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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파 현인택은 자기표절 명백 하여도 장관, 진보파 이필상에겐 별 일 아닌것도 언론이 흠결이라 광고하니까 치명적인 부도덕으로 둔갑

이경희330 2009. 6. 11. 01:32


우리 사회에 진보진영에 대해 이중기준이 대단히 크게 작용하는 것은 사실이라고 본다. 예컨대 몇 년 전 이필상 교수가 고려대학교 총장에 선임되었다가 경영대 동료 교수인 윤영섭,신준용,황규승이 중병 입원 총장사퇴협박이 먹히지 않차 3인이 국민일보를 찾아가 표절이라며 기사화하여 구설수에 올랐던 혐의는 불찰이랄 수는 있지만 심각한 도덕적 흠결이라고는 볼 수 없다. 반면에 현인택 통일부장관의 경우는 명백한 이중게재, 즉 자기표절이라고 봐야 한다. 사실상 똑같은 논문을 두 군데 싣더라도 자기표절이 아닐 수는 있다. 독자층이 너무나 달라서 전에 실은 글을 읽을 기회가 전혀 없다고 봐야 할 독자들에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똑같은 논문을 게재하는 것이 지식의 전파라는 문명사회의 목적을 위해 필요한 일이 된다(☞ "표절"). 하지만 현인택은 청문회에서 마냥 "나는 몰랐다"는 잡아떼기로 일관했다. 적극적이고 당당한 변론이 아니라 잡아떼기라고 하는 위축적인 자기방어밖에 할 말이 없었다는 점이 바로 그 일이 부끄러운 짓이었다는 반증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필상은 총장직을 수행하지 못했고, 현인택은 장관에 취임했다. 보수파 현인택에게는 명백한 자기표절도 흠이랄 것이 못 되지만, 진보파 이필상에게는 별 일 아닌 것도 누가 마이크 잡은 김에 흠결이라고 광고만 하면 치명적인 부도덕으로 둔갑한다.


예수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자, 아무도 간음한 여인을 더 이상 때리지 못했다. 현인택의 잘못은 예수의 가르침에 기대서 넘어간 셈이다. 하지만 이필상에게는 예수가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다. 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자가 돌아서자마자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자를 옥졸에게 넘기는 짓이 한국사회의 일상적인 규범이 되어 있는 것이다. 간음한 여인을 때리지 말라고 설교한 예수도, 만 달란트를 용서받자마자 백 데나리온을 그악스럽게 뜯어내는 악독한 종은 벌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마태복음 18장 34-35절). 그런데 우리 사회는 지금 보수파에게는 예수의 논리로 현인택을 용서하는 반면에, 진보파에게는 악독한 종이 했던 짓을 하고 있으면서 잘못인 줄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보수신문들이 악질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면은 분명히 있다. 하지만 나는 보수신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사회에서 진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일수록 도덕과 정치를 뒤죽박죽으로 섞어버리는 무분별한 자기최면에 빠져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미개하고 불신이 팽배한 시대의 애처로운 처세술인 "참외밭에서 신발 끈 고치지 말라",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 따위의 소리를 도덕의 격언인 줄 착각하는 미혹이 있는 것이다. 참외밭에서 신발 끈 고친 사람을 도둑으로 몰아 고발한다면 그 놈이 악당이다. 의도가 아니라 행위가 악랄한 것이다. 그런 악당은 내버려두면서, 신발 끈 고쳐 맸을 뿐인 사람을 "처신을 잘못했다"는 둥, "물의를 일으켰으니 자업자득"이라는 둥, "오십보 백보"라는 둥, "군자로서 할 일이 아니"라는 따위로 매도한다면 사회가 어떤 꼴이 될까? 검찰이 수사만 개시하면 바로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로 받아들여 버린다면, 검찰을 뒷구멍으로 조종할 수 있는 진짜 악당 말고 누가 온전히 인격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조선일보가 자기 회사와 방상훈 사장의 실명을 국회에서 거론했다는 이유로, 헌법이 보장하는 국회의원의 면책특권까지 무시하겠다고 덤빌 수 있는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다. 도덕적 죄악과 사법적 범죄를 마구잡이로 혼동한 결과 남는 것은 이현령비현령이라고 하는 최악의 깡패논법뿐이다.

 

 

 

 

박동천 전북대 교수 프레시안 기고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