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 장군
전쟁은 소강이었다. 영남 해안지대에 웅크린 왜군은 임진년의 기세는 꺾인지 오래였지만 고슴도치같이 가시를 세우고 있었고, 명나라 군대는 전쟁에 넌더리를 내서 싸움을 피해 다녔다. 복수심이야 하늘을 뒤덮고도 다섯 자가 남았지만 복수심보다 더 무섭고 흉악한 배고픔에 직면해 있던 조선은 말로는 피의 응징을 떠들었지만 혼자서 일본군을 어째 볼 능력은 없었고, 그나마 작전지휘권은 명나라 장수들이 쥐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지는 않았으되 1593년의 진주성 함락 이후에 큰 전투는 없었고, 불안한 평온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황제와 일본의 관백을 동시에 속이려던 심유경의 사기극이 폭로되면서 전쟁의 구름은 다시 동북아시아를 뒤덮기 시작한다.
심유경과 함께 일본에 갔던 황신은 장계를 통해 재침이 이뤄질 것이고 그 목표는 전라도라는 것까지 고했다. 전쟁 초에 일본군이 이루지 못한 수륙병진을 완벽하게 벌여 보겠다는 구상이라는 것이다. 그 긴박한 상황에 조선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실로 관운장의 청룡도 같고, 조자룡의 장창같은 존재가 있었다. 바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었다.
임진년 전국을 바꾸는 결정적인 역할을 해 냈고, 그 뒤로도 천하의 풍신수길이 "만나면 도망쳐라."는 굴욕적인 명령을 내리게 만들었던 무적함대가 며칠 뱃길이면 부산 앞바다가 눈에 보일 한산도에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 조정도 수군은 철썩같이 믿었다. 하지만 옥돌로 만든 바둑알도 아이 손에 들어가면 알까기 알이 되는 법이다. 전쟁이 일어날 낌새가 보였을 때 조정 대신들이 하는 말을 들으면 수군은 이기는 게 당연한 존재였다.
뛰어난 식견과 진중한 성격으로 이름 높았던 한음 이덕형의 말을 들어 보자.
"수전이 상책이고, 그 다음이 산성을 지키는 것이니 수군으로 하여금 그 오는 길을 막게 하소서."
한음 이덕형 초상
말은 쉬웠다. 180 여 척의 대함대를 보유한 조선 수군이 거제도를 돌아 부산 앞바다에서 버틴다면 왜군이 날개가 돋지 않고서야 어찌 조선 땅을 밟을 것이며, 싸우면 당연히 이기는 조선 수군의 공격에 고기밥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서울에 앉아서 평생 창 한 번 쥐어 본 적 없는 선비들의 열변은 그야말로 거침이 없었다.
거기다가 자기들끼리 사이가 견원지간인 일본군 장수들 가운데 하나가 슬쩍 "어 웬수같은 가등청정이가 모월 모일 서생포로 간는데 우... 조선 수군도 없고... 우.... 이순신도 없고..." 하는 식의 귀띔을 전하자 조선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그 귀띔이 일종의 반간계였는지, 진실로 가등청정을 죽이려고 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왕자들까지 사로잡고 두만강까지 올라가 설쳤던 멧돼지같은 장수 가등청정을 잡을 수 있다는데, 그것도 싸우면 무조건 이기는 수군이 조금만 움직이면 되는데, 가만히 있는 것은 출세에 지장이 있었다.
"부산포를 칠 수는 없겠는가. 안되면 봉쇄라도 안되겠는가."
조정의 공론은 들끓었고, 다급해진 권율은 한산도로 말을 달렸다. 하지만 이순신은 신중했다. 소금 굽고, 고철 줍고, 피난민들에게 쌀 거둬 가며 마련한 그야말로 살덩이같은 함대다. 아무리 이쪽하고 짝짜꿍이 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일본군이 드글거리는 부산 앞바다에서 "수군을 정비하여 기다리다가 바다에서 공격하여 가등청정을 죽이"라는 일본군의 속삭임을 듣고 움직인다는 것은 너무도 위험한 일이었다. 이순신이 우물쭈물하는 사이 가등청정은 서생포에 상륙해 버렸다. 그리고 참으로 운 나쁘게도 이순신의 보고가 허위로 판명되는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다. 부하의 허위 보고를 그대로 조정에 올려 버린 이순신의 실수였다.
난리가 났다. 가스통은 없는 시대였으니 망정이지 가스통을 머리에 이고 허리에 매고 가랑이에 끼고 시위할 기세로 타도 이순신의 기치가 휘날렸다. 그 선봉에는 평생 배라고는 피난갈 때 임진강을 건널 때 처음 타 보았음직한 선조가 섰다.
"한산도의 장수는 편안히 누워서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모른다. 우리나라는 끝났다."
공화국이라면 해임되고 끝나겠지만 왕국에서 이런 말 듣고 살아남을 군인은 드물다. "지금 가등청정의 목을 베어 와도 용서할 수 없다." 그렇게 삼엄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엄정할 수가 없었다. 칠천의 하나로 천대받던 수병들이 얼마나 노를 저어야 부산 앞바다에 이를 수 있는지, 그들이 먹을 물은 어디서 구할 것인지, 짐승같은 수고로움으로 이순신과 남해안 백성들이 길러온 함대가 자칫 무슨 꼴을 당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은 선조의 뇌리에 근접할 수조차 없었다.
그저 열받는 것이다. 조금만 움직이면 가등청정의 목을 굴리며 놀 수 있는데 그걸 안한 것이다. 박성같은 사람은 "당장 참형에 처하라."고 기염을 토했다. 가등청정 얘기가 나왔을 때부터 가장 열렬히 피를 토했던 것은 전라병사 원균이었다.
후대에 그려진 원균 초상
"가벼운 배로 삼삼오오 영도 앞바다에서 시위하고, 2백척 배로 대해에서 위엄을 보이면 가등청정은 돌아갈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이 용장은 이렇게 말한다. "이건 제가 쉽게 말하는 게 아닙니다. 전 바다를 지켜봐서 익히 알고 있습니다. 감히 침묵을 지키지 못하여 아뢰는 것입니다." 이건 대놓고 이순신을 헐뜯는 소리였다. 그리고 이순신을 잡는 사람에게 명분을 주는 말이었다.
수사(水使)였던 인간이 된다는데 왜 다른 수사는 못한다고 발을 빼는가 말이다. 이런 겁쟁이, 군인도 아닌 군인, 군인이 전쟁이 두려워서야 무엇을 하겠는가, 내가 날뛰어도 네가 말려야지, 내가 날뛰는데 네가 신중한 게 될 일이냐. 등등과 유사한 말 말 말이 조선 조정을 수놓았고, 마침내 이순신은 죽어도 아쉬울 것이 없는 죄인으로 끌려와 매타작을 받게 된다.
그 후임자는 원균이었다. 삼도수군통제사. 그는 역시 호전적인 장수였다. 통제사 임명장에 인주도 마르기 전에 그는 일본군 머리 수십 개를 도성에 실어보냈다. 그런데 이 머리들의 임자는 조선군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거제도에 나무하러 왔던 병사들이었다. "도대체 땔감 장만하러 온 배를 잡아서 뭘 하겠다고 조선은 왜 이러는 건가. 댓가를 치러 주겠다." 항의하러 온 일본군 장수의 전갈이었다. 뭔가 분위기는 달라지고 있었다.
정유재란이 가시화할 무렵 도원수 권율은 원균이 했던 말과 똑같은 전략 구상을 보고한다. "거제도의 옥포 등에 진주하여 부산과 대마도 뱃길을 감시하고 차단하며, 영도 앞바다에 연속부절로 출몰토록 하면 적의 형세는 머리와 꼬리가 잘린 형국이 될 것입니다." 멋진 말이었다. 까짓거 사람이 죽더라도 3일만 버티면 전쟁에 이길 수 있다는 먼 훗날의 손 흰 글쟁이의 포스에 비견되는 원대한 구상이었다. 이왕 시작하는 전쟁, 우리가 기세를 제압하면 될 것이고 수군은 가서 노 저으며 뱃놀이만 하면 일본군은 어마 무서워 대마도에서 발 묶일 것이고, 차제에 식량까지 끊으면 부산에 아장아장거리는 일본군들을 굶겨 죽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일을 하라고 임명한 장군이 원균이었다. 하지만 원균은 그것이 자기 뿐 아닌 조선 함대의 무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권율은 추상같이 독촉해 대는 가운데 원균은 엉뚱한 소리를 한다. "30만 정병을 동원하여 수륙 양면으로 공격, 결판을 내야 합니다." 글로야 백만 대군인들 못지어낼까만, 바로 한 해 전에 거제도 공격 작전을 세우면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을 탈탈 모은 결과가 2만이 갓 넘었던 나라에서 30만 대군은 보온병으로 포탄 만드는 소리였다.
원균도 하기 싫었던 것이다. 이 원균의 심경은 족히 짐작이 간다. 가등청정이 건너올 시간까지 전해 주는 마당에 신중을 기하겠다고 한산도에서 자빠져 잤던 이순신에게 분통을 터뜨린 것이 자신이었다. 왜 저걸 보고만 있느냐고 주먹이 깨지도록 땅을 치고, "감히 침묵을 지키지 못해" 아뢰며 "쉽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저는 척 보면 압니다."라고 부르짖었던 그가 아니었던가. 유식한 말로 Anything But 이순신으로. 이순신이 하는 꼬라지는 도통 성에 차지 않았던 그가 아니었던가.
일본군은 속속 상륙하는데 자기가 한 말은 있고, 권율은 자기가 광분하여 보낸 상소를 꺼내 보이며 너 왜 한 입으로 두 말하냐고 따지고, 못먹어도 고 했다가는 떼죽음이 보였다. 원균은 저돌적인 사람이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때 불타 없어진 경복궁 벙커 대신 임시 벙커에서 작전을 지휘하던 선조가 준엄한 소리를 한다. "나라에는 법이 있고, 사사로이 나도 널 용서하지 않을 거다." 그리고 권율은 세상에 통제사를 불러서 곤장을 친다. 싸우러 나갈래? 나한테 죽을래? 여기서 원균이 정말로 용기있는 사람이었다면 자신의 오류를 소리 높여 고백하고 부산으로 항진하는 것은 사지임을, 승리하더라도 상처 뿐일 수 있음을 간언했을 것이다.
그러나 원균은 그래서 원균이었다. 그는 용기를 다른 쪽으로 발휘했다. 더 이상은 못참는다는 막가파의 용기. 그리고 혹시 이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무모한 용기. 또 그리고 될대로 되라는 자포자기의 용기.
주력 판옥선과 협선, 포작선까지 400척이 넘는 대함대가 부산으로 항진했다. 이순신이 출전한 최대 함대 규모가 부산포 해전 때의 160척이었으니 그에 비해 무려 2.5배에 가까운 막강 함대가 총동원된 것이다. 조선 수군의 전부였고, 조선의 전부였다. 피땀 흘려 쌓아 올린 조선군의 비장의 무기였다. 장관이었다. 일본군같은 거 그 함대의 노젓는 물살에 다 쓸려 나갈 것 같았다. 그러나 옥포에서도 안골포에서도 적정을 만나지 못한 원균의 함대는 힘은 힘대로 쓰고 적은 하나도 잡지 못한 채 기진맥진해서 칠천량 바다로 물러났고, 거기서 재앙같은 전멸을 당한다.
칠천량 해전
임진년 이후 뼈를 깎고 살을 갈고 수천 명의 목숨을 바쳐 가며 세운 함대는 하룻밤의 불쏘시개로 탕진된 후 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늙고 살이 쪄서 빨리 뛰지 못한 원균"은 "웃통을 벗고 칼을 짚은 채" 소나무 아래에 우뚝 앉아 있다가 "왜놈 6~7 명이 칼을 휘두르며 그 앞으로 다가서는 것"을 마지막으로 세상에서 사라졌다.
이 이야기에 발끈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럼 이순신이 김대중 (또는 노무현)이냐?"라고 팔뚝부터 걷어붙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비유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순신은 김대중이 아니고 원균은 가카가 아니고 선조도 아니다.
단지 입으로 전쟁을 하는 무리들, 전쟁의 결과에는 관심이 있되 과정에는 깡그리 관심이 없는 종자들, 그리고 그들의 등에 떠밀린 미욱한 군인들이 어떤 참화를 낳았는지를 한 번 되짚어 보자는 것이 내 뜻일 뿐이다.
명분은 언제나 넘쳐났다. 선조는 누가 화평 운운하느냐면서 화평 주장하는 자의 목을 벤 뒤에 나에게 알리라고 어탁을 쳤다. 군부의 원수, 백성의 적을 어찌 살려 보낼 수 있겠느냐면서 기염을 토하는 강경파들은 대개 전장의 장수들이 아니었다. 칼집이라도 잡아 본 자들이 아니었고, 먼발치에서라도 왜군을 본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의 자식이 군대에 나설리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입으로 하는 발길질에 엉덩이가 차여 가며 전장에 나섰다가 그야말로 떼죽음을 당한 이들의 원혼은 우리 역사에 한없이 많다. 은하수의 별처럼 지천이다.
이미 미치광이 양아치가 되어 버린 북한에 대해 분노하는 것과, 그들을 관리하고 달래 가며 평화를 유지하고 나아가 그들로 하여금 변화의 길을 모색하게 하여 주는 것은 다른 차원의 것이 아니다. 연평도의 포탄은 북한의 정체를 까발림과 더불어, 북한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존재인지를 보여 주고 있다.
연평도 포격 화염
"그러게 왜 훈련을 해서 우리 장군님의 심기를 건드리셨어?"하는 소리는 개소리로 치부하여도 무방하지만, 화약 지고 손에 관솔불 든 놈에게 "불 붙이려면 붙여 봐. 임마. 너는 그 전에 죽어"라고 놀려 대거나 "3일만 참으면 되니까 까짓거 한 번 지르자."고 양아치처럼 웃통을 벗는 것 역시 개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아니 개에게 미안하다. 하물며 웃통 벗는 것도, 불타는 것도, 아픈 것도 자신들의 몫이 아닌 자들이 내지르는 소리라면 그건 개도 거품을 물며 분노할 망발이 아니겠는가.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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