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는 소수림왕(小獸林王:재위 371∼384) 때 불교 공인과 태학(太學) 설립(372), 율령(律令) 반포(373) 등으로 국가체제 정비와 정치적 안정기반이 구축되었다. 이와 같은 단계에서 즉위한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은 정복 군주로서 백제의 한성(漢城)을 침공하여 임진강과 한강선까지 진출하였고, 신라 내물왕(奈勿王)을 원조하여 왜구를 격퇴하였다. 북으로는 후연(後燕)을 쳐서 요동(遼東)을 차지하고 숙신(肅愼)을 복속시켜 만주와 한반도에서 우월한 위치를 확보하였다. 장수왕(長壽王)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제도의 정비와 대외정책의 확대 등으로 최대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는 중국의 남 ·북조(南北朝:北魏 ·宋)와 통교하였고, 유연(柔然) 등 새외(塞外) 민족과도 통교하면서 외교관계를 확대하여 중국을 견제하였다. 427년 남하정책의 일환으로 수도를 고조선의 문화 유산지인 평양으로 천도하여 집권적 정치기구를 정비하고 국력을 신장시켰다. 남하정책에 위협을 느낀 신라와 백제는 나제동맹(羅濟同盟)을 체결하였다. 472년(개로왕 18) 백제는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의 남침을 막기 위해 군사를 청하기도 하였다. 장수왕의 남하정책의 목표는 한강 유역이며, 그 요충지는 충주(忠州) 지방이었다. 475년 결국 그는 백제의 한성을 침공하여 함락하고 개로왕(蓋鹵王)을 패사(敗死)시켜 고국원왕(故國原王)의 한을 풀고 아산만(牙山灣)까지 진출, 한강 유역을 지배하였다. 이때 백제는 수도를 웅진(熊津:공주)으로 옮기고, 고구려의 공격을 받은 신라는 죽령(竹嶺) 이북의 땅을 잃었다. 장수왕의 뒤를 이은 문자왕(文咨王)은 494년 부여(夫餘)를 복속시켜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고 중국과 자웅(雌雄)을 겨루었다.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와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가 당시의 광대한 판도를 밝혀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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