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살 연세대학교 졸업예정자 이 모 씨는 올 하반기 기업 공채에 지원하면서 계속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다. 입사원서가 요구하고 있는 "부모의 학력과 직업에 대한 질문" 때문에 이 씨는 항상 마음이 쓰인다.
입사원서를 낼 때마다 이 씨는 각각 중학교와 초등학교만 졸업한 부모님에게 도리어 죄송한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이 씨는"평소엔 부모님의 학력 때문에 부모님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는데, 입사원서에'중졸이니 초졸이니' 적어 낼 때마다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부모님께 죄송하다"고 말했다.
이씨는 "도대체 사람 뽑는데 왜 부모가 나온 학교를 따지는 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하소연 했다.
현재 공채를 진행 중인 현대차 그룹은 부모의 학력과 직장을 적게 돼 있고, 한화 그룹의 경우 부모의 최종졸업 학교명까지 적어 내도록 하고 있다.
대기업 계열사나 일부 중소기업들은 심지어 부모의 직장 내 직위, 최종학력, 월 평균소득 등 구체적이고 포괄적 정보를 요구하고 있으며, 홍보나 영업 등 일부 직종에 대해서는'지인 중 각계 유력인사의 이름과 관계'를 적어내라고 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부모의 학벌과 지위에서 경쟁자들에게 밀리는 구직자들은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지난해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구직 중인 27살 박 모씨는 "실력이 없어서 떨어졌다고 생각하지만 혹시 부모님의 학력이나 지위 때문에 떨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며 "그럴때면 그런 것에 불안해하는 스스로가 미워지기까지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구직자 29살 이 모씨는 "면접관이 다른 지원자에게 '아버지가 K대 나오셨는데 무슨 과 몇 학번인'지 물었다"며"절박한 구직자들은 그런 말을 들으면 불안해 질 수 밖에 없다"고 전했다.
◆ 부모의 학벌, 당락에 영향 미칠 수도
대기업 관계자들은 구직자들의 이런 불만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필요한 정보니까 요구할 뿐이라는 입장이다.
현대차 그룹 관계자는 "이제까지 해 오던 방식이고 꼭 바꿔야할 이유는 없다"며 "당락에 영향은 없다"고 말했다. 한화 그룹 관계자는 "회사뿐만 아니라 학교에서도 다 조사하는 것 아니냐"며 "그룹에서 정한 규정이니까 입사를 원하면 적어 넣어야 한다"고 말했다.
두산 그룹의 한 계열사 HR팀(인력팀) 관계자는 "회사는 입사지원자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지원자의 주위 환경과 성장 배경 등을 모두 파악하기 위해 가족의 학력, 지위에 묻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만약에 이게 부당하다고 생각한다면 본인 손으로 직접 바꿔보라"고 충고했다.
대기업 관계자들은 이처럼 "해왔으니까 그냥 한다"는 입장이지만, 막상 없앨 계획이 있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한 결 같이 부정적인 입장이었다."하지 말란" 법도 없기 때문이란다.
"당락에 큰 영향은 없다"는 기업들의 공식적 입장과는 달리 또 다른 관계자들은 부모의 학벌 등이 당락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지난해까지 최종면접관으로 참여했던 한 그룹 고위 간부는 "지난해 신입사원 채용 사업을 외주를 줬는데, 서류 단계에서 주요 5개 대학 출신자만 걸러내도록 했고, 가족들의 학벌, 지위는 최종면접 단계에서 자료로 활용했다"고 귀띔했다. 이 간부는 이어 "솔직히 고위 관료 자제나 명문가 자녀가 자기 회사에 온다는데 누가 마다하겠냐"고 반문했다.
인터넷 취업 정보업체 관계자는"합숙평가가 없는 대기업이나 중소기업의 경우에는 부모의 학벌이나 지위를 따지는 경향이 있다"며 "신입사원 지원자의 경우에는 취업 시 그런 장점(부모의 학벌 등) 이 있으면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좋다"고까지 조언했다.
◆ 학벌주의와 가족주의의 기묘한 결합
전문가들은 직원을 뽑을 때 부모의 학벌까지 따지는 풍토에 대해 "학벌주의와 가족주의가 결합된 한국의 특수한 상황"으로 진단하고 있다.
자전거로 전국을 돌며 학력철폐 운동을 벌이고 있는 경상대학교 정진상 교수(사회학과, 49)는 "본인의 학벌도 모자라서 부모의 학벌까지 따지는 대기업의 봉건적 행태는 상식 이하의 짓이라"고 비판했다. 정 교수는 이어 "기업들은 부모의 학벌을 통해 입사지원자의 인간 관계망을 보는 것이라"며 "회사는 그 관계망을 활용하고 싶은 욕심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전남대학교 철학과 박구용 교수는 이 같은 현상에 대해 "가족을 통해 한 사람을 통제·관리하려는 가족주의적 발상과, 능력보다는 학벌을 따지는 학벌주의가 결합된 기묘한 현상이라"며 "보이지 않는 사회적 차별로 인해 사회적 신분이 대물림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 대책은? 없다!…취업하려면 그냥 써 내는 수밖에
사정이 이렇지만, 입사 때 요구할 수 있는 정보의 종류를 규정하고 있는 노동관계법은 없는 상황이다. 노동부 관계자는 "노동 관계법에 사원 선발을 할때 남녀 차별을 금지하고 여성의 경우 업무능력과 관계없는 키, 몸무게 등을 묻지 못하게 하는 법은 있지만 포괄적으로 차별을 금지하는 조항은 없다"고 설명했다.
국가 인권위원회 관계자는 "입사 원서에 부모의 지위나 신분을 묻는 조항이 사회적 차별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면서도 "지난 2003년 본인의 학벌로 입사 때 차별하지 말라는 권고를 낸 적은 있지만 가족의 학력 관련 권고는 낸 적이 없다"고 밝혔다.
결국 아쉬운 입장에 있는 구직자들은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회사가 원하는 모든 정보를 적어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정아 씨를 비롯한 각계 유명 인사들의 잇따른 학력 위조 파문으로 '학벌사회'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높다. 하지만 대기업들은 본인을 넘어 부모, 가족의 학벌까지 따지며 학벌사회를 부추기고 있는 상황이다.
CBS사회부 심훈 기자 simhun@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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