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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상 고려대 교수(전총장)·경영학
1990년대 이후 세계경제는 개방체제가 되면서 어느 나라 자본이 어느 나라에 가서 경제를 지배하고 이익을 내느냐에 따라 세계경제 판도가 달라지는 금융전쟁시대가 나타났다. 여기서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은 파생상품과 인수합병 같은 첨단금융기법을 무기로 하는 다단계 투기시스템을 만들어 세계 각국 금융시장을 공략했다. 그러나 이러한 공격적 전략은 자해행위가 되었다. 최근 들어 뜻하지 않게 미국 주택대출시장이 부실화하면서 월가의 투자은행들의 부도가 잇따르자 국제금융시스템은 고층건물처럼 무너졌다.
이에 따라 미국경제를 필두로 세계 각국 경제는 신용경색의 덫에 걸려 줄줄이 주저앉고 있다. 미국은 자동차산업의 붕괴를 필두로 불황에 휩싸였다. 지난해 3분기부터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로 돌아서 언제 그칠지 모르는 침몰을 시작했다. 여기에 유럽과 일본 등 선진국들이 뒤따르고 있다. 더욱이 신흥 공업국가의 도미노현상이 나타나 세계의 공장이라고 하는 중국의 경제성장률도 거의 절반수준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
대외의존도가 높은 우리 경제는 어느 나라보다도 충격이 크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오자 외국자본이 대거 빠져나가 금융시장을 마비시키고 있다. 동시에 세계경제가 침체하자 수출이 급격히 줄어 산업발전의 버팀목을 잃고 있다. 이에 따라 부실한 기업과 금융기관의 연쇄부도가 가시화하면서 실물경제가 식물상태로 가고 있다.
위기의 진원지인 미국은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수습에 나섰다. 금리를 제로 수준으로 내리고 돈을 무제한 풀어 무너지는 금융시스템을 떠받치겠다는 것이다. 더불어 도로건설, 신에너지산업, 디지털기반 확대 등에 총 1조달러를 투입하는 신뉴딜정책을 발표했다. 어떤 정책을 펴도 문제 해결이 안 되는 시장 실패를 인정하고 정부가 경제를 인공호흡으로 살려내는 긴급조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이런 글로벌 위기에 지나치게 안일하게 대응하고 있다. 자금지원만 하면 된다는 단순 논리로 외환보유액 방출, 외화차입 지급보증, 중소기업 신속지원 제도, 대주단 협약 체결, 은행 자본금 확충, 금리인하 등 갖가지 금융정책수단을 동원하고 있다. 그러나 정책을 내놓을 때마다 환율이 오르고 주가가 내리는 등 시장은 거꾸로 간다. 경제는 바닥이 깨져 있는데 돈만 퍼붓는 정책만 펴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뒤늦게 건설업과 중소조선업에 대한 구조조정에 나섰다. 그러나 은행이 주도하는 형태로 추진되고 있어 부실기업에 대해 퇴출보다는 자금지원에 치중하고 있다. 경제가 이미 위태로운 국면이다. 건설은 물론 조선, 철강, 자동차, 반도체, 가전, 해운 등 우리 경제를 이끄는 주요산업의 경기가 급속도로 악화하고 있다. 우리 정부도 경제 비상사태를 선언해야 한다. 그리고 경제운용의 새 패러다임을 제시해야 한다.
이런 견지에서 한국판 뉴딜정책이 절실하다. 한국판 뉴딜정책은 4대강 정비 등 논란이 많고 경제성이 부족한 토목사업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근본적으로 부실한 금융기관과 기업을 과감하게 솎아내는 대규모 수술작업부터 단행해야 한다. 따라서 깨진 밑바닥부터 메우고 경제가 정상적으로 돌게 해야 한다. 여기에 신산업 발굴, 벤처기업과 중소기업 육성, 일자리 창출 등 경제의 근본 동력을 회복하는 내용을 담아야 한다. 또 재정적자를 감수하더라도 실업자나 빈곤계층을 위한 사회안전망을 구축하고 이들을 경제활동에 참여시켜야 한다.
세계경제가 미국발 금융위기로 인해 제2의 공황상태로 치닫고 있다. 머뭇거리다가는 불황의 쓰나미에 휩쓸려 쓰러진다. 온 국민이 힘을 모아 비상대책을 세워 위기를 딛고 우뚝 솟는 결연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이필상 고려대 교수(전총장)·경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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