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화려한 휴가의 제작이 발표되고, 티저포스터를 비롯한 영화의 정보가 조금씩 공개되면서 기대감이 커지는 동시에 불안감도 커졌습니다. 원래 기대가 크면 실망은 배로 온다고 하니 그런 맥락에서의 불안감이었겠죠. 기대 잔뜩 했는데 재미없으면 어떻게 뭐 그런.
연인, 시민군대장, 형제라는 인물 설정은 또한 진부함에 대한 불안감을 자아내게 했습니다. 뻔한 신파조에 괜히 억지로 눈물을 짜내려는 건 아닌지 하는 얕은 비판의식이랄까요. 마치 한국 멜로드라마에서 솔찬히 등장하는, 사실은 이복남매에 여자는 불치병, 뭐 이런 공식이 스쳐 지나가기도 했습니다.
기대감을 잔뜩 품고 영화관에 들어서면서도 마음 한편에는 내심 이런 생각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오냐, 얼마나 잘 만들었는지 보여 봐라’
영화의 시작인 남쪽으로 향하는 군수송기의 장면부터 이어지는 2시간 남짓은 안타깝게 지나가버렸습니다. 정말 안타깝게요.
솔직히 얘기합니다. 영화를 보고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분명히 제가 애초에 품었던 예상대로 영화는 낡은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형제와 친구의 죽음으로 분노하고, 분노는 또 다른 죽음을 낳고, 시작되는 연인은 사랑의 봉우리를 제대로 피워보지도 못한 채 안타깝게 손을 놓습니다.
하지만 그 진부함을 도저히 비판할 수 없는 것은 그 진부함이 굉장히 원초적인 것이기 때문이었죠. 사람의 근원인 측은지심, 수오지심, 시비지심을 건드리는 이야기였기 때문이었죠. 내가 살고 있는 이 나라의 역사, 그 한토막에서 빚어진 끔찍한 일들이 진실의 힘을 빌어 눈앞에 재구성되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영화의 전개는 생각보다 담백합니다. 최대한 정치적인 메시지를 덜어내려는 의도가 보였달까요. 정치적사건에서 정치적 메시지를 빼고 보는 것은 힘들겠지만, 상황에 얽혀 일어나는 사람들의 아픔에 초점을 맞추면서 영화를 최대한 단순하게 끌고 가려는 의지가 보였습니다. 전두환의 빛나는 머리뿐 아니라 그의 이름 세 글자조차도 영화에서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전 장군’정도로만 언급이 되지요.
그럼에도 그런 단순한 신파성 이야기에서 가슴이 들끓는 것은 ‘영화’가 ‘영화’가 아니기 때문일 겁니다. 그 단순한 조각에서 뻗어 나오는 우리 시대의 이야기를, 그들의 후일담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봉건적 위계질서와 휴머니즘
어느 시대이건, 어른을 존중하는 것은 자라나는 세대의 미덕입니다. 저 역시 그런 것을 알고 있고 미래에 들어설 제 자신이 존중받는 것을 원하기에 어른을 존중하려고 노력합니다. 물론 마음만큼 행동이 따라가지는 않지만요.
그런데 그런 게 좀 딱딱하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내가 마주하는 이 사람을 과연 어른으로 존중해도 되는가하는 의문이 들 때 말이죠. 그러면 주먹이 불끈 쥐어지고 화가 납니다. 그러면 어설픈 먹물근성으로 봉건시대의 지배관념인 성리학의 잔재가 나의 행동양식을 억압하는구나하면서 마음속으로 헛소리를 해대지요. 물론 사회생활이라는 명목 하에 그런 생각을 밖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요.
하지만, 화려한 휴가의 배경을 작당한 어르신들께는 그런 속마음을 숨길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위계질서의식보다는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조심스럽게 한마디 해봅니다.
‘전두환, 야 이 개새끼야. 그리고 전두환 밑에 붙어먹은 걸레짝새끼들아.’
2시간 그리고 고맙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부끄럽게도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려버렸습니다. 안구건조증이 있는데다가 엔간한 최루성영화는 심심풀이 땅콩쯤으로 치부해버리는 메마른 감성의 소유자가 저인데 말입니다.
5월 18일부터 열흘간 광주시민들이 마주한 현실은 내가 살고 있는 틈, 어느 한 구석에 대한 시선이 소원해지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내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대신 겪은 그들에 대한 연민으로 눈물이 흘렀습니다.
소소한 일상을 지키고자 하는 작은 몸부림들이 안타까워 눈물이 흘렀습니다.
또한 그런 현실을 만들고도 뻣뻣하게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악한 이들에 대한 분노, 그런 이들과 같은 하늘 아래에서 숨을 쉰다는 부끄러움이 벅차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 모든 진실을 도외시한 채 그 사악한 무리들이 뿌려놓은 씨앗에서 기생하는 인간들이 불쌍하여 눈물이 흘렀습니다.
말초적인 감정, 싸구려 휴머니즘이라도 좋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보고, 한 명이라도 더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혹여 모르는 이들이 있다면 손을 붙잡고 가서 봐야 합니다.
영화는 이요원의 외침으로 막을 내립니다.
‘광주를, 우리를, 잊지 말아주세요.’
네, 잊지 않겠습니다.
당신들이 흘린 피가 제 삶과 제 삶의 터전의 뿌리가 된다는 것을 잊지 않겠습니다.
그날의 총탄에 스러져간 아이의 아버지, 여고생, 동네 아저씨의 억울함과 간절함을 잊지 않겠습니다.
삶의 터전을 지키고자 했던 당신들의 순진한 노력이 역사를 옳은 방향으로 아로새기고 있음을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고맙습니다. 내가 아직 사람을 사랑할 줄 안다는 것을 일깨워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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