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제3대왕(재위 18∼44). 동부여를 공격하여 대소를 죽이고 고구려에 병합하였고 국토를 살수 이북까지 확대하였다. 왕자 호동을 시켜 낙랑군을 공략하는 등 많은 나라를 공략하여 무공을 세웠다.
휘(諱)는 무휼(無恤). 유리왕(琉璃王)의 셋째 아들. 어머니는 송양(松讓)의 딸. 14년(유리왕 33) 태자(太子)로 책봉되어 군국정사(軍國政事)를 맡아보다가 유리왕이 죽은 뒤 즉위하였다. 22년(대무신왕 5) 동부여를 공격하여 대소왕(帶素王)을 죽이고, 고구려에 병합(倂合)하였다. 또 26년(대무신왕 9) 개마국(蓋馬國)을 쳐서 이를 병합하여 국토를 살수(薩水) 이북까지 확대하였다.
한편 을두지(乙豆智) 같은 인재를 등용하여 국사(國事)를 맡겼는데, 28년 한(漢)나라의 요동 태수(遼東太守)가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 그의 지략(智略)으로 이를 물리쳤다. 32년 왕자(王子) 호동(好童)을 시켜 한사군(漢四郡) 중에서 아직 남아 있는 낙랑군(樂浪郡)을 정벌하게 하였으며, 37년 재차 공략(攻略)하였다. 왕의 시호(諡號)가 대무신왕인 것은 재위 중에 주위의 많은 나라를 공략하여 무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왕의 능(陵)은 대수촌원(大獸村原)에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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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 KBS에서 바람의 나라라는 드라마를 방영할 예정이라고 한다. 본래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라라는데. 송일국이 주몽의 손자를 연기해서 아직 시작도 안했는 데 주목을 받고 있는 드라마이다.
그래서 오늘 이야기할 부분은 바로 대무신왕이다. 주몽의 손자이자, 주몽의 라이벌이었던 대소와 또다시 라이벌 구도를 성립하며 결국 대소의 목을 베는 왕. 그리고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배경이 되던 그 시절....
지금 내가 하려는 이야기가 바로 고구려의 부흥의 시작을 알린 왕 대무신왕이다.
대무신왕 제위기간 18년 부터 44년 까지 약 30년간 치세를 하였고 이름에서도 알수 있듯이 대무신 즉 투신왕이다. 그리스로마신화에 비교하자면 아레스 급 중국으로 친다면 관우급 정도 된다고 보면 적당할 것이다. 그만큼 대무신왕에 대한 평가는 굉장히 호의적이다. 일차적으로 변방의 소국에 불과할 수도 있었던 고구려가 커지는 계기를 만들었음은 물론이거니와 유리왕 시절 다소 흔들렸던 내적인 요소도 많이 제거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유리왕시절이 조용히 넘어간 것 처럼 보일수도 있지만. 유리왕시대가 잘 넘어가지 못했다면 아마 고구려는 지금쯤 역사에 남겨지지 못한 일반소국에 불가했을 것이다.
고구려의 주축세력이었던 소서노를 비롯 소서노를 따르던 세력이 고구려를 떠났고, 개국공신이었던 협보도 유리왕 곁을 떠났다. 그렇게 크지 않은 부분이라고 보일 수도 있으나, 실상 소서노 세력이 고구려를 떠난 것은 꽤나 큰일이었다. 원래 본 세력이 소서노 세력이었으며 고구려 내에서 소서노의 비중은 굉장히 컸다는 것은 역사를 배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수 있다. 솔직히 고구려의 왕은 주몽이었으나, 속을 들여다 보면 왕은 둘이었다. 주몽과 소서노.
사실 두명이 고구려 초기를 이끌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이런 상황속에서 유리왕이 이어 받았다. 고구려를 이끈 두 주축세력중 하나가 빠진 체로 말이다. 솔직히 유리왕의 입지는 분명 불안했을 것이다. 물론 이끄는 세력은 분명 자신들을 위하는 세력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백성과 토착세력이 유리왕을 지지한다고 볼 순 없었다.
그래서 단행한 것이 바로 국내성 천도이다. 하지만 이 또한 순탄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국내성 천도 내용을 보면,
고구려에는 동맹이라는 제사의식이 있다. 그런데 이런 제사과정에서 돼지가 도망친 일이 발생하였다. 돼지는 국내성 부근까지 도망쳤고, 이때 돼지를 잡으러 갔던 신하가 국내성이 굉장히 좋은 곳이라는 것을 이야기 해준다.
이러한 상황 솔직히 말이 된다고 생각 되어지는 가? 물론 돼지가 잘 도망칠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돼지가 졸본에서 국내성까지 도망쳤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가능하다고 보기엔 어렵다. 비록 당시 고구려가 작은 나라였다고 해도, 돼지 한마리 잡는 게 그렇게 어려웠을 까?
그렇다면 답은 하나이다. 이를 신의 계시로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쑈였다는 것이다. 고대에는 하늘의 명이라고 해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장면을 많이 볼수 있다. 대표적으로 가뭄과 홍수를 이용해서 왕권을 약화시키는 데 사용하곤 한다. 돼지가 국내성 까지 도망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면 편할 듯 싶다.
그렇다면 왜? 이유는 무엇인가?
표면적으로는 선비족과 부여의 침공을 효과적으로 막기 위해서 라고 한다. 하지만 내부적으로 본다면 조금 다르다. 바로 자신의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함이다. 몇몇 사료에서도 밝혀졌듯, 단순히 유리왕이 주몽의 아들이 아닐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있듯, 유리왕의 입지는 굉장히 약했다는 것을 알수 있다.
게다가 유리왕이 심적으로 굉장히 유약했던 왕이었던 것도 국내성 천도의 배경이 되기도 한다. 유리왕은 본래 부여에서 살았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인 주몽은 고구려라는 나라를 세웠다. 그렇다면 유리왕은 볼모와 같은 입장인데, 어렸을 때 부터 아비 없는 자식 소리를 들었을 것은 물론이고, 또한 부여에서 볼모생활이 평탄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심적으로 유약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결과로 잘 나타난 것이 바로 황룡국과 해명태자 이야기인데, 여기서 황룡국과 싸우지 않기 위해 오히려 자신의 아들인 해명태자를 죽이는 모습도 유리왕이 심적으로 강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다. 게다가 화희와 치희 이야기등, 유리왕이 그렇게 안정적인 국가통치를 하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속에서 그 뒤를 물려 받은 이가 바로 태자 무횰, 바로 대무신 왕이다.
바람의 나라라는 만화책을 봤다면 친숙한 이름이겠지만, 난 만화책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만화책과 비교하는 그런 이야기는 없을 것이다.
[大武神王立,<或云大解朱留王> 諱無恤, 琉璃王第三子. 生而聰慧, 壯而雄傑, 有大略. 琉璃王在位三十三年甲戌, 立爲太子, 時年十一歲. 至是卽位. 母松氏, 多勿國王松讓女也.]
대무신왕(大武神王)이 왕위에 올랐다.<혹은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이라고도 하였다.> 휘는 무휼(無恤)이고 유리왕의 셋째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지혜가 있었고, 장성하여서는 뛰어났으며, 큰 지략이 있었다. 유리왕이 재위 33년 갑술(서기 14)에 태자로 삼았는데 이때 나이가 11세였다. (유리왕이 재위 37년에 죽자) 이 때에 이르러 즉위하였다. 어머니는 송(松)씨로서 다물국왕 송양의 딸이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대무신왕의 즉위는 이렇게 이루어졌는데 셋째인데도 불과하고 즉위한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해명태자가 죽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대무신왕은 어렷을 때부터 그 총명함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단순한 일반적인 사람과 달리 어렸을 때 부터 영특함을 지닌 것이 분명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삼국사기에 잘 나타나있는데
[時王子無恤, 年尙幼少, 聞王欲報扶餘言, 自見其使曰“我先祖神靈之孫, 賢而多才. 大王妬害, 讒之父王, 辱之以牧馬, 故不安而出. 今大王不念前愆, 但恃兵多, 輕蔑我邦邑. 請使者歸報大王,‘今有累卵於此. 若大王不毁其卵, 則臣將事之, 不然則否.’”]
그때 왕자 무휼(無恤)은 나이가 아직 어렸으나 왕이 부여에 회답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직접 그 사신을 만나 말하였다.
“나의 선조(동명왕)는 신령(神靈: 해모수)의 자손으로서, 어질고 재능이 많으셨다. 대왕이 시기하여 해치려고 부왕(금와왕)에게 헐뜯어 말하여 부끄럽게도 말을 기르게 하였기에 불안하여 도망쳐 나오신 것이다. 지금 대왕은 예전의 잘못은 생각지도 않고, 다만 군사가 많은 것을 믿고 우리 나라[邦邑]를 경멸하고 있다. 사신은 돌아가 대왕에게 아뢰되,‘지금 여기에 달걀들이 쌓여 있습니다. 대왕이 만약 그 달걀들을 허물지 않는다면 신(臣)은 왕을 섬길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섬기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전하라.”
<삼국사> 권제13, 고구려본기1, 유리명왕 28년(9
이 내용이 바로 누란지위라는 고사성어의 내용이다. 즉 건들면 뒤진다. 뭐 이런내용의 말인데. 한마디로 엄포를 놓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무휼의 나이가 6세에서 7세였다고 하니 그 영특함이 이루 말할수 없다. 근데 가장 웃긴 것은 이런 어린아이가 해준 말을 이해 못한 부여의 반응이다. 이러한 내용때문에 지혜로운 노파를 불러 물어봤다는 것이 삼국사기에 남겨진 것을 봐선.... 꽤 우스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扶餘王聞之, 徧問羣下, 有一老嫗對曰“累卵者危也, 不毁其卵者安也. 其意曰, '王不知己危, 而欲人之來, 不如易危以安而自理也'.”] 부여왕이 듣고 (그 뜻을) 신하들에게 두루 물으니 한 할멈이 대답하였다. “달걀이 쌓여 있다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이고, 그 달걀을 허물지 않는 것은 안전한 것입니다. 그것은‘왕이 자신의 위험은 알지 못하고 남이 오기만 바라는 것이니, 위험한 것을 안전한 것으로 바꾸어 스스로를 다스리는 것보다 못하다.’는 뜻입니다.” <삼국사> 권제13, 고구려본기1, 유리명왕
한마디로 깝치면 죽는다. 뭐 이런 내용이다. 그런데 이런 내용을 이해 못해 노파에게 물어보다니. 이는 사실로 보여지긴 다소 어렵다. 아무리 무식해도 한나라를 통치하는 인물인데. 이런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기 보단. 대무신왕을 영웅적 존재로 만들기 위한 하나의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든다. 원래 위대한 사람에게는 이야기꾼들이 이것저것 사족을 많이 붙이기 마련이다. 그 만큼 어렸을 때부터 생각하는 것이 남다르고, 어른스러웠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로 보여진다.
어쨋든 이런 내용을 전해 들은 부여의 왕 대소의 표정은 안봐도 비디오가 아닐까 싶다. 분명 대소는 화가 치밀러 올랐을 것이고. 이에 대한 반응은 의외로 좀 늦다. 5년뒤에 부여가 쳐들어오게 되는데. 아마 5부족 연맹체인 부여의 입장에선 꽤 빠른 것일 지도 모르겠다. 연맹국가인 부여가 군사를 모으려면 각 가들과 협의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도 아마 부여가 성장하지 못한 배경이 된다.
[三十二年, 冬十一月, 扶餘人來侵. 王使子無恤, 率師禦之. 無恤以兵小, 恐不能敵, 設奇計, 親率軍, 伏于山谷以待之. 扶餘兵直至鶴盤嶺下, 伏兵發擊其不意, 扶餘軍大敗, 棄馬登山. 無恤縱兵盡殺之.]
32년(서기 13) 겨울 11월에 부여인이 쳐들어왔다. 왕은 아들 무휼을 시켜 군대를 거느리고 막게 하였다. 무휼은 군사가 적어서 대적할 수 없을 것 같았으므로, 기이한 계책을 써서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산골짜기에 숨어 기다렸다. 부여 군사들이 곧바로 학반령(鶴盤嶺) 밑에 이르자, 복병이 나가 불의에 공격하니, 부여군이 크게 패하여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무휼은 군사를 풀어 그들을 모두 죽였다.
<삼국사> 권제13, 고구려본기1, 유리명왕
만 누란지위를 말한 무횰은 이제 나이가 10서 11세인데.. 그런 와중에서도 기이한 계략으로 부여의 침공을 훌룡하게 막아낸다. 기이한 계책이라고 해서 무슨 계겠다. 하지만 학반령이란
아무래도 유인책과 복병을 적절히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뭐 때에 따라선 돌을 굴린다거나고개 위에서 화살을 날리는 방법이 아니었을 까? 하고 추측해본다.
어쨋든 무횰의 영특함이 다시한번 드러나는 순간이다. 이후로 부터 이제 무횰은 국정을 맡으며 태자로 책봉되어, 다음 왕위를 물려받을 준비를 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비로서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때가 바로 서기 14년이다.
그리고 이후 행보는 굉장히 진취적인데. 그런 내용은 바로 부여 침공이다. 아무래도 태자시절부터 맺힌것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깔끔하게 행동했지만,
드라마에서 보면 주몽과 대소가 대결구도로 가는 것을 볼수 있지만, 역사로 보자면 대소와 라이벌은 주몽이 아니라 대무신왕이다. 물론 나이차이가 많이 나긴 하지만, 서로에 대한 애증은 꽤나 컸다는 것은 여러 사료에서 증명해주고 있다.
아마 무횰은 어렸을 때 부터 쳐들어오는 대소가 못마땅햇을 것이고, 대소 또한 사사건건 자신의 침공을 막아내던 무횰이 마음에 들었을 리가 없을 것이다.
당시 부여의 국력이 고구려의 국력을 능가했지만, 고구려는 부여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들의 침공을 차근 차근 막아냈고, 끝내 대무신왕 5년에는 침공을 감행한다.
[三年, 春三月, 立東明王廟.]
3년(서기 20) 봄 3월에 동명왕묘(東明王廟)를 세웠다.
그 첫번째 과정이 바로 동명왕묘를 세운 것으로 보인다. 이는 왕권을 강화시키면서 전쟁을 준비하는 의도로 보인다. 시조묘를 세운다는 것은 자신의 권력을 강화시키는 의도 외에도 우리는 고구려의 자손이라는 것을 백성들에게 보여주는 효과도 있기 때문이다. [秋九月, 王田骨句川. 得神馬, 名駏○.] 가을 9월에 왕은 골구천(骨句川)에서 사냥했다. 신비로운 말[神馬]을 얻어서 이름을 거루(駏○)라 지었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3년(20)
이 또한 전쟁 준비를 하는 하나의 계기이다. 사냥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취미생활이라기 보다는. 사냥을 통해서 훈련을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볼수 있다. 게다가 신비로운 말을 얻었다는 것은 더불어서 말을 징집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제 이벤트를 단행하게 되는 데 그 이벤트의 첫번째가 바로 다음 내용이다.
[冬十月, 扶餘王帶素遣使送赤烏, 一頭二身. 初扶餘人得此烏, 獻之王, 或曰 “烏者黑也. 今變而爲赤. 又一頭二身, 幷二國之徵也. 王其兼高句麗乎.” 帶素喜送之. 兼示或者之言.]
겨울 10월에 부여왕 대소가 사신을 보내어 붉은 까마귀를 주었는데, 머리가 하나에 몸이 둘이었다. 처음 부여인이 이 새를 얻어 부여왕에게 바치니, 누가 아뢰었다.
“까마귀는 검은 것입니다. 지금 변해서 붉은색이 되었습니다. 또 머리는 하나인데 몸이 둘이니, 두 나라를 아우를 징조입니다. 왕께서 고구려를 겸하여 차지할 것입니다.”
대소가 기뻐서 그것을 (고구려에) 보내고 아울러 그 어떤 사람의 말도 알려 주었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3년(20)
[王與羣臣議, 答曰 “黑者, 北方之色. 今變而爲南方之色, 又赤烏瑞物也, 君得而不有之, 以送於我, 兩國存亡, 未可知也.” 帶素聞之, 驚悔.]
왕은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고 대답하였다.
“검은 것은 북방의 색입니다. 지금 변해서 남방의 색이 되었습니다. 또 붉은 까마귀는 상서로운 물건인데, 왕(대소)께서 얻고선 가지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보내셨으니, 두 나라의 존망은 아직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대소가 그 말을 듣자 놀라고 후회하였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3년(20)
이는 완벽히 외교적으로 대소가 말린 입장인 것이다. 대무신왕이 단순한 무신왕이 아니라 머리도 좋고 영악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이벤트를 통해서 대무신왕은 완벽한 명분을 얻었다. 물론 이것이 명분이겠는 가? 할 수도 있게지만. 대소는 분명 침략의사를 밝혔다. 그렇다면 여기서 맞대응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아직 중앙집권이 완성되지 않은 시점에서 연맹체의 도움이 필요한 것은 당연지사이다. 그런데 연맹체 입장에서 군사를 내어준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사실 연맹체가 존속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 군사력때문이다. 솔직히 어떤 집단이든 무력이 바탕이 되어야 그 집단이 존속할 수 있는 근간을 마련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런 군사력을 내어준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다. 하지만 만약 침략의사가 내비치고 전쟁을 하게 된다면, 그리고 그 명분이 명확하다면 연맹체는 당연히 군사를 내어줄 수 밖에 없다. 사실 전쟁이란 것이 왕권강화에 큰 기여를 하는 것이 사실이다. 전쟁을 통해서 왕에게 권력이 집중되고 연맹체의 입김은 약해진다. 대표적인 예가 100년 전쟁을 걸친 프랑스가 아닐까? 이런 대의명분 어이없을수도 있지만 전쟁에는 명분이 필요하다. 코딱지 만큼의 명분이라도 필요하다. 없으면 주위의 동조를 얻을 수도 없고 국제사회에서 고립은 말하지 않아도 비디오다. 그런 명분을 얻은 대무신왕이 한일은 오직하나 전쟁이었다. 칭호 부터 대무신, 전쟁의 신이다. 그런 왕이 친히 부여 정벌을 위해 나선 것이다. [五年 春二月, 王進軍於扶餘國南. 其地多泥塗, 王使擇平地爲營, 解鞍休卒. 無恐懼之態.] 5년(서기 22) 봄 2월에 왕은 부여국 남쪽으로 진군하였다. 그 땅은 진흙이 많았으므로 왕은 평지를 골라 군영을 만들고 안장을 풀고 병졸을 쉬게 하였다. 두려워하는 태도가 없었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앞선 이벤트로 이미 사기는 충만하다. 전쟁에서 질거라는 의심따윈 없다. 이제 오직 부여를 향한 공격만 있을 뿐이었다. 이와 더불어 나타난 괴유의 존재 또한 고구려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扶餘王擧國出戰 欲掩其不備, 策馬以前, 陷濘不能進退. 王於是揮怪由, 怪由拔劍號吼擊之, 萬軍披靡, 不能支. 直進執扶餘王斬頭.] 부여왕은 온 나라를 동원하여 출전해서 (고구려가) 방비하지 않는 사이에 엄습하려고 말을 채찍질하여 전진하였으나, 진창에 빠져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었다. 왕은 이때 괴유에게 지시하였다. 괴유가 칼을 빼서 소리지르며 공격하니 (부여의) 모든 군대가 무너져서 지탱할 수 없었다. (괴유는) 곧바로 전진하여 부여왕을 붙잡아 머리를 베었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5년(22)
고구려 초창기 주몽부터 악연으로 이루어진 대소의 목을 치는데 성공한 것이다. 분명 대소도 침착하게 고구려군을 막았을 것이다. 이전 부터 대무신왕과의 악연은 질기다면 질긴 인연이었다. 어렸을때는 누란지위로 엿을 먹이고 학반령전투에서도 처참히 패했다. 그리고 폭설로 인해 고구려에 대한 침공도 물건너갔다. 이렇게 많이 당한 부여인데. 부여의 방비가 허술했다고 보긴 어렵다. 사실 부여도 고구려와의 전투를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 시기와 장소였는데 시기 장소 모두 다 고구려의 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의 내용처럼 진창이었던 것으로 보아 장소는 역시 진흙이 가득한 강기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강기슭에 묶여버린 부여군은 고구려의 칼날을 조용히 받아들이는 방법 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기 또한 고구려의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계절이라든지 이런 영향보다는 역시 타이밍 문제라고 생각한다. 고구려의 사기는 최고조 그리고 부여는 솔직히 사기가 좋을리가 없을 것이다. 여태까지 고구려 원정이 성공한적도 없었던 것은 물론이거니와, 더불어서 까마귀 문제도 한몫했을 것이다. 이런 적절한 타이밍에 쳐들어간 고구려의 승리는 거의 명백하다고 볼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전쟁은 변수로 이루어진 일이다. 그리고 그런 변수가 고구려에게도 찾아왔다. [扶餘人旣失其王, 氣力摧折, 而猶不自屈, 圍數重. 王以糧盡士饑, 憂懼不知所爲, 乃乞靈於天. 忽大霧, 咫尺不辨人物七日. 王令作草偶人, 執兵立營內外爲疑兵, 從間道潛軍夜出. 失骨句川神馬沸流源大鼎.] 부여 사람들이 왕을 잃고 기력이 꺾였으나, 스스로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고구려군을) 여러 겹 포위했다. 왕은 군량이 다하여 군사들이 굶주리므로 두려워서 어찌 할 바를 모르다가 하늘을 향하여 영험을 빌었다. 홀연히 큰 안개가 피어나, 이레 동안이나 지척간에 사람을 분간할 수 없었다. 왕은 풀로 허수아비를 만들고 무기를 쥐여 군영의 안팎에 세워 거짓 군사들로 만들어 놓고, 사잇길을 따라 군사들을 숨기며 밤을 타서 빠져 나왔다. (이때) 골구천의 신마와 비류원(沸流源)의 큰 솥을 잃었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5년(22)
바로 부여군의 반격이었다. 솔직히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왕이 무너졌다면 군사가 무너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지휘체제게 일관되지 않은 것 또한 약점이라면 약점이다. 하지만 부여군은 그러지 않았다. 왕은 죽었지만 오히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사기가 올라갔던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사실 부여에 비하면 고구려는 소국이다. 그런 고구려가 부여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속전속결의 방법이다. 그리고 이런 작전은 맞아 떨어졌다. 속전 속결로 대소왕을 죽이지 않았는 가! 하지만 오히려 이것이 계기가 될줄이라고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부여는 오히려 고구려를 압박해 들어갔다. 본래 사극을 봐도 어떤 전투를 봐도 이 한마디는 적에게 가장 큰 약점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적장을 베었다!!!!!!!!!!" 이 말 얼마나 사기가 떨어지는 가! 하지만 부여군의 군사조직 자체가 절도있고 패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대소의 군사체제가 뛰어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드라마에선 대소가 꼼수만 쓰고 다니는 녀석으로 나오기도 하지만... 어쨋든 그것보다 부여에 있어서 대소는 꽤 위대한 왕인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 전투 이후 부여가 와장창 무너지는 것을 보아도 알수 있다. 그만큼 부여는 대소에게 많이 의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夏四月, 扶餘王帶素弟, 至曷思水濱, 立國稱王. 是扶餘王金蛙季子, 史失其名. 初, 帶素之見殺也, 知國之將亡. 與從者百餘人, 至鴨淥谷, 見海頭王出獵, 遂殺之, 取其百姓. 至此始都. 是爲曷思王. 秋七月, 扶餘王從弟謂國人曰“我先王身亡國滅, 民無所依, 王弟逃竄, 都於曷思. 吾亦不肖, 無以興復.” 乃與萬餘人來投. 王封爲王, 安置掾那部, 以其背有絡文, 賜姓絡氏.] 여름 4월에 부여왕 대소의 아우가 갈사수(曷思水) 가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왕을 칭하였다. 이는 부여왕 금와의 막내아들인데, 역사책에는 그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 처음 대소가 죽임을 당하자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았다. 따르는 자[從者] 백여 명과 함께 압록곡에 이르렀는데, 해두국왕(海頭國王)이 사냥 나온 것을 보고 결국 그를 죽이고 그 백성들을 빼앗았다. 이곳에 와서 비로소 도읍하였다. 이 사람이 갈사국왕(曷思國王)이 되었다. 가을 7월에 부여왕의 사촌 동생이 나라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우리 선왕이 죽고 나라가 망하여 백성들이 의지할 데가 없는데, 왕의 동생이 도망쳐서 갈사에서 도읍하였다. 나도 역시 불초하여 다시 (나라를) 일으킬 자신이 없구나.” 마침내 1만여 명과 함께 투항해왔다, 왕은 (그를) 왕으로 봉하여 연나부(掾那部)에 두고, 그의 등에 줄무늬가 있었으므로 낙(絡)씨 성을 주었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5년(22)
그 후 내용을 보면 진짜 부여는 콩가루 집안이 되고 말았다. 아무래도 대소는 내치에는 신경쓰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아니 어쩌면 대소의 카리스마 덕분에 감춰진 불안요소가 사라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 만큼 부여에서 대소의 비중은 컸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이는 대소의 능력과도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내치에는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지만 특유의 카리스마와 리더쉽으로 부여를 이끌어 갔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대소가 죽은뒤에도 부여군의 사기가 오히려 증가하는 것으로 보아선 군사적 재능도 없지 않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쨋든 이 전투로 고구려는 부여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물론 부여 자체를 멸망 시킨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사실 이후에도 부여는 계속 사료에서도 나오고 있다. 아마 백제가 마한을 멸망시킨 뒤에도 여전히 마한이 존재했던 것 처럼, 부여도 변방에서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기사회생 조차 불가능 할 정도로 개박살이 나서 더 이상 존재하는 것 조차 무의미할 정도로 변모하고 말았지만, 그렇게 고조선 이후 최대의 국가였던 부여는 다음 세대에게 그 바톤을 넘기게 된 것이다.
[八年, 春二月, 拜乙豆智爲右輔, 委以軍國之事.]
8년(서기 25) 봄 2월에 을두지(乙豆智)를 우보(右輔)로 삼고 군무와 국정을 맡겼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그리고 이후 대무신왕은 자신의 내치에 힘쓰기 위해서 노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로 을두지를 우보로 삼았다. 이는 조선으로 따지면 좌의정 혹은 위의정 정도 되는 인물인데, 사실 고구려에서는 을씨 집안을 뺄수야 뺄수 없는 존재이다. 그런 을씨 집안이 고구려에 드디어 나타난 것이다. 후에도 을씨 집안은 자주 나오게 될텐데 대표적인 인물은 역시 을지문덕, 을파소 등등 고구려에서도 알아주는 인재를 배출한 가문으로 보인다. 어쨋든 부여와의 전투로 대무신왕도 깨달은게 많은 모양이었다. 아직 고구려는 안정화되지 않았는 데 그런 와중에 을두지라는 명재상을 우보로 삼았고 정리작업과 주변국을 강력하게 압박을 시작한다. 대표적으로 개마국, 구다국등을 복속시키고 그곳을 군현으로 삼았다. 이는 대무신왕의 본격적이 대외활동을 알리는 신호와도 같았다. 그럼 이것으로 대무신왕 1편을 차후 2편을 계속 적도록 하겠다. ⓒ 4차원 소녀를찾아떠나는 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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