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고찰

“박정희 경제개발계획은 위로부터의 계급투쟁”

이경희330 2008. 6. 21. 14:07

 

김수행·박승호 교수, ‘한강의 기적’ 평가 비판
대외적으론 미국이 공산화 막으려 종용·강요
대내적으론 군부가 정당성 확보 차원에서 박차

 
 
진보에게조차 박정희 체제의 경제 성장은 대단한 ‘선’이다. 백낙청 서울대 명예 교수의 이런 지적은 상당수 진보 지식인들의 일반적 인식이다. “최고경영자 박정희의 공을 인정해주자.” ‘경제발전의 유공자’ 박정희를 정치적 독재자로부터 분리시켜 공을 기리자는 것이다.
 
이에 김수행 서울대 교수와 박승호 경상대 사회과학연구원 학술연구교수가 이의를 제기했다. 이들은 최근 함께 펴낸 〈박정희 체제의 성립과 전개 및 몰락-국제적·국내적 계급관계의 관점〉(서울대 출판부)에서 박정희 체제는 ‘국제적·국내적 계급관계의 관점’에 의해서만 올바르게 분석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 등은 우선 박 정권이 추진한 경제개발계획 분석을 통해 박 체제가 세계적 냉전 체제 아래서 자본주의적 사회를 급속히 확립하려는 국내외적 계급관계의 특수한 산물임을 입증하고자 했다. 이들의 결론은 국제적으로 안정적인 자본주의적 관계의 확장이 요구된 결과가 박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이며, 쿠데타 세력이라는 정당성의 한계가 경제성장의 속도를 더 내도록 했다는 것이다.
 
미국은 1957년부터 대외정책을 군사 우선에서 경제 중시로 전환했다. 옛소련이나 중국, 북한 등 사회주의 나라들이 급속한 산업화를 이룩함으로써 대안모델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실제 “미국은 이승만 정권 말기부터 남한에 공산주의 혁명을 막고 안정을 이룩하기 위해 경제발전계획을 세우도록 종용했다.”
   
 
 
60년대 경제개발계획에는 이런 국제적 계급 역관계와 군부의 정당성 확보 과제가 배경으로 깔렸다. 60년대 경제개발계획은 또한 ‘위로부터의 계급투쟁’ 성격을 지녔다고 김 교수 등은 분석했다. 실제 박 정권은 집권 이후 국내적으로 공무원의 노동3권을 전면 부인하는 헌법 개정과 중앙정보부를 통해 대한노총의 기업별 노조체제를 산업별로 개편하는 등 “50년대에 비해 더 노동억압적인 정책을 폈다.” 김 교수는 이를 “자본이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는 계급역관계가 재구축되는 과정”으로 이해했다.
 
유신 체제도 아시아 지역에서 개입 수준을 단계적으로 낮추어 가고자 했던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의 변화와, 당시 국내적으로 고개를 들기 시작했던 생존권 투쟁에 대한 대응으로 해석했다. 당시 미국은 천문학적인 베트남 전쟁 비용과 이에 따른 국제수지 악화 및 국제유동성의 현저한 팽창으로 말미암아 달러화 위기를 겪었다. 이런 헤게모니 위기에 대응하고자 미국은 71년 8월15일 달러의 금태환 정지를 선언하고 닉슨독트린을 통해 베트남에서의 미군 철수와 중국과의 화해 정책을 발표했다. 이런 변화가 당시 아래로부터의 투쟁에 몰린 박 정권한테 더 반동적인 대응방식을 취하도록 강제했다는 것이다. 실제 유신 직전 국내 노동자 계급은 산발적이지만 자생적인 생존권 투쟁에 나서기 시작했다. 노동쟁의는 1969년 70건에서 71년 101건으로, 노사분규는 같은 시기 130건에서 1656건으로 늘었다. 이런 투쟁 확산의 배경에는 물론 “세계 최저의 임금수준,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 세계 최악의 산업재해, 세계 최하위의 사회보장 등 노예 같은 상황”이 자리하고 있었다.
 
지은이들은 “모든 국민이 ‘공통의지’로 산업화를 지지하고 노동대중이 자발적으로 산업화에 헌신했다”는 ‘개발독재론’의 주장에도 이의를 제기했다. 개발독재론은 남한의 산업화 성공 이유로 산업화와 경제성장에 대한 합의가 있었음을 강조하고 있으나, 이는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압력 또는 제도에 의한 강요였다는 것이다. 김 교수 등은 강요된 협동에 의해 실시된 농촌과 공장의 새마을 운동을 근거로 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