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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수당의 투쟁

이경희330 2008. 9. 12. 14:15

백암성 /

6∼7세기 초의 정세를 보면, 553년 나제동맹이 깨지고 신라 진흥왕()이 북진정책을 취하였으며, 위() ·진() ·남북조로 분열된 중국을 589년 수나라가 통일함으로써 고구려는 요동()에 위협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때 동아시아의 정세는 돌궐() ·고구려 ·백제 ·일본을 연결하는 남북 진영과 수(:후에는 )나라와 신라가 연결하는 동서 세력으로 갈라져 대립상태에 놓였다.

고구려 영양왕(嬰)은 진흥왕의 북진 정책으로 한강 유역 및 함경도 일대를 상실하자 남하정책을 포기하고 서진정책(西)을 단행, 요서(西) 지방을 공격함으로써 수나라와 충돌하였다.

598년(영양왕 9) 수나라 문제()는 수륙군() 30만으로 침입하였으나 고구려의 반격과 질병 ·풍랑으로 퇴각하였다. 그 뒤 수나라 양제()는 돌궐족을 복속시킨 뒤, 612년 113만 대군으로 요하()를 건너 요동성(:)을 공격하였으나, 고구려군의 강력한 항전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자 양제()는 다시 약 30만 병력으로 압록강을 건너 침입해왔으나, 을지문덕()이 살수()에서 섬멸함으로써 살아 돌아간 자는 불과 2,700명이었다.

이로써 수나라는 618년 내란이 일어나서 망하고 당()나라가 건국되었다. 이때 고구려는 당나라와 대립하고 돌궐 등과는 내왕하였기 때문에 당나라 태종()이 즉위하면서 고구려에 침입하려는 야심을 보이자, 고구려도 다롄[]과 부여성(눙안)을 연결하는 천리장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연개소문()이 정권을 잡은 뒤부터는 당나라에 대한 태도가 더욱 강경하였고, 당나라와 연결한 신라를 백제와 더불어 자주 공격하였다. 한편, 당나라는 돌궐을 복속시키고 서역(西)을 평정하였으며, 고구려의 세력권 내에 있던 거란족을 꾀어 고구려를 배반하게 하는 등 침공태세를 갖추었다.

645년(보장왕 4) 당나라 태종은 이적(:) ·장량()을 앞세우고 30만 군으로 요하를 건너, 50만 석의 군량이 있는 요동성을 점령하여 전진기지로 삼고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약 60일 사투()하여 당나라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 뒤에도 당나라는 2차 ·3차(647년 ·648년)에 걸쳐 이적 ·우진달() ·설만철() 등을 보내어 침입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제목 : 고구려와 수의 전쟁
사진크기 : 690*600 (원본사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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