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권은 서슬이 퍼런 날을 세우고 체재에 저항하는 인물이나 집단에 대해선 무자비하게 탄압 을 하였다. 집권이 15년이 지났는데도 후계자 언급을 하다간 감옥행이거나 아예 장애자로 만들어 버 렸다.
김종필이 가장 후계자 구도에 가깝게 서 있긴 하였으나 주변의 질시로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 고 윤필용 등은 농담으로 말을 꺼냈다가 이등병으로 강등되는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더 질실한 예가 바로 1971년도에 발생한 ‘오치성 항명파동’ 사건이다.
당시 박정희는 공화당 내의 4인 체재를 께름칙하게 생각하였는데 이들은 재정위원장 김성곤을 위시하여 길재호, 백남억, 김진만 등 이었다. 이들은 공화당 내에서도 비교적 온건하고 합리적인 정책으로 강경파 군인출신들과는 약간 거리를 두었다. 정치인이면서 일면 학자풍이라 이후락, 김형욱, 박종규 들을 속으론 경시하는 면도 있었다.
제법 예전 선비답게 풍류를 논하고 고답적인 정치를 펼치려고 노력하였다. 이들 4인방이 공화당을 지탱하는 기둥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나 이제 용도 폐기할 시점도 되었다고 박정희는 판단하였다.
즉 3선 개헌에 군인들보다는 이들이 앞장서서 국민 설득에 나섰기 때문에 분 위기가 한결 유화적이었다. 그들의 인격을 믿고 따른 국민들도 많았으니 말이다. 반면 공화당 4인방들은 박정희가 4년제 임기를 한 번만 더하고 나면 다음은 자신들의 차례가 될 것 으로 믿었다. 헌법에 3선으로 못이 박혔으니 박정희도 더 이상 할 수가 없어 이제 4년만 참으면 되 고 4년도 3년이 채 지나기 전에 후계자 물색이 되어야 하니 많은 시간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고 생 각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이제는 3선 개헌이 되었으니 이들 4인방이 필요 없었다. 그야말로 동상이몽(同床異夢)인 셈이다. 당시 선거를 위해서 그랬겠지만 경찰서, 파출소, 지사, 시장, 군수 등 지방 관리들은 거의 이들 4인방 의 세력에 줄을 대고 있었다. 실제로 선거를 위해선 이들의 조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4인 방은 자신들의 말을 고분고분 잘 들을 사람들을 곳곳에 심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말을 수족처럼 들 었고 행정장관의 말은 듣지 않아도 이들 4인방의 말엔 절대 복종이었다.
그리고 선거가 끝난 후에 어느 정도의 논공행상이 뒤따라야 했는데 오치성 내무부장관이 임명되면서 전국의 4인방 수족들을 다 자른 것이다. 전보 발령을 내거나 한직으로 옮겨 선거 후 칭송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좌천이 되자 모두들 부글부글 끓었다. 갑자기 보직이 바뀌고 한직으로 밀려나자 빗발 같은 항의가 4인방에게 닥 쳤다.
사태가 이렇게 진전되자 4인방도 밀릴 수만 없다고 판단하고 김성곤은 야당과 협조하여 오치성 해 임건의안을 제출하기로 결심을 하였다. 당시 실미도 사건으로 민심이 흉흉할 때라 타이밍도 좋다고 판단하여 1971년 9월 30일 신민당은 ‘오치성 해임건의안’을 발의하였다. 국회 제적 204명이었는데 참석의원이 203면. 찬성 107, 반대 90, 무효 6으로 오치성 내무부 장관은 국회에서 해임이 결의되고 말았다. 당연히 공화당 의원 상당수가 찬성을 한 탓이다.
이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박정희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명을 내려 진상조사를 철저히 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김성곤을 비롯한 공화당의 중진들은 중앙정보부 지하실로 끌려가 모진 고초를 겪었다. 심지어 김성곤은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콧수염까지 뜯겼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거의 사실로 알려졌다. 나머지 국회의원들도 참고인으로 불려나와 혼찌검을 당했다. 김재순, 육인수까지 불려나와 생지 옥을 경험한 것이다.
권력 앞에는 국회의원이고 여당이고 없었다. 오직 한 사람만이 존재했고 그의 비위를 그슬리면 그건 죽음에 이르는 첩경이었다. 여당의 중진들이 이렇게까지 당할 정도이니 야당 의원들은 어떻겠는가? 가장 심한 고문을 받은 의원들은 주로 김대중 측근이었다. 조연하, 강근호, 김녹영, 김경인, 박종률 등은 김대중 정치자금의 출처를 대라고 통닭구이, 물고문 등 갖은 고문을 당했고 72년 유신이 선포된 이후 이런 고문은 강도를 더해갔다.
일종의 공포심리를 확산시키는 것이었을 것이다. 손보면 확실히 본다는 군대철학을 정치판에 통용시킨 것이다. 육사 7기의 이세규 비례대표 야당의원은 실미도 사건 폭로로 끌려가 초죽음을 당했다. 그 뿐이 아니 다. 조윤형, 최형우, 김한수, 김상현 등 쟁쟁한 야당의 전사들이 정보부 지하실에서 팬티도 입지 못하 고 발가벗겨졌고 심지어는 핀센트로 성기를 툭툭치며 희롱을 당하기도 했다. 후일에 그들은 구겨진 자존심 때문에 차라리 자살을 하려고 몇 번을 시도했다고 털어놓았다. 발길질이나 주먹질 같은 구타 는 기본이고 코에다 수건을 덮어놓고 주전자로 물을 부어 숨을 못 쉬게 하거나, 긴 나무 막대기에 꽁 꽁 묶어 통닭처럼 빙빙 돌리기도 하고 담요를 몸에 감아 물을 뿌린 후에 각목으로 치면 흉터도 나 지 않고 통증은 뼈 속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이 때의 후유증을 견디지 못하고 장애인이 된 정치인도 상당수가 된다. 이들 모두가 중진 국회의원들이고 정치권의 향방을 가르는 인물들이었다. 유명 정치인들이 이 정도로 당하니 이름 없는 서민들이 걸리면 그야말로 집안이 망할 정도로 살벌했 다.
하여간 박정희는 이렇게 철권통치로 정치질서를 자기중심적으로 잡으려고 노력하였다. 따라서 검찰, 경찰, 정보부 등의 권력기관은 공포의 대상이 되었고 정보부가 위치한 남산도 산책은커녕 쳐다 보는것 자체도 아직까지 싫음은 어찌할 수 없다.
잃은 10년을 되찾았다는 이명박 정부는 국민들과의 소통보다는 나의 사람들만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지난 4월 전격적인 미국쇠고기 수입으로 인한 촛불 시위후 부터 숨막힐듯 옥죄는 사회분위기가 어디 마땅한 배출구를 찾아야 겠다. 학생, 근로자, 가진자든 가난한자이든 사회적 직위나 직업과는 관계없이 이들 모두는 정치에 관한 나름의 소신과 일가견을 펼친다. 학문적으로 맞고 아니고가 아닌 자신의 주장이 뚜렷하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이명박 정부는 국민들과의 진심어린 소통을 하지 않으려 하는것 같다. 어디 하소연 할 곳이 마당찮은 것이다. 정치란 원래 통치권자를 비롯한 상부층을 씹는 맛이 일품이다. 왜 이렇게 하지 않고 저런 식으로 하느냐? 그러니까 될 일도 안 된다는 등의 일방적인 논리인데 그렇게 떠들면서 하루 해를 보내고 힘 든 노동의 찌꺼기를 털어버리는 거다.
스포츠 관람을 해도 관중석은 코칭 스탭보다 더 훈수를 잘둔다. 축구경기나 야구경기를 보러 가면 관중 모두 대단한 지도자들이다. 그렇게 떠들면서 관람하고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는 매일 열리는 스포츠와 같으니 매일 떠들고 훈수를 들고 씹어야 맛인데 이게 제대로 소통되지 않으 니 그 에너지가 어디로 가겠는가? 축적된 정치훈수 에너지는 돌출구를 찾지 못하고 헤매다가 결국 권력과 돈, 배신으로 절철되어 끝을 다한다. 이는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비슷하다. 개도 먹지않는 돈, 권력이 강해질수록 욕구는 더욱 강해지는 법이다.
이래저래 우리들은 술 마실 일도 너무 많고 또 저녁식사와 함께 가볍게 마시는 술이 아니라 고주망태가 될 때까지 1차 2차 3차로 이 어지니 온 세상이 취해 돌아가는 것 같았다. 모두가 취해서 살아가고 취하지 않으면 살기 어려운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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