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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일 오후, 그간 지지부진하던 한국철도공사(코레일) 사장 공모에 한나라당 소속 허준영 전 경찰청장(사진)이 유력한 후보로 떠오르면서 코레일이 다시 ‘낙하산 논란’ 소용돌이에 빠져들고 있다. 사실 코레일은 전임 강경호 사장의 구속으로 공석이 된 지 3개월이 지났지만 최근까지도 후임자를 찾지 못한 상황이었다. 지난해 12월 실시한 1차 공모에서는 저조한 경쟁률 끝에 적임자를 찾지 못했고 최근 마감한 재공모에서도 물밑에서 ‘내정설’ 등 잡음이 들리던 와중에 허 전 청장이 수면 위로 불쑥 올라온 것이다.
지난해 11월 코레일은 충격에 휩싸였다. “국민에게 사랑받는 위대한 코레일 시대를 열겠다”던 강경호 당시 사장이 취임 5개월 만에 강원랜드 임원으로부터 수천만 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기 때문. 이명박 대통령의 측근 중 한 명이던 강 전 사장은 낙하산 논란 속에 어렵게 취임했지만 결국 중도하차하고 말았다. 코레일 내부 분위기도 가라앉았다. 코레일의 한 직원은 “그렇지 않아도 방만 운영으로 국민들의 시선이 따가운 판에 사장 구속까지 겹쳐 흉흉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코레일은 심혁윤 부사장을 사장 직무대행으로 임명하고 12월 11일부터 24일까지 신임 사장 공모를 실시했다. 공모 결과가 신통치 않았다는 게 코레일 관계자들의 공통된 전언이다. 신청서를 낸 지원자 수는 총 5명. 보통 공기업 사장 공모에 10명이 넘게 몰리는 것에 비추어봤을 때 다소 의외라는 평가였다. 더군다나 코레일은 공기업 순위에서도 5위(자산총액 기준)를 차지할 정도로 규모가 큰 곳이다. 실제로 지난해 4월 치러진 사장 공모에서는 12명이 지원한 바 있다.
질적인 면에서도 코레일을 만족시킨 인물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원자들을 심사해 최종 후보자를 추천하게 될 코레일 임원추천위원회 관계자는 “5명의 후보를 대상으로 12월 30일 1차 심사를 벌였으나 2010년에 영업적자를 50% 수준으로 축소하고 2012년엔 흑자로 전환시켜야 할 막중한 역할을 맡을 코레일 사장직에 적합한 인물이 없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이처럼 코레일 사장 공모에 대한 반응이 시들했던 것에 대해선 여러 해석이 나오고 있다. 우선 ‘잘 해봐야 본전이라는 시각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강 전 사장의 뒤를 잇게 될 코레일 4대 사장은 정부의 공기업 선진화방안에 따라 2012년까지 정원의 15%가량인 5115명을 감원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전국철도노동조합(노조·위원장 임도창)과의 마찰도 예상된다. 또한 코레일은 2010년까지 적자 폭을 절반 수준으로 줄이지 못하면 민영화 검토 대상에 오르게 된다. 현재 코레일의 적자는 6000억 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년도 채 안 되는 기간에 목표치에 도달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는 게 지배적인 관측. 신임 코레일 사장 자리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도 이 때문인 듯하다.
그동안 코레일 사장 자리에 정권 실세들이 임명됐던 것도 공모 실패의 원인 중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지난 2005년 1월 철도청에서 공기업으로 전환한 코레일은 신광순 초대 사장만 내부 승진을 했을 뿐 2대(이철 전 국회의원)와 3대(강경호 전 서울메트로 사장) 사장 모두 당시 대통령 측근들로 평가받던 인사들이었다. 첫 사장 공모에서 내정설이 나돌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저조한 경쟁률을 기록했던 것도 후보로 거론되던 몇몇 인사가 지레 포기했기 때문이라는 것. 결국 코레일은 지난 2월 4일부터 10일까지 재공모를 실시했다. 이번에는 12명의 지원자가 신청서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가운데 1차 공모 지원자는 한 명도 없다고 한다. 코레일 관계자는 “명단을 공개할 수는 없지만 처음에 비해 인지도나 실력 면에서 뛰어난 후보자들이 몰렸다”고 전했다. 코레일에 따르면 늦어도 3월 중순까지는 새로운 사장이 임명될 것이라고 한다.
지난 2월 19일 임원추천위원회는 심사를 마치고 공모에 응한 12명 중 5명을 공공기관운영위원회에 추천할 후보로 선정했다. 후보 명단엔 허준영 전 경찰청장, 채남희·송달호 전 철도기술연구원장, 박광석 전 코레일 부사장, 김선호 전 철도청 차량본부장 등이 올라간 것으로 전해졌다. 코레일 주변에서는 허 전 청장이 영순위라고 알려져 있다.
대구 출신인 허 전 청장은 2005년 세계무역기구와의 쌀 협상에 반대하던 시위대를 경찰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농민이 사망한 사고에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이후 한나라당에 입당해 2007년 7·26 보선과 2008년 4·9 총선에 도전했지만 공천조차 받지 못했다. 지난 대선에서는 이명박 대통령 후보 선거캠프에서 공동 행정자치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당초 코레일 사장엔 음성직 현 도시철도공사 사장이 강력한 후보로 거론됐었다. 음 사장은 구속된 강 전 사장과 마찬가지로 이 대통령의 서울시장 재직 당시 같이 일했던 소위 ‘S라인’으로 분류되는 인물. 그러나 코레일 내부의 반대가 워낙 심한 데다 음 사장 역시 아직 임기가 남아 있어 막판에 허 전 청장에게로 무게가 쏠렸다는 후문이다.
지금 코레일 내부는 침통해 보인다. “국민들의 생활과 밀접한 코레일 사장 자리가 철도와는 아무런 관계없는 인사로 정해지는 것에 반대한다”는 반응이 지배적인 것. 한 노조 관계자는 “허 전 청장이 올 경우 노사관계가 악화될 것이 분명하다. 공기업 역사상 최악의 낙하산 인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일각에선 “어차피 누가 되든 상관없지 않느냐. 정권 실세가 와서 외풍을 막아주는 것이 낫다는 생각도 든다”는 목소리도 들린다.
사실 최근 단행된 코레일 계열사들의 대표 선임을 보면 이러한 낙하산 인사를 어느 정도 예견할 수 있다. 코레일은 지난 2월 5일 코레일유통의 대표에 이학봉 전 화신폴리텍 사장을 임명했다. 경북 포항 출신인 이 대표는 지난 2007년 이명박 대통령 후보의 정책특보 겸 후원회 부회장을, 2008년엔 한나라당 서울시당 부위원장을 맡았다. 철도 관련 IT업무를 담당하는 코레일네트웍스 대표엔 지난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한 바 있는 이가연 씨가 임명됐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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