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FTA 재협상 타결의 의미는 바로 이거다. 자동차 관세 세이프가드의 발동조건이니, 돼지고기가 냉동이니 냉장이니, 워킹비자 기한이 어쩌니, 하는 다른 모든 것은 이차적인 문제다. 이미 양국간 합의한 사안을, 금융위기와 상하원 물갈이라는 미국 내 경제상황과 정치지형의 변화, 즉 상대국의 국내 정치적 필요에 의해 일방적으로 물린 거라고. 낙장불입, 일수불퇴는 양보해서도, 양보를 요구해서도 안 되는 게임의 펀더멘탈 룰이다. 게임 스코아, 콜드게임인지 아닌지가 문제가 아니란 말이다. 게임의 룰 자체를 망가뜨린 무개념 협상이라고.
그러니 협상의 모양새가 이미 충분히 국제적 병신인증이다. 금번 협상을 두고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은 ‘철저히 경제논리를 따랐고 실리를 확보했다’라는 자평을 내놨다. 저건 뒤집어 말하면 ‘(대신) 원칙과 체면에는 똥칠을 했다’라는 말이잖아. 이미 진 게임이라는 거다.
근데 이게 끝이 아니다.
금번 협상 결과를 두고 오가는 무수한 설왕설래 중에서 ‘조지 워싱턴호 출장비를 준 것,’ ‘돈으로 동맹을 샀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금번 재협상 결과는 ‘한미동맹강화와 안보 강화를 위한 양보’라는 해석이다. 정말 그럴까?
나는 말이야, 후,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이명박 정권이, 안보에 대한 우려 때문에, 한미동맹강화를 위해, 대승적 차원에서, 전략적으로, 양보한 거였으면 좋겠다고. 그 전략적 판단의 시시비비는 둘째치고, 그런 판단이라도 냉정한 머리로 계산해서 한 거였으면 좋겠다. 근데 그다지 그래 보이지가 않는다. 난 금번 재협상 타결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이명박이 대가리로 있는 현재의 대한민국 정권의, 국제 협상력의 총체적 부실을 상징하는 사건이라고 본다. 왜 그런가.
국제 협상은 기본적으로 논리 싸움이다. 힘의 균형? 한국은 그 어느 국가라도 상대의 일방적 요구를 수용해야만 할 정도로 무력하지는 않다. 누군들 그러겠나. 북한도 50년간 개기는데. 대체 한국이 자동차 관세 독소조항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미국이 한미동맹을 철회라도 한단 말인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니, 한미동맹 강화를 위한 양보라는 실드 쳐주지 말 일이다. 그거 취약한 국제협상력을 방어해주는 실드다. 현실은 그것보다 조금 더 시궁창이다.
어느 회사든 업무를 하다보면 상대가 너무나 황당한 요구를 해 오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그럴 때 초보는 당황한다. 상대가 불합리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갑이면 일방적으로 내 입장을 밀어 붙이면 되지만 을이면 일방적으로 따라야 한다. 그리고는 억울해한다. 과거의 한국이다. 초보 단계를 지나면 상대의 입장을 듣는다. 듣다보면 그 요구가 생각만큼 그렇게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다만 입장의 차이가 있을 뿐. 이해관계가 다르고 필요한 것이 다르다. 그런데 사실은 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순간이다. 서로의 입장의 차이를 이해하는 순간, 누구의 논리를 따를 것인지 의사결정을 내려야 한다. 여기서 내 입장을 상대에게 이해시켜야 한다. 내 논리를 견지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협상이란 서로 이해관계가 다른 양자간에 일어나는 일이다. 윈윈이란 건 없다. 내가 가져가는 ‘이’만큼 상대는 ‘해’를 입어야 한다. 이게 기본이다. 그러니 누가 얼마만큼을 가져갈지를, 균등하게 배분해야 한다. 하나 주면 하나 받아 와야 한다. 그 정도의 개념은 누구나 있다. 근데 문제는, 어느 정도가 ‘균등’이냐는 말이다. 여기가 협상의 기술의 핵심이란 말이다. 내가 입을 ‘해’와 상대가 얻을 ‘이’를 최대한 부풀려 보이도록 설득하는, 논리의 싸움. 그리고 금번 협상단은 여기서 완전히 무력했다. 이번 협상은 (한미 FTA 협상 자체에 대한 찬반을 접고 보아도) 실패, 실패다.
협상의 성패의 바로미터는 뭐냐. 협상의 이해당사자인 두 조직 내의 반응이다. 다양한 국내이익집단의 이해관계의 합체가 국제협상에 제대로 반영되었는지는 국내의 반응을 보면 아는거다.
한미 양국의 국내 반응의 대조는 가히 가관이다. 한국은 벌집이라도 쑤신 듯 뒤집어졌다. 협상단은, 그동안 FTA 비준을 위해 내세웠던 ‘자동차 산업 혜택’의 논리까지 스스로 뒤집으며 ‘별다른 영향 없다’고 실드치기에 여념이 없다. 미국 협상단은. 상대 협상단의 비행기가 떨어지기도 기다리지 못해 자랑에 여념이 없다. 오바마 행정부는 중간선거 참패와 지지부진한 경제회복 속에서 상황을 돌파할 치적을 하나 달성했다. 대신 한국에서는 야당이 비준 반대투쟁를 천명했다. 안 봐도 비디오다. 국회 난투극이 다시 한번 CNN 방송 타겠다. 금번 협상이 얼마나 일방적으로 진행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그것보다 좀 더 웃기는 시추에이션은, 협상 당사자들이 ‘미국의 논리’를 가져와서 국민을 설득하려 들고 있다는 거다. 아래는 요즘 국정홍보지라 해도 손색이 없는 연합뉴스의 시론에서 내세운 FTA 비준동의의 논리다.
'득실을 냉정하게 따지자’ ? 미국은 정치적 명분을 얻었고, 한국은 실익을 얻었다. (실제 의미: 미국 애들이 국내 정치상황 때문에 힘들다고 하도 엄살을 떨어서 그런갑다 했다. 한국도 국내 정치상황 때문에 힘들다고 해 봤는데, 걔네가 “느네가 그래도 실익이 있는거야” 하길래, 그게 국내에 먹힐 줄 알았다.)
이익의 균형을 맞췄다. ? 자동차에서 일부 양보가 있었지만, 냉동 돼지고기와 복제의약품 특허 연계 의무에서 균형을 맞췄다. (실제 의미: 자동차 노조가 오바마 정치기반이래잖아,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내줬다. 그나마 달라는대로 다 준거는 아니다. 대신 뭐라도 달라고 해서 준거 받아왔다. 걔들이 그러는데 똔똔이라더라.)
미국 FTA는 어쨌든 필요하다. ? (실제 의미: 걔들이 그러는데 미국 내에서 의회 비준을 할 수 있도록 하려면 우리가 이만큼은 양보해야 한대잖아. 그게 수출기반 경제를 가진 한국에 결국 이익이래나.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이거야말로 협상이 대실패였음을 역설적으로 대변한다. 한국의 이해를 대변해야 할 협상단이, 오히려 미국의 논리에 설복당하고 돌아와 역으로 국민과 야당을 설득하려 들다니. 협상은 반대로 진행되어야 한다. 국민과 야당의 예상 반응이, 미국을 설득하는 논리로 사용되었어야 마땅하단 이야기다. 미국과 협상한 후, 돌아와서 국내를 설득하는 게 아니라, 국내에서 합의 가능한 범주를 먼저 확인한 후, 그걸 기반으로 미국을 설득했어야 한다고. 그게, 협상의 기본이다. 그게, 순서다.
그래서 합의가 안 되면. 그럼 결렬시키는 거다. 그래야 마땅하다. 양보할 수 없는 것까지 양보해 가면서 합의를 서두를 이유가 있는가. 근데 한국은 기어이 결론을 냈다. 왜?
여기에 대한 답은, 딱 하나다. 미국에 질질 끌려 갔다는 것. 중간선거 참패 분위기 쇄신과 경제위기 타파를 위한 breakthrough가 급한 쪽은 미국이었다. 6월 FTA와 관련해 새로운 협상을 시작(initiate)하라고 지시한 쪽은 오바마 대통령이었다. 한국의 입장은 당연히, 일점 일획도 바꿀 수 없다는 쪽이었다. 당연한 것 아닌가.
아래는 3년간 묵었던 FTA협상이 올해 6월 재개된 후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이 각 언론매체와 가진 시기별 인터뷰 내용이다.
“지난달 미국에 다녀왔는데 준비가 안 돼 있었습니다…비준을 빨리 하라고 독촉할 필요도 없고…오바마 대통령이 한다고 했으니 믿고…저쪽에 맡겨놓는 게 좋을 것 같다는 판단입니다.” ( 6월 13일, 서울경제)
김 본부장은 이날 인터뷰에서 한·미 FTA 협정문 개정 가능성을 일축했다. 그는 미국쪽이 제기하는 일부 자동차조항에 대한 불만에 관해 “미국쪽에서 배리어(장벽)가 있다고 하는데 단순히 차가 덜 팔리는 자체를 이야기하는 것은 수용할 수 없다”며 “양국간에 하려는 것이 자유무역이지 관리무역은 아니다”고 못박았다. (7월 14일, 문화일보)
“아직 양국 간 문서를 갖고 공식 실무협의를 시작한 적이 없다… 내년에는 진전된 얘기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우리 정부의 입장은 재협상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10월 3일, 파이낸셜 뉴스)
김 본부장이 10일 밤 청와대를 방문해 이명박 대통령에게 “아무래도 이 상태로 타결하는 것은 무리”라고 보고했고 이 대통령이 “그런 상황이면 굳이 이번에 할 필요 없다”고 수용… (11월 14일, 동아일보)
그랬다. 11월 초, G20 정상회의 직후에만 해도, 의견차가 워낙 극명해서 도저히 협상 수용이 불가능한 상태였던 거다. 미국에서 개정을 요구한 사안은 크게 두 가지. 자동차와 쇠고기였고, 쇠고기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FTA 협상 대상이 아니다’였다. 이 조건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니 자동차 부문에 대한 미국의 입장이, 이 때만 해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수준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걸 불과 20일만에 씹어 삼킨거다.
“미국이 자동차 부문을 워낙 주장해 별 수 없었다” (12월 4일, 협상 타결 후)
미국 내에서의 분위기는 야당인 공화당과 노동계를 통틀어 열광하거나, 우호적이거나, 최악의 경우 마지못해 승인(grudgingly agree)하는 분위기다. 이 극명하게 갈리는 반응이 한국 협상단도 민망했던지, 국정홍보지 연합뉴스를 시켜 ‘한미 FTA 추가협상에 美서도 불만 목소리’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낸다.
“미 의회의 FTA 이행법안 논의 시 상원의 관문 역할을 하게될 상원 재무위원회의 맥스 보커스(민주.몬태나) 위원장은 30개월령 이상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을 한국이 계속 제한할 경우, 한미FTA의 상원비준을 반대하겠다는 입장을 시사했다고 미 ABC방송이 4일 보도했다.” 란다.
맥스 보커스는 목축업 지역인 몬태나를 정치기반으로 둔, 쇠고기 수출을 키 어젠다로 둔 정치인이다. 기존 FTA 협상 회담장에서 미국산 쇠고기 스테이크를 먹으며 한국어로 '맛있습니다' 하는 쇼를 연출한 이력이 있다. 그는 미국 내에서 소고기와 관련해서 가장 공세적인 입장을 표명해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미 개방할 대로 개방한 소고기 시장에 대해, 30개월 이상 월령의 소까지 수입하라며 어거지 공세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이걸 막아낸 것이 그나마 내세울 치적이니, 금번 협상은 시계와 지갑 내주고 옷까지 뺏기고 알몸으로 돌아온 협상임을 부끄럽게도 실감한다.
이쯤 되면, 나는 간절히 바라게 된다. 금번 협상이, 아무리 겉보기에는 실패일지라도, 전략적 선택에 의한 것이었기를. 연평도 해전 후 합동훈련 상황에서 한미동맹 강화를 위한 포석이었든, 재벌님들 위하는 게 결국 한국 경제를 위하는 길이라 믿었든, 고장난 계산기든 뭐든 냉철히 계산기 때려본 후, 한국에 이익이 될 거라 믿고 저지른 짓이었으면 좋겠다는 거다. 계산에 착오가 있었더라도 적어도 계산기는 때려 봤어야 한다는 거다.
한미 FTA가 한국민의 생활에 차후 미치게 될 영향은 지대하다. 국민의 이익은 반드시 치열하게 방어되어야 한다. 미국이 국제 협상의 기본 룰을 어겨 가면서까지 매달릴 때에는, 상황을 어쩔 수 없었더라면 다른 거라도 제대로 얻어 왔어야 한다는 거다. 한 조항 한 조항이 수많은 사람들의 생계를 망가뜨릴 수 있다. 협상단은 이를 치열하게 고려는 해 본 것인가. 최선을 다해 방어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다 못해 이명박은 본인과 여당이 지게 될 정치적 리스크에 대한 계산이라도 제대로 때려 본 것인가. 한국이 협상에서 주도권을 장악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의 주체성은 유지했었나. 그것도 아닌 것 같다는 게 문제다. 이 무능의 수준은 분노를 넘어 무서운 일이다. 안개 속을 헤매는 조난된 배. 2년 후, 우리는 키를 되찾을 수 있을까.
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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