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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사전에는 고구려 [高句麗]를 이렇게 기술 하였습니다.

이경희330 2008. 9. 12. 14:08

졸본() 지방에서 일어나 한반도 북부와 중국 둥베이[] 지방을 무대로 하여 발전한 고대국가로 668년에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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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전성시대의 영토 /

BC 37년에 주몽()이 이끈 부여족의 한 갈래가 압록강 지류인 동가강(佟:) 유역에 건국하였다고 한다. 고구려는 일찍이 기마민족의 문화를 받아들여 졸본 지방에서 일어나 동방 침입의 요로인 퉁거우[]로 옮긴 뒤 낙랑군임둔군()의 교통로를 단절시키는 등 한족()과의 투쟁과정에서 강대해졌다.

한사군()이 설치된 이후 현도군()의 지배권 안에 있었으나 태조왕(:재위 53∼146) 때부터 강력한 대외발전을 꾀하였다. 태조왕은 현도군을 쳐서 푸순[] 방면으로 축출하였고, 요동군()과 낙랑군()을 공격하여 청천강 상류까지 진출하였으며, 임둔군의 옛 땅에 자립한 옥저()와 동예()를 복속시켜 동해안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는 왕위의 형제상속제를 확립하여 고대국가체제를 갖춤으로써 고구려의 실질적인 시조가 되었다.

고국천왕(:재위 179∼197)은 왕위의 부자상속제()를 마련하였고, 5부의 행정구역을 설정하는 등 체제 정비를 단행하여 왕권이 보다 강화되었다. 동천왕(:재위 227∼248) 때는 중국의 위 ·오() ·촉() 3국의 대립시기였는데, 이때 동천왕은 요동군의 실권자 공손 연()과 통교하고 위나라를 견제하는 등 국제적 안목을 넓혔으나, 242년 서안평(西)을 공격하다가 관구 검(毌)의 반격을 받아 환도성()까지 함락되었다.

봉상왕() 때는 선비족인 전연()의 모용외(廆)의 침입을 두 차례 받는 등 위기를 겪다가 313년 미천왕(:재위 300∼331) 때는 서안평을 확보하고 낙랑군과 대방군을 정복, 한반도에서 한사군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 고조선의 옛 땅을 회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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