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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왕의 왕비 허황옥은 정말로 2천년 전에 2만5천리나 떨어진 한반도까지시집을 와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의 외할머니가 되었단 말인가?

이경희330 2008. 9. 11. 14:36

가야국(伽倻國) 왕비의 고향, 야요디아(Ayodhya)   
 
   
 

13-1) 김해김씨(金海金氏) 외가의 고향
 오늘 나의 발길은 인도대륙에서 가장 의미 있는 장소의 한 곳으로 향했다. 그곳은 가야국의 시조 수로왕(首路王)의 왕비였던 허황옥(許黃玉)의 고향으로 비정되고 있는 곳이다. 바로 6백만에 달하는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의 외갓집인 셈이다. 그러니까 그 방계에 속하는 혈통의 나에게도 ‘시조 외할머니의 고향’인 셈이었다.
 그곳은 이번 여행의 주무대인 불교의 ‘8대 성지’가 모두 모여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붓다가 가장 오래 머물렀던 기원정사(祇園精舍)가 있었던 스라바스티(Sravasti)로의 길목-이어서 별 고생 안하고 자연스럽게 들릴 수 있었다.


 비록 혜초는 언급이 없었지만 현장의 기록에 의하면 8세기 당시에는 대승불교의 중심지였기에 혜초의 발길이 닿았을 가능성도 있는 곳이고 또한 힌두이즘에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는 서사시「라마야나(Rama yana)」의 무대이기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개인적으로도 ‘쌍어문(?魚紋) 화두’를 풀기 위해서도 반드시 가야만 했던 곳이었기에, 목적지가 가까워오자 벅찬 기대감으로 묘한 흥분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우선 현장이 소개하는 아요디아국은 어떤 나라였나부터 알아보자.


『 주위가 5천여 리이고, 나라의 대도성은 주위 20여 리이다. 농업이 성대하고 꽃이나 과일이 풍성하다. 기후는 온화하고 풍속은 선량하다. 복업을 행하는 것을 즐기며 학예에 힘쓰고 있다. 가람은 1백여 군데, 승도는 3천여 명인데 대승과 소승을 함께 학습한다. 천사는 10여 곳, 이도 사람들이 적다. 』


 북부 인도의 중심도시 중 하나였던 아요디야는 현장이 기록한 대로 중세 이전에는 불교가 성행하였던 불국토였다. 그러나 현제는 마니파르밧(Mani Parbat)이란 언덕에 아쇼카왕에 의하여 조성된 것으로 밝혀진 스투파(Stupa)와 불교사원으로 밝혀진 수그립파르밧(Sugriv Parbat)등의 유적지만 남기고 인도의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불교는 세월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현재 아요디아는 대서사시 「라마야나( Rama yana)」의 무대로 유명한 힌두문학의 상징적인 도시이다. 양대 서사시의 하나인 라마야나에 의하면 아요디야는 법의 신 마누(Manu)에 의해 시작된 곳으로 태양왕조 수르야(Surya)에 의해 관장되던 곳이었다. 힌두 전설에 의하면 라마야나의 주인공인 라마는 세상을 유지하는 기능을 담당하는 비슈누(Vishnu)의 7번째 화신이다.


 

*아요디아의 쌍어문


이 힌두 성지에 한때 인도를 휩쓸었던 회교가 그 결정적인 타격을 가한 것은 16세기로 무굴제국이 라마가 탄생한 자리라고 믿어지던 곳의 힌두사원을 허물고 이스람사원을 세우면서부터였다. 이스람이 인도에 들어온 이후 인도 전역을 장악한 무굴제국에 이르러 수많은 힌두사원들이 헐리거나 이스람사원으로 탈바꿈하였는데, 이곳 아요디야도 그 재앙을 면치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요디야 뿐만 아니라 크리슈나의 탄생지로 믿어지는 마투라(Mathura)와 쉬바교도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 바라나시(Varanasi)의 힌두사원도 마찬가지였다. 힌두 성지들 중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지닌, 성스런 곳에 세워진 이 이스람 사원들은 특히 모두 힌두인들의 가슴에 못을 박는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언제나 기회만 생기면 그 장소에 다시 힌두사원을 짓고자 하는 힌두교인들의 열망은 항상 가슴 속에서 도사리고 있었다.


 그러다 1992년 12월 각지에서 힌두교인들이 벌 떼처럼 아요디야에 몰려들어 옛 라마사원 위에 세워진 이스람사원을 단숨에 허물어버린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것은 당시 일부 정치인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사용한 일종의 정치적 각본에 의한 예정된 사태였지만 그 결과는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인도는 물론 인근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에서까지 힌두와 이스람의 충돌로 이어져 대규모 유혈사태까지 벌어져 한 때 세계적인 긴장을 야기하였다. 이 사태 이후 오늘날까지도 라마사원을 지으려는 힌두교도와 헐린 이스람사원을 다시 세워야한다는 양측 주장이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있어서 인도의 고질적인 종교 갈등의 또 다른 화약고로 남아 있다.


  나는 아요디아를 가로 지르며 유유히 흘러가는 '가가라(Ghaghara)'강의 다리를 건너 야요디아로 입성했다. 고대 드라비다어로 ‘물고기’를 의미하는 넓은 강 건너에 고즈넉이 자리 잡은 고도는 찬란한 오후의 역광 속에 에 들어 있었는데, 역시 유서 깊은 고도답게 한눈에도 고색창연하였다.



*가가리강의 저녁노을


 성산 카일라스에서 발원하는 네 갈래 강들의 하나로서 남으로 흘러내린 카르나리강(Kanali)은 인도 중부로 흘러 들어와서는 아요디아를 거처 비하르의 주도 파트나(Patna)에서 세 가닥이 합류하여 갠지스 본류를 형성한다. 그 다음 다시 방글라데쉬에서 티베트고원에서 히말라야를 돌아 내려오는 부라마푸트라(Brahmaputra)와 만나 대 회향지인 바다로 들어간다. 이런 근원을 갖고 있는 강의 한 지류가 바로 내 다리 아래로 흐르는 ‘물고기 강’- 가가라인 것이다. 그러니까 나에게는 이 도시는 나의 혈통과 화두 양쪽 모두에서 큰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벅찬 감회를 누르며 강을 건너자마자 우선 강가에 서있는 그럴듯한 건물로 무작정 달려갔다.


 아 ! 거기 정말 쌍어문·태양문·코키리 문양(紋樣)이 대문마다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바로 김해 수로왕능(首路王陵)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것들이었다. 이에 확인을 위해 온 시가지를 돌아 다녔지만 역시 집집마다 대문마다 심지어는 지나다니는 버스에까지도 ‘쌍어문’ 이 그려져 있었다. 그렇다면「삼국유사」의 믿기지 않았던 기록대로, 정말로 아요디아는 고대 아유타국(阿踰陀國)이었고 허황옥은 정말로 2천년 전에 2만5천리나 떨어진 한반도까지 시집을 와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의 외할머니가 되었단 말인가?
  자 그럼 독자제위도 잠시 일손을 놓고, 나를 따라, 2천년 전에 있었던 흥미 있는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자.


 때는 서기42년 3월 초하루 날, 경상도 김해 구지봉(龜旨峰)아래였다. 9개 부락의 추장들과 수백 명의 백성들이 모여서 ‘하늘 굿’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 하늘에서 상서로운 기운과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쌍어문


“바로 이곳이로다. 하늘이 명하시길 우리에게 이곳에서 나라를 일으켜 임금이 되라 하셨으니 너희는 산꼭대기의 흙을 한줌 팔지어다.”
 라는 소리가 들리기에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며 땅을 파면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 놓아라. 만약 내어놓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
 라는 노래를 부르니 이윽고 하늘에서 한 줄기 빛이 드리우며 붉은 보자기에 싸인 금합(金盒)이 내려왔다. 열어보니 그 안에 ‘6개의 황금 알’이 번쩍이고 있었다. 이에 한 추장이 집으로 조심스럽게 가지고 돌아갔는데, 그런데 다음날 그 알들이 늠름한 옥동자로 변해 있는 것이 아닌가!


 이들은 나날이 자라면서 용모가 비상하게 변하였는데 이에 구간들과 백성들은 논의 끝에 그중 먼저 나온 동자를 그 달 보름 왕위에 추대하게 되었는데. 이름 짓기를, 세상에 처음 나왔다하여 ‘수로(首路)’라하고 성을 ‘김씨’(金氏)라 하였다. 그리고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가야(伽倻)’라 하니 바로 ‘6가야 연맹’의 시작이었다. 
 이른바 가야국 시조의 ‘천강난생(天降卵生)’ 신화다. 뭐 고대국가에서 시조를 난생설화로 미화시킨 예가 드문 것이 아니니 색다른 것이 없겠지만 나의 관심사는 그 다음부터 시작된다.
 이렇게 왕위에 오른 6년 뒤 7월 27일 아홉 추장들이 왕을 배알하면서 배필을 정할 것을 권하자 수로왕이 말하기를,
 “내가 여기에 강림한 것도 하늘의 명이었다. 따라서 나의 배필도 하늘이 점지하실 것이니 걱정하지 말지어다.” 


 

*아요디아의 가가리강의 가트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왕은 갑자기 사람을 보내 작은 배와 말을 준비하여 망산도(望山島)라는 곳으로 가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게 했다. 이윽고 정말 붉은 빛깔의 돛을 달고 긴 깃발을 휘날리며 이상한 범선이 다가왔는데 그 안에는 범상치 않은 사람들이 20여명이 타고 있었다. 이런 연락을 받은 왕은,
 “이는 내가 기다리던 일이다. 바로 하늘이 정한 나의 배필이 온 것이니 어서 가서 그들을 맞이하도록 하라”


  그리고 친히 나가 임시 궁궐을 지어놓고 일행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허황옥은 이때 비달치고개[綾峴]에서 입고 있던 비단바지를 벗어 신령에게 고하는 의식을 치르고 왕이 기다리는 행궁으로 가서 왕과 상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말하기를,
 “저는 태양왕조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이며 나이는 16살입니다. 제가 본국에 있을 금년 5월 부왕과 모후가 말씀하시기를 간밤에 꿈에 하늘의 상제를 뵈었는데 가야국왕은 하늘이 내린 신성한 사람이니 공주를 보내 배필을 삼게 하라고 하였다기에 저는 부모님 분부대로 배를 타고 와 지금 용안을 감히 뵙게 되였습니다. 공주의 말을 듣고 난 수로왕은,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성스러워 공주가 이렇게 올 줄 이미 알고 있었소. 그렇기 때문에 신하들이 왕비를 맞이하자는 청을 거절하고 이렇게 그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요. 이제 이렇게 아름답고 현숙한 그대를 보니 매우 반가울 뿐이요”
 그리고는 둘은 함께 2박3일의 합환식(合歡式)을 치루고 왕궁으로 돌아왔다. 그 후 둘은 140여년을 함께 살면서 아들 10명과 2명의 딸을 두었는데 둘째와 셋째에게 왕비와 같은 허씨 성을 따르게 하여 김해 허씨의 시조가 되도록 하였다고 한다.

 

출처 : http://cafe.daum.net/tibetsociety/LFxP/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