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가 시작에 불과하다. 세계경제가 전혀 예측이 되지 않고 있고 어쩌면 세계 위기가 시작된다는 생각도 든다."
"서민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생필품 대책은 정부가 특별히 세우면 서민생활에 도움이 될 것이다. 물량의 수급을 통해 생활필수품에 해당하는 품목 50개에 대해 우리가 집중 관리하게 되면 전체적 물가는 상승해도 50개 품목은 그에 비례해 올라가지 않을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17일 총선개입 행보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경북 구미산업단지에서 지식경제부 업무보고를 받으면서 한 발언이다.
난무하는 박정희시대 미봉책들
이 대통령 발언을 통해 두가지를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이 대통령도 비로소 최근의 경제위기가 단순한 침체가 아니라 '세계공황적 위기상황'이란 인식을 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시장논리에 역행하는 박정희 시대의 '미봉책'으로 대응하려 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대통령의 '미봉책'은 선의로 산물일 것이다. 불황이 올 때 가장 힘든 계층이 힘없는 서민들이다 보니 50개 생필품 가격이라도 묶어줘야 하는 게 아니냐는 통치자의 안타까움의 발로일 게다. 문제는 이같은 대책이 말 그대로 '미봉책'으로, 실제 서민 등에게는 거의 도움이 못되고 도리어 시장질서만 교란시키면서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는 데 있다.
한 예로 국제원자재값이 급등하고 원화 환율까지 폭등하면서 물가인상 압력이 이중으로 가중되고 있는 지금, 정부와 지자체가 하고 있는 물가대책은 한심 그 자체다. 칼국수 한그릇을 만드는 데 70원어치의 밀가루값 인상 요인밖에 없는데 500원을 올렸으니 내리라고 영세 음식점들에게 압박을 가하는가 하면, 밀가루업체에겐 재고물량이 다 소진될 때까지 밀가루값을 올리지 말라고 하고 있다. 또 단속반이 철근업체를 돌아다니면서 1주일치 이상 원자재를 갖고 있으면 사재기 세력으로 몰아치는가 하면, 국제유가 폭등에도 불구하고 한전에는 하반기에 전기값을 내리라고 난리여서 한전 주가를 폭락케 하고 있다.
이같은 풍광을 보노라면 지금이 2008년인지, 1970년대 박정희 시대인지 헷갈릴 뿐이다. 당시보다 경제규모가 수십배 커지고, 민간부문의 영역이 90%를 넘었을 정도로 관치시대와는 거리가 먼지 오래됐음에도 유신때 방식이 되풀이되고 있기 때문이다.
'환율 공황', 이명박 정부의 의도적 작품인가
더 심각한 것은 이같은 사태를 초래하고 있는 것이 단지 이 대통령 주위의 강만수 기획재정부장관 같은 '구시대 관료들'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는 의구심을 품게 만든다는 데 있다.
이 대통령이 정확히 인식하기 시작했듯, 지금 국제금융시장은 공황 전야의 심각한 위기 상황을 맞고 있다. 특히 미국은 사실상 월가가 공황상태에 빠져들었다. 베어스턴스 등 내로라하는 금융기업들이 줄줄이 도산 위기를 맞고 있다. 이보다 더 큰 금융회사들도 정도 차이가 있을뿐, 극한 위기상황에 몰리기란 마찬가지다.
당연히 미국 달러화가 폭락하고 있다. 완전히 휴지값이 되고 있다. 달러 패권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한국이다. 전세계에서 유독 한국만 달러화가 폭락하는 데, 달러화보다 더 폭락하고 있다.
다른 나라들은 자국 통화가 달러화에 비해 강세를 띄면서 국제원자재값 폭등의 충격을 상쇄시키고 있다. 지난해까지는 우리도 그랬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한국은 세계의 '정상 궤도'에서 이탈, 원화가치가 폭락을 거듭하고 있다.
원화값이 속칭 'X값'이 되면 죽어나는 건 대다수 국민과 중소기업들이다. 물가가 폭등하면서 실질소득이 감소하고 그러다보면 내수에 의존하고 있는 대다수 중소기업도 파탄에 몰리게 된다. 반면 수출 의존도가 높은 소수 대기업은 반사이익을 본다. 그만큼 수출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우선 대기업이 잘돼야 중소기업과 국민들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천만의 말씀이다. 대기업의 고용효과는 나날이 줄고 있다. 아직도 국민에게 일거리를 만들어주는 것은 중소기업이고 자영업이다.
지금 금융시장 모두가 "한국이 환투기세력의 공격을 받고 있다"고 아우성이건만 강만수 경제팀만은 "그런 징후는 없다"고 딴청이다. 1997년 IMF사태가 발발하기 전에 재경원이 했던 말이다. 강만수 장관은 당시 재경원 차관이었다. 강 장관 등이 왜 환투기공격을 받고 있는 걸 모르겠나. 12거래일 계속 전세계에서 한국 원화만 'X값'이 돼가고, 17일에는 하루에 원-달러 환율이 40원, 원-엔 환율이 70원이나 폭등하고 있는 데 말이다.
시장은 따라서 강만수 경제팀, 더 나아가선 이 대통령도 이를 '묵인'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대형 시중은행의 임원은 17일 긴급히 전화를 걸어 "시장에서는 새 정부가 일부러 위기를 조장하는 게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돌고 있다"는 음모론을 제기하기까지 했다. 총선을 앞두고 정부가 총선 전략 차원에서 일부러 경기위기를 증폭시키는 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럴 리가 있겠냐"며 크게 야단을 쳤으나, '정말 지금 시장 분위기가 심각하구나'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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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 20일이 반년 같다"고 말하고 있다. 국민이 느끼는 것은 더 길어 보인다. ⓒ연합뉴스 | 국민-중소기업은 포기했나
주가가 폭락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전세계 주가가 폭락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환율이다. 더이상 '나홀로 원화 폭락'을 방치하면 의심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 대통령을 비롯해 강만수 경제팀이 국민과 중소기업을 희생시켜 대기업만 살리려 하는 게 아니냐는 의심이다.
이 대통령의 '대기업 마인드'는 세금 감면혜택의 90%가 대기업에게 돌아가는 법인세 인하를 단행하기로 한 데에서도 드러난 바 있다. 여기에다가 환율정책까지 대기업을 위해 펴려 한다면 이는 한국경제의 근간을 붕괴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이 대통령은 하루바삐 '현대건설 회장'때 마인드에서 벗어나야 한다. 정부가 환율을 휴지값 만들면 대기업들이 미소짓던 시대의 '경험법칙'을 버려야 한다는 얘기다.
우리 국민은 정치만 '전문가'가 아니다. 경제도 전세계 국민중 가장 '전문가' 수준이다. 11년전 IMF사태를 겪었기 때문이다. 집권자나 경제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바로 안다. 국민을 속일 생각을 말아야 한다.
이 대통령은 지금 '생필품 50개' 운운할 때가 아니다. 단 한마디, 분명한 메시지를 시장에 전해야 한다.
"강만수 장관이 말한 6% 성장은 없던 일로 하겠다. 무리한 성장을 절대로 하지 않겠다. 내 뜻에 어긋나는 언행을 하는 각료들은 내일이라도 경질하겠다."
이 대통령의 이런 한마디만이 환투기세력을 겁먹게 할 수 있다. 자칫하다간 독박을 쓰게 되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입'을 주목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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