 8%이상의 성적을 20여 년 간 유지하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우리나라의 고성장 모델과 말레이시아의 그것과는 대동소이하다.
우리나라에 비해서 말레이지아는 영국의 식민지로 독립할 당시부터 어느 정도의 정당정치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박정희보다 20년 늦게 정권을 잡은 마하티르 총리 역시 일종의 독재자로서 이후 20년간 그 영향력을 행사했다.
많은 우리나라의 찌라시들이 말레이지아가 박정희의 모델을 철저하게 따랐고 마하티르 총리를 마치 박정희의 신봉자인양 이야기 하곤 한다. 그 예로 박정희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마하티르의 New Economic Policy를 이야기 한다.
하지만 박정희의 방식과 마하티르의 방식은 근본적으로 커다란 차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박정희가 차관과 차입을 통한 수출주도형 경제를 일으킨 반면, 말레이시아는 해외의 다국적 기업의 직접 투자를 유치해서 그 외국인 직접 투자를 통한 수출주도형 경제를 일으킨다. 아래의 표에서 보듯 우리의 차입 액수는 말레이시아의 그것보다 적게는 2.5배에서 많게는 3배까지 증가했다.
▽ 해외 채무 액수 (US$ million)
1991 1992 1993 1994 1995 1996 1997 1998
Malaysia 17,079.7 20,017.9 26,148.5 30,335.9 34,342.6 39,673.3 47,228.2 44,773.1
South
Korea 39,732.9 44,156.0 47,201.8 72,414.3 85,810.4 115,803.1 136,984.3 139,097.4
여기에 더해서 총 채무에서 급하게 변통한 단기 채무의 비율이 아래의 표에서 보듯 말레이시아의 그것보다 훨씬 높았으며 이를 외환 보유고와 비교할 때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수준에 까지 이르러 있었던 것이다.
▽ 1997년 단기해외 채무 비율 (%)
Short-term debt/total debt Short-term debt/reserves
South Korea 67 300
Malaysia 39 55
또한 외국인 직접 투자액수에 있어서 한국은 말레이시아의 그것보다 훨씬 낮은 수준을 유지한다. 그렇지만 IMF 이후 김대중 정부의 노력으로 단번에 말레이시아 수준으로 외국인 직접투자를 유치하는데 성공한다.
특히 1993년은 외국인 직접투자가 5억 8천 8만에 불과해서, 이미 50억 달러를 돌파한 말레이시아의 10분의1에 겨우 달하는 수준이다.
▽ 해외자본 직접 투자 (US$ million)
1990 1991 1992 1993 1994 1995 1996 1997 1998
Malaysia 2,330 3,998 5,183 5,006 4,342 4,132 5,078 5,106 5,000
South Korea 788 1,180 727 588 809 1,776 2,325 2,844 5,143
결국 박정희 정권 이래 전두환을 거쳐 노태우까지 거치면서 한국의 경제의 구조는 재벌주도형, 수출주도형, 차입 주도형의 빚 잔뜩 내서 있는 놈한테 넘기는 그런 기형적인 경제구조가 더욱 공고해지고 말았다. 박정희와 전두환 군사정권은 정통성과 도덕성에 있어서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는 정권이다. 외국인 직접 투자를 유치한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경제에 대한 지배력을 잃게 되고 경제는 점차 투명해지게 된다.
이는 고비용 정치구조를 가지고 있고 정권안보에 엄청난 비용을 사용해야 했던 군부독재자들에게는 해외자본 직접 투자는 선택할 수 없는 옵션이었다. 결국 구테타로 집권한 정권과 비민주화되고 투명하지 않은 정치 시스템은 우리를 10년에 한 번씩 환란에 몰아넣는 주범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박정희 정권의 공과를 따질 때 항상 공으로 등장하는 것은, 같은 독재를 해도 그만큼 국가의 경제에 기여한 사람이 없었고, 그는 그만큼 경제에 있어서만큼은 확실한 지도자였다는 것이다.
역사에 있어서 가정이라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지만 나는 수출주도형 경제 시스템이라는 것은 이미 장면정권에서 수립된 계획된 안이었고, 박정희라는 정치군인이 등장하여 나라를 유린하지 않았더라면 국가의 경제가 차입 주도의 특권재벌 중심의 절름발이 구조가 아닌 외국인 투자 주도의 대기업 중심구조로 되어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부질없는 상상을 자꾸 해본다.
암튼 박정희와 전두환 노태우에 뿌리를 두고 있는 딴나라가 자꾸 경제 어쩌구 하면 기분 참 드러워 지는 것이.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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