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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숨쉬고있는 가야국의 역사

이경희330 2008. 9. 11. 14:15

설화․유물로 살아 숨쉬는 나라


龜何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燔灼而喫也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만약 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


  지금으로부터 1954년전인 서기42년(단기2375) 3월 상사일(上巳日), 김해지방의 선주민들이 새나라 건설을 위해 구지봉(龜旨峰)에 올라 왕의 강림을 기원하며 불렀던 구지가 (龜旨歌)이다.


   구지가는 거북을 神의 사자, 신과 인간을 맺는 매개자로 하여 고을 우두머리인 구간(龜干)들과 주민들이 지도자를 추대하기 위해 술마시고 춤추며 대왕맞이굿을 할때 부르던 노래(迎神歌)이다.


   김수로왕(金首露王)이 신답평(新畓坪:지금의 金海)에서 구간(九干)으로 즉위한 것은 고구려 3대 대무신왕(大武神王) 25년, 백제 2대 다루왕(多婁王)15년, 신라 3대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19년.


   여태까지 우리는 가야를 三國時代라는 개념의 틀에 맞추어 단순히 신라와 백제의 부수적인 존재로서 결국 신라에 의해 병합되어 버린 소집단으로만 인식해 왔다.

   그러나 가야는 1세기 신라 백제와 거의 비슥한 시기에 건국돼 6세기 중엽까지 나름대로 독자적인 문화적 저력과 주체적인 역사발전을 이루어 신라 백제 고구려와 동등한 위치에서 국가를 영위해 왔음을 최근 다량으로 발굴되고 있는 유물에서 확인되고 있다.


   2천여년전 대왕맞이굿으로 시작된 가야는 5천년 한국의 역사 가운데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신비의 왕국이다. 가야의 문화가 아직도 우리의 생활속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가야와 연관을 가진 유물이 수없이 많은데도 손에 잡히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야는 설화나 전설의 나라로 불릴만큼 아리송한 기록의 편린만 남긴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왕국으로 비쳐져 왔다.

  가락국의 수도 김해는 낙동강 하류 삼각주 지역에 위치해 토질이 비옥하고 농산물이 풍부하여 이집트의 나일강 하류왕 비슷한 곳이다.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이루러 경남 해안지대에 철기문화가 보급되면서 지역에서는 사회통합이 진전되어 변한(弁韓)소국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때 수로왕이 김해지방의 9간(干)을 통합하여 가야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일연신가(一然神師)의 三國遺事 駕洛國記는 가락의 건국을 신화와 함께 시작했다.


   천지가 개혁한 이해 국가나 君臣의 이름이 없었다. 그때 아도간(我刀干) 여도간(汝刀干) 피도간(彼刀干) 오도간(五刀干) 유수간(留水干) 신천간(神天干) 오천간(五天干) 신귀간(神鬼干) 유천간(留天干)등 9간들이 백성들을 다스리고 있었으며 모두 1만호(戶)7만5천명이었다.


   이들은 대체로 편두(扁頭)로서 산야에 살면서 우물을 식수로 하고 밭을 갈아 식량을 마련했다.  후한(後漢) 세조(世祖)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 임인(壬寅)3월 계욕일(契浴日;3월의 첫사일(巳日), 巳日;육십갑자로 일진이 뱀의 형세를 갖는 날)에 북쪽 구지봉에 형체는 보이지 않으나 이상한 소리와 기운이 있어 사람들이 서로 불러 백성 2~3백명이 보였다.


    사람의 소리가 들리는 같았다. 이윽고 자취를 감추고 소리를 높여 「이곳에 사람이 없느냐」하였드. 9干들이 대답하기를 「우리들이 있습니다」「지금 너희가 있는 곳이 어디냐」「구지라는 고장입니다」


허공의 소리가 울려 나왔다. 「바로 이곳이로다. 하늘이 명하시길 우리에게 이곳에서 나라를 새로 일으켜 임금이 되라 하셨다. 너희들은 산꼭대기에서 한줌의 흙을 파라 9干을 비롯하여 구지봉에 모인 사람들은 흙을 파고 천신(天神)으로서  신왕(神王)을 맞이하는 노래(迎神歌)를 부르며 춤을 추고 노래하자 얼마후 하늘에서 한줄기 빛이 드리위지며 붉은 보자기에 쌓인 합(盒)이 내려왔다.


  붉은 보자기를 펴보니 금합(金盒)이 나오고 금합의 뚜껑을 열자 여섯개의 황금알이 빛을 발하며 나왔다. 9干 가운데 아도간이 조심스럽게 금합을 가지고 돌아왔다. 다음날 아침 구지봉에서 이상한 현상을 지켜봤던 사람들은 아다간의 집으로 모여들었다.


  그러자 금합은 없어지고 여섯개의 황금알은 늠름한 동자(童子)의 모습으로 변하였다. 이들은 나날이 자라 10여일을 지나자 동자들의 신장은 은(殷)나라 천을(天乙)같이 9척이었으며 용모가 매우 수려하여 많은 사람들이 절하고 예의를 갖추어 모셨다.


  그들 얼굴은 한고조(漢高祖)처럼 용(龍)같았고, 눈썹은 8자(八字)로 당고조(唐高祖)같았고, 눈동자는 우(虞)나라 순(舜)과 같았다.


  그달 보름 왕위(王位)에 오르니 세상에 처음 나타났다고 해서 이를 수로(首露)라 했다. 수로는 금합속에서 태어났으므로 성(姓)을 김씨(金氏)라 했으며 나라를 대가락(大駕洛)또는 가야국(伽倻國)이라고 하니 6가야(六伽倻)중의 하나다.


  나머지 다섯사람도 각각 가서 5가야(五伽倻)의 임금이 되었다.

  이상이 三國遺事에 실린 가락국의 건국신화이다.


  이는 서기전후 시기의 김해지역에서 9干으로 대표되는 지배세력들이 보다 문화능력이 높은 首露집단에 의해 통합되어 가야국이 출현하는 것과 뒤의 어느 시기에 김해 가야국을 중심으로 연맹체가 형성되는 것을 복합적으로 반영한 설화이다.

  5伽倻는 아라가야(阿羅伽倻;지금의 함안, 시조는 阿露王), 대가야(大伽倻;지금의 고령, 시조는 大露王), 고령가야(古寧伽倻;지금의 함창지방, 시조는 古露王), 성산가야(星山伽倻; 지금의 주, 시조는 碧露王), 소가야(小伽倻;지금의 고성, 시조는 未露王)등인데 이가운데서 상대적으로 대가야와 아라가야가 세력이 컸다.


  가락국의 명칭은 史書에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데 가야 가라 구야국 남가라 금관국등으로 쓰이고 있으나 금관국이란 칭호는 신라에 병합된 이후에 쓰여진 것이고, 구야국이란 명칭은 중국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에 나오는 국명이다.


  三國遺事는 주로 가야(伽倻)로, 三國史記에는 가라(伽羅) 혹은 가야(加倻)로, 남가라는 일본서기와 삼국사기 김유신전에 나오는 국명이며 학계에서는 대개 삼국사기에서 나오는 국명을 따라 가야(伽倻)라고 쓰고 있다.


  김해지방의 아름다운 명승지로 일컬어온 금릉팔경(金陵八景)가운데 일곱번째인 구지석람(龜旨夕嵐;구지봉의 저녁에 피어 오르는 아지랑이)을 밟으며 구지봉을 찾은 탐방객앞에 펼처진 가야역사는 온통 안개속에 묻혀 있었다. 아리송한 역사도 역사려니와 설화의 현장이 도식에 묻혀 점차 퇴락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락국의 王都였던 이곳 김해는 개국에서 멸망에 이르기까지 5백여년간 가락의 유적 유물들이 숱하게 널려 있는데 그중 제일 손꼽히는 유적이 구산동의 구지봉이다.

                                       

  가야의 始祖 金首露王의 천강난생신화(天降卵生神話)가  시작된 구지봉(龜旨峰).

  마산과 부산을 잇는 국도 14호선 김해시 관문에 위치한(구산동 산81-2)구지봉은 서기 199년까지 158세를 살면서 나라의 기틀을 세운 金首露王의 탄강성지로 보호중이다.


  가야의 건국설화를 간직한 구지봉은 김해시 뒷산인 분산(또는 盆城山)이 뻗어내린 산봉우리이다. 해발50m정도의 나지막한 이봉우리에는 「대가락국태조왕탄강지지(大駕洛國太祖王誕강之地)」라 새긴 비가 서있으며 80년대 이전에 조성한 탄생지가 있다.


  탄생지는 9干을 상징한 아홉마리의 거북과 화강암으로 궤위에 올린 여석새의 알을 용들이 얽힌채 둘러싸고 있는 모양을 조각해서 조성했다. 구지봉은 동편으로     일제시대때 김해 외곽도로를 낸다며 구지봉과 허왕호의 능사이를 잘라 마치 거북 목이 잘린 꼴이 되어 聖地로서의 기운을 잃게 되었으나 정부가 지난 90년 도로를 터널식으로 덮어 흙을 채우고 나무를 심어 맥이 끊긴지 실로 70여년만에 어느 정도 성지로서의 기능을 회복했다.


  가야국 5백년 왕도였던 김해. 무분별한 도시개발과 파헤쳐진 곳곳마다 유물은 능선을 따라 분산과 이어진다.


  거북이 엎드려 있는 것과 같은 구지봉의 형상이 구지가(龜旨歌)를 낳은 것으로 보인다. 구지봉의 모습이 거북이 엎드려 있는 모양과 흡사하다는 점과 구지봉의 위치가 바다로 직접 통하는 낙동강 하구에 있다는 점이 농사의 풍성함과 어로활동의 안전을 절실하게 기대하는 가락국 선주민들로 하여금 수신의 사자로서 거북을 택하여 구지봉에서 이러한 대왕맞이 제의식을 행하게 동기가 됐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구지봉에는 거북모양을 하고 있는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이 있고 고인돌 등에 구지봉석(龜旨峰石)이라 새긴 글자가 있는데 이는 韓石峰의 친필이라 전해져 오고 있다.


유적들이 널려있고 가야의 애틋한 설화와 숨결이 서려있지 않은 곳이 없다.

  그러나 新羅에 빼앗겨 버린 역사의 모습을 갖출 날은 언제쯤이나 될지 기약없는 오늘의 잊혀진 伽倻王國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