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8년 4사분기의 경제성장률이 IMF경제위기 이래 최저인 -4%대로 떨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종전의 예측과는 달리 금년도 우리나라 경제성장이 마이너스를 기록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세계 주요 국가들이 모두 불황의 한파에 떨고 있다. 그 원인에 대하여 그 동안 수많은 전문가들의 진단이 있었으며 각종 언론매체에서도 집중 논의가 있었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지만, 몇 가지 중요한 사항들을 충분히 부각시키지 못한 채 초점을 잘 맞추지 못하고 있는 듯 하다.
우선, 이번 미국발 금융위기가 마치 전혀 예기치 못한, 돌발사태인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 예를 들면, 어느 작가의 모 일간신문 시사 논평은 "미국에서나 우리나라에서나 이번 금융 위기를 예측하지 못했다. 진단도 처방도 시원스럽지 못하다…"는 말로 시작되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언론을 통하여 이와 비슷한 말을 자주 들었을 것이다. 만일 미국의 금융위기가 정말 전혀 예측하지 못한 돌발사태였다고 한다면, 이 작가의 말대로 진단도 처방도 시원스럽지 못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작가의 말은 사실이 아니다. 미국 금융위기의 징후가 도처에서 감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론과 증거에 입각해서 충분히 예견되었으며 실제로 수많은 사전 경고가 있었다. 문제는 그런 경고들이 지속적으로 묵살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뉴욕대의 루비니 교수는 이론과 자료에 의거해서 정확하게 예측하고 경고했지만, 동료들의 코웃음만 샀다. 그는 구닥다리 경제학의 틀에 얽매이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다음으로, 미국 금융위기의 핵심이 부동산 거품의 붕괴임에도 불구하고 금융부문의 붕괴만 집중적으로 논의되는 경향이 있었다. 얼마 전 우리나라를 방문한 칸 IMF 총재는 현정택 KDI 원장과의 KBS 인터뷰에서 불만을 털어놓았다. 미국 경기침체의 근본 원인이 미국 부동산거품의 붕괴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금융부문에 무슨 큰 잘못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사람들이 온통 금융위기만 얘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변명같이 들리기도 하지만, 충분히 일리 있는 얘기다.
부동산 거품 위에 세워진 파생상품들
많은 전문가들이 미국 금융제도에 문제가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미국의 금융제도는 미국이 다른 나라에 적극 권고하던 선진 제도였다. 1990년대 금융파탄으로 일본이 앓아 들어누워있을 때 미국은 일본의 금융계를 비웃었다. 그리고 시장의 원리에 충실한 미국식 금융제도를 도입하라고 집요하게 압력을 넣었다. 그런 자랑스러운 제도였다. 파생금융상품들의 무분별한 남발 얘기도 많이 나온다. 하지만 대부분의 파생금융상품들은 소비자들(투자가들)의 다양한 구미에 최대한 잘 맞도록 미국 최고의 재태크 고수들이 고도의 수학적 계산과 첨단 금융공학을 이용해서 치밀하게 만들어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차례의 모의실험을 통과한 후에 시판되었다. 이 파생금융상품들이 금융시장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켰다고 호평하는 전문가들이 아직도 즐비하다.
문제는 그 파생금융상품들을 떠받치고 있는 기반이 모래성과 같이 취약하였다는 것이다. 즉, 거품이 잔뜩 낀 부동산 위에 세워진 상품들이었다. 아무리 미국의 금융제도가 우수하고 파생금융상품 그 자체가 수학적으로 치밀하게 재단되고 그리고 용의주도하게 잘 관리된들, 거품 위에 세워진 것은 쉽게 무너질 뿐만 아니라 그야말로 허망하게 무너진다. 부동산거품 붕괴가 원인이었다는 점에서 이번 미국의 금융위기는 "잃어버린 10년"을 가져온 일본의 1990년대 경제파탄과 꼭 닮았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부동산 거품 붕괴의 내막을 소상히 알고 있었던 경제전문가들은 일찍부터 "저러다 큰 일 나지" 하면서 미국의 부동산시장을 심상치 않게 바라보았다.
자산시장 이론의 대가로 알려진 미국 예일대 쉴러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부동산시장이나 주식시장에서 실제로 관찰되는 투자가들의 행태는 경제학이 얘기하는 것과 사뭇 다르다. 의외로 많은 투자가들, 심지어 내로라 하는 투자전문가들도 아주 단순한 주먹구구 계산에 따라 투자를 결정하는 경향이 있고, 주위 투자가들의 눈치를 많이 보며 소문에 민감하다고 한다. 많은 투자가들이 최근 수년 간의 부동산가격에 대한 자신의 기억과 금리 그리고 직감에 주로 의존한다. 주위의 몇 사람들이 투자를 하거나 어디에 투자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입소문이 퍼지면 수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부동산시장에 몰려든다. 결과적으로 부동산투기 열풍이 불게 되고 각종 부동산 관련 파생금융상품들이 불티나게 팔린다. 이런 과정에서 부동산가격에 거품이 잔뜩 끼게 된다. 지난 수년간의 부동산가격 상승이 미래에도 계속된다는 전제 아래 다수의 투자가들이 투기를 한 결과로 거품이 형성되기 때문에 부동산가격 상승이 멈추는 순간 거품도 푹 꺼지게 된다. 1990년대 일본의 금융붕괴, 2008년 미국의 금융붕괴도 바로 이렇게 해서 터진 것이다.
주먹구구식 계산이나 직감 그리고 남 따라하기는 우리 주위에서 늘 보는 현상이기 때문에 굳이 최고 이론가의 얘기를 듣지 않아도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경제학만은 반복적 주먹구구 계산이라든가 직감 혹은 남의 눈치 보기를 모두 부정한다. 이웃집 마나님이 밍크코트를 사니까 나도 덩달아 산다든가, 내 연봉이 50% 오르더라도 동료의 연봉이 100% 오르면 기분이 아주 나빠진다든가 상대적 박탈감 같은 이상한(?) 현상은 경제학 사전에 없다.
부동산시장이나 주식시장에서도 투자가들은 남의 눈치를 봄이 없이 오직 자신의 합리적 계산 아래 투자를 결정한다는 것이 경제학의 지론이다. 시장주의자나 신자유주의자는 그런 경제학 이론을 금과옥조처럼 굳게 믿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아무리 쉴러 교수의 이론이 현실을 바탕으로 했다고 하더라도 경제학의 기본 틀에 맞지 않으면 신자유주의자들은 외면해버린다. 신자유주의자들은 대체로 투기를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거품의 개념을 잘 인정하지 않는다. 미국의 재계나 관가에는 신자유주의자들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니 미국의 금융위기에 대한 경고들이 지속적으로 묵살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멀쩡한데, 미국발 금융위기가 문제?
▲ 우리 경제 기반이 허약해진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미국이나 일본처럼 부동산투기 과열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연합 |
이런 점에서 작금의 상황은 IMF경제위기 때와는 상당히 다르다. 그때는 우리 경제의 기본(시장 펀더멘탈)이 튼튼했음에도 불구하고 외세 때문에 휘청거렸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 경제의 기본이 이미 허약해진 상태에서 국제적 여건마저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이다. 몸살이 난 사람이 뭇매 맞는 꼴이다. IMF경제위기는 빨리 벗어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물론 우리 경제의 기반이 허약해진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미국이나 일본의 경우처럼 우리의 경우에도 부동산투기 과열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우리나라의 경우 IMF외환위기를 벗어나기 직후부터 부동산가격이 오르기 시작하더니 2001년부터 투기열풍이 불기 시작하였다. 투기행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부쩍 늘어났고 여기에 은행이 펌프질을 해댔다. 은행이 부동산을 담보로 마구 가계대출을 해주었다. 이것도 일본과 미국을 꼭 닮았다. 예금 범위 내에서 대출해주는 것이 상식이지만, 투기열풍이 불자 그런 상식이 무시되었다. 2007년에는 예대율(총대출/총예금)이 140%에 이르렀다. 이런 과다대출 현상은 일본의 부동산 거품이 최고조에 달하던 1980년대 말과 아주 흡사하다고 한다. 대출자금을 확보하기 위해서 은행들은 은행채를 발행하고 심지어 외국에서 막대한 돈을 빌려 왔다. 외국의 돈까지 빌려와 부동산투기를 조장한 것은 그렇다 치고, 기업에게 자금을 원활하게 공급해야 할 은행이 도리어 돈을 빌려서 부동산 투기에 돈을 대주고 있었으니 우리 경제가 잘 돌아갈 리 없다.
부동산투기 열풍은 가계부채의 급증을 초래하였다. 금융권 전체의 가계 부채 총액은 2001년 말 342조 원에서 2008년 6월 말 660조 원으로 급격하게 불어났다. 이중 절반이 부동산담보 대출이다. 제2 금융권의 것까지 합치면 부동산담보 대출의 규모는 이보다 훨씬 클 것이다.
문제의 심각성을 감지하고 정부가 2006년 은행대출을 규제하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면, 부동산의 담보가치 중에서 대출해줄 수 있는 비율(담보인정비율, LTV)과 채무자의 총가처분소득에서 부채가 차지하는 비중(총부채상환비율, DTI)에 제한을 가하였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660조 원의 가계부채는 우리 국민의 가처분소득의 1.4배에 이른다. 이는 저축 안 하기로 유명한 미국보다 높은 수치다.
부동산가격이 오르고 있을 때에는 그런 가계부채가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2007년 후반부터 부동산가격이 하락의 기미를 보이면서 문제가 심각해졌다. 부동산가격이 떨어지면 투자가들이 급매물을 내놓으면서 부동산가격은 더욱 더 떨어지는 악순환이 형성된다. 부동산가격이 떨어진다는 것은 채무자들이 부동산을 팔아서 빚을 갚을 능력이 떨어짐을 의미한다. 부동산가격이 오를 때에는 소위 자산효과 덕분에 사람들이 여유 있게 돈을 쓰지만, 부동산가격이 떨어지면 사람들은 지갑을 닫기 시작한다. 그러지 않아도 잔뜩 빚을 지고 있는 터에 부동산의 가치마저 떨어지고 게다가 고금리까지 겹쳤으니(2007년 부동산담보대출 금리는 9-10%였다) 중고소득층이 풍족하게 돈을 쓸 여유가 없다. 그러지 않아도 세계적 불황 때문에 수출이 시원치 않은데 이렇게 내수마저 부진하면 불황의 늪은 더욱 더 깊어진다.
부동산가격 하락으로 인한 토목건설업의 위축은 둘째로 치자. 은행의 입장에서 보면, 부동산가격의 하락은 은행이 담보로 잡은 물건의 가치가 하락함을 의미하며, 이는 은행의 손실을 의미한다. 게다가 그 동안 발행한 은행채의 원리금을 상환해야 할 시기도 닥쳐왔다. 이런 저런 이유로 2008년 들어 은행은 대출금을 회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니 시중의 자금은 점점 더 말라갔고, 특히 중소기업은 아우성이었다. 흑자 기업들마저 도산 위기에 빠졌다. 정부가 은행을 통해서 수백 억 원의 돈을 풀었지만, 기업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그놈의 부동산투기 과열 때문에 벌써 몇 년째 우리나라의 수많은 기업들이 자금난에 허덕였다.
그러던 차에 미국의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외국 투자가들이 투자금을 회수하는 데다가 그 동안 우리 은행이 빌려왔던 외채의 상환기일이 도래하기 시작하였다. 이 외채를 달러로 갚다 보니 환율이 올라갈 수밖에 없다. 2009년 상반기까지 국내은행이 상환해야 하는 외채가 800억 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부동산투기에 편승한 은행의 과다대출이 현재 우리가 당면한 환율급등의 한 요인이 되고 있다. 환율급등으로 기업의 원자재 확보가 큰 경제적 부담이 되었다. 부동산투기 과열은 우리의 건전한 기업에게 이중, 삼중의 타격을 주었다.
오히려 부동산규제를 완화한다고?
이와 같이 부동산투기 과열 그리고 이어지는 거품 붕괴는 여러 경로로 우리 경제의 기반을 취약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다시는 그런 부동산투기 과열이 일어나지 않도록 단단히 제도정비를 하고, 부동산투기를 조장하였던 토목건설업을 과감하게 구조조정 해야 한다. 토목건설업이야말로 부동산투기 과열 덕분에 오래 동안 톡톡히 재미를 보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부는 온갖 부동산규제 완화조치를 취하고 있고, 경기를 살린다는 명분 아래 토목건설업 살리는 데 국민의 혈세를 퍼붓고 있으며, 별 효과도 없는 대규모 토목사업을 일으키는 등 거꾸로 가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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