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enjournal아가리

최 장집은 인터넷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할 마음 자세가 되어있지 않다.지성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경희330 2008. 7. 12. 00:45

‘대의제가 민주주의 전부 아니다’

최장집이 고별강의를 했다. 신문들은 이런 제목을 뽑았다. ‘운동의 정치화, 현실 대안 될 수 없어’(문화일보) ‘촛불집회, 정권퇴진 요구 바람직하지 않다’(중앙일보) ‘사회 현안마다 촛불 들 수 없어’(조선일보)

‘의견 다른 타자와 타협할 수 있어야’(동아일보) ‘제도권 밖 운동보다 정당정치 복원이 중요’(한국일보) ‘민주주의는 대의제, '정권퇴진' 구호는 잘못’(오마이뉴스) 과연 진실은 어디에 있을까? 나는 관심없다.

그는 촛불을 위하여 쓸모있는 말 한 마디를 던져주지 못했다. 막힌 것을 뚫고, 새 길을 열고, 가득한 안개 걷힌 후 찬란한 태양을 드러내게 하는 속시원한 한 마디를 그는 끝내 던져주지 못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중학생도 아는 거다. 교과서적인 발언이다. 모범답안이다. 과연 범생이다. 그러나 ‘그래도 최장집이 뒤에 버티고 있어주니까 촛불이 폭주하지는 않겠지.’ 하는 정도로 국민을 안심시키는 발언을 했다.  

그렇다. 그 역시 역할극에 사로잡힌 한 명의 먹물에 불과했다. 그에게서 지성의 면모를 찾아볼 수 없다. 잘 생긴 얼굴 외에는 봐줄만한 대목이 없다. 이 땅에서 단 한 명의 진짜 스승을 발견하지 못한 나의 슬픔은 그대로다.

그는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자기 역할 정도는 해낸 사람이다. 그리고 그런 역할들이 사회에 신뢰를 줄 수 있다. 원로가 하는 역할이다. 그 역시 원로가 된 것이다. 갈등이 첨예해졌을 때 중재자 역할 정도는 할 수 있다. 초라하다.

과연 최장집이 자칭원로 김동길, 김수환, 박홍들 보다 나을까? 기네스북의 김동길, 명동성당의 김수환, 막걸리 박홍들.. 지금은 똥이 되었지만 그들도 한 때는 전성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믿기지 않겠지만 그때 꽤 잘나갔다.

최 장집은 인터넷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할 마음 자세가 되어있지 않다. 지성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민중을 믿을 수 있어야 지성인이다. 그에게 민중은 여전히 계몽의 대상이다. 백범에게 있고 노무현에게 있는 그 무엇이 그에게는 없다.

진보란 무엇인가? 나는 역사의 발전법칙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먹물들은 다르다. 그들에게 있어서 진보는 지식의 지배다. 자기네들이 해먹는 것이 진보다. 문제는 그들이 현실을 너무 모른다는데 있다.

전공분야를 알 뿐 시시각각 변해가는 시대의 흐름에 무지하다. 인터넷 혁명에 대해 무지하다. 냉전붕괴 이후 일어난 산업사회의 재편에 대해 무지하다. 그들의 전술에는 단지 방어가 있을 뿐 공격이 없다.

변화하는 국제경제환경에서 최고의 전략은 선점이다. 그들은 인터넷에 대해서도 글로벌 경제환경의 변화에 대해서도 선점의 전략이 없다. 노무현에게는 그것이 있는데 먹물들에게는 그것이 없다.

나는 지식의 지배를 반대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지성의 정치다. 지성의 정치는 한 마디로 개입의 최소화다. 나는 천상 자유주의자다. 철저한 개인주의자다. 개인이 각자 깨어날 때 지식의 개입은 최소화 될 수 있다.

오늘날 지식의 병폐는 전방위로 개입하려는데 있다. 시시콜콜 잔소리 하는데 있다. 성매매나 환경문제를 비롯한 정당한 개입도 있고 사업가 심형래씨의 개인적인 돈벌이에 딴죽을 거는 과도한 개입도 있다.  

먹물들이 심형래를 어떻게 대접하는지를 보고 대중은 지식이 시민을 어떻게 대접하는가를 판단하는 바로미터로 삼는다. 그 지점에서 진중권들은 딴나라당에 백 만표를 몰아준 것이다. 과도한 개입이다. 지들이 왜 나서냐고?

지성과 지식의 차이는 거기에 있다. 지식은 조직을 위주로 계몽하고 학습하려 한다. 그렇게 길들여서 개인을 약하게 만든다. 지성은 개인을 위주로 각성시키려 한다. 자각하게 한다. 개인이 강해지게 한다.

지성은 지식의 개입없이 저절로 돌아가는 사회를 건설하는데 목적을 둔다. 지식은 자기네들이 시시콜콜 코치하며 군림하는 사회를 목표로 한다. 밤중에 남의 침실까지 엿보고 ‘어허! 그건 그렇게 하는게 아녀!’ 하고 훈수두려 한다.

최장집의 결론은 결국 ‘정당정치에 맡겨라’ 이거다. 나는 믿지 않는다. 한국은 서구와 다르다. 한국의 통불교 전통만 해도 그렇다. 정혜쌍수에 교관겸수다. 항상 양자를 겸하고 쌍으로 간다. 승자의 독식은 허용되지 않는다.

한국인은 천상 유교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때문에 한국에서 서구식 정당정치는 실패다. 일본만 해도 그렇다. 정당이 역할하고 있는가? 정권교체가 되고 있는가? 분명히 이유가 있다. 그럴만한 배경이 있다.

중국만 해도 그렇다. 세계 도처에서 사라진 사회주의가 중국과 북한에서 왜 건재한가? 그것은 바탕이 사회주의가 아니라 유교주의이기 때문이다. 내걸은 이름이 사회주의일 뿐 시스템의 본질은 유교정서다.

후진따오는 아빠다. 원자바오는 엄마다. 엄마니까 운다. 지진이 일어난 쓰촨성을 찾아가서 운다. 울면 된다. 한 방으로 즉효다. 마술도 이런 마술이 없다. 서구의 사회과학이론으로 중국사회의 변혁을 논해봤자 실패다. 맞지 않는다.

미국이 특히 유럽과 달리 이념적 색채가 약한 중도정당의 지배로 된 것은 미국이 섬처럼 고립된 일면이 있기 때문이다. 고립되면 중도화 된다. 필연적으로 그렇게 된다. 백프로 독점은 없다. 독식하려다가는 부시 꼴 난다.

일본도 그렇다. 자민당이 우파정권이지만 특히 농민과 하층민의 지지를 얻는데 힘썼다. 분배를 중요시하는 정책을 썼다. 일본은 시골마을에도 거대한 체육관이 있다고 한다. 개인의 사유재산보다 국가의 공유자산을 중요시 한다.  

미국과 일본의 이러한 사정은 서구의 사회과학이론으로 해명할 수 없는 것이다. 진보와 보수가 딱 갈라지지 않고 역할분담으로 간다. 한국에서 문화분야는 진보, 경제분야는 중도로 가는 정책이 적절한 역할분담이 된다.

DJ와 노무현의 10년은 연합정권이었다. 좌우합작을 한 것이다. DJ는 자민련과 합작했고 노무현도 이헌재, 진대제 등 보수인물들에게 경제를 맡겼다. 이상적인 조합은 아니지만 고립된 나라들은 필연적으로 이렇게 된다.

나는 한국의 정당정치가 백년 후에도 지금과 별반 달라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백년 후에도 바른 대통령이 나오면 여당을 식물화 시켜놓고 대통령이 대중과 직접 소통하는 노무현의 방법을 쓸 것이다.

백년 후에도 명박스런 대통령이 나오면 여야가 단체로 식물화 된 상태에서 대통령이 시민과 직접 대치하는 꼴사나운 상태가 재연될 것이다. 시민은 일정한 정치적 지분을 가지고 발언할 것이다. 나는 일관되게 시민을 옹호한다.

나는 열린우리당이 해체된 데 대해 실망하지 않는다. 기대에 미치지 못했지만 적절히 치고 빠졌다고 생각한다. 유시민의 개혁당도 마찬가지다. 집권이 목표라면 실패지만 대한민국을 바꾸는게 목표라면 실패가 아니다.

나는 오히려 열린우리당의 공백이 이번에 촛불의 성공으로 불타오른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왜인가? 가장 격렬한 이명박 반대자는 대선과정에서 가장 크게 상처입은 사람들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좌파도 민주당도 상처입지 않았다. 그들은 지난 5년간 조중동의 포격권 밖에 있었다. 그들은 당해보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분노가 없다. 가장 많이 공격당하고 가슴 밑바닥에 한을 품은 자들이 누구인가?

결론은 노무현 패러다임과 이명박 패러다임의 충돌이다. 가치관의 충돌이다. 대선 때 투표하지 않은 사람들이 발언권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 촛불의 핵심이다. 이들이 산개해 있다가 결정적 시기에 인물을 중심으로 응집할 것이다.

그 인물은 지성인이어야 한다. 민중의 마음과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들이 가진 역량의 최대한을 끌어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정당정치에 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대의정치의 비중은 감소한다. 변화는 시작되었다.

www.drkimz.com.


원문 주소 -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seoprise_11&uid=1252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