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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 정점과 에너지 문제는 인류가 이 위기를 극복하고 나아갈 만큼 성숙해 있는지,거대한 시험장이다

이경희330 2008. 7. 25. 00:53

인류는 엄청난 양의 석유와 화석 연료를 지난 100여 년간 사용해왔다. 그 양과 낮은 가격은 값싼 에너지와 동력을 가능케 함으로서 현대 문명을 지금의 모습으로 키우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 결과 인류는 석유에 중독되었고, 석유가 갑작스레 줄어드는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아무런 힘도 갖지 못하게 되었다.

한 마디로 지금의 인류 문명은 고작 100여 년간 뽑아낸 석유가 빚어낸 ‘거품 문명’ 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그 거품은 석유 정점을 맞으면 급속하게 붕괴하기 시작할 것이다. 자본주의 원칙에 지나치게 충실한 기업과 근시안적인 정부들은 값싼 석유에 눈이 멀어 거의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고 있었고, 석유 정점의 개념 자체마저 부인하기 바빴다. 대부분의 국책 기관들이나 기업 연구소들은 석유가 비싸야 60달러 선에서 2020년경까지 안정될 거라고 바로 1,2년 전까지도 주장했었다.

그러나 바로 며칠 전, 대한민국 정부는 현재의 상황이 사실상 ‘3차 오일 쇼크’ 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그냥 오일 쇼크마저도 아니다. 70년대에 두 번에 걸쳐 찾아온 오일 쇼크는 아주 명확한 원인이 있었다. 1차 오일 쇼크는 아랍과 이스라엘간의 전쟁에 영향을 받은 것이고, 2차 오일 쇼크는 석유수출국기구 OPEC이 대놓고 유가 인상을 선언하고 이어 이란의 회교 혁명으로 인한 석유 수출 중단이라는 구체적인 상황들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경우는 초고유가 현상의 이유가 그때보다 훨씬 불확실하다. 투기 자본, 달러화 가치 하락, 오펙의 고유가 정책 등등 많은 주장이 나오지만 어느 하나 명백하지 않으며 사실 아무도 그 정확한 원인을 알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의 상황은 단지 단기적인 ‘쇼크’가 아니라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석유 정점 시대의 초입에 우리가 도달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낳게 한다. 만약 그렇다면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인류 문명은 몇 년 내로 재앙에 가까운 거대한 위기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설사 아직 석유 정점에 도달한 것은 하더라도, 지금의 사태는 조만 간에 닥쳐올  정점에 대한 심각한 경고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럼 대체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하면 되는가? 석유 문명을 대체할 새로운 에너지의 준비는 아직 되어 있지 않고, 정점은 벌써 왔거나 조만 간에 올 것이고, 남은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고… 결국 19세기 이전의 말 타고 소 타던 시대로 돌아가자는 건가?

하지만 그렇게 옛날로 평화롭게 돌아갈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우리는 이미 석유 중독자다. 중증 알코올 중독자가 술을 마시지 않던 시절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것처럼, 인류가 그 시절로 돌아가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는 막대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남은 석유를 둘러싼 전쟁과 갈등, 기아와 가난, 질병 등 온갖 문제가 창궐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쯤 되면 이제 많은 분들이 ‘에너지 절약’이라는 단어를 떠 올릴 것이다. 사실 각종 절약의 방법과 정책들은 지난 수십 년 간 끝없이 되풀이 된 것으로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다. 한등 더 끄기 운동이라던가 공 회전 안 하기, 플러그 뽑아 두기 등 그 형태와 종류도 무척 다양하다. 단지 문제는 이것들이 현실에서 거의 실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건 이런 일들을 실행에 옮길 정도의 절실한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 여름에 전력량이 최대에 달해서 우리 집의 에어컨이 꺼질 우려가 현실로 느껴지기 전에는 전기 절약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심지어 유가가 150달러에 가깝게 오르고 휘발유 값이 2100원에 이르고 있음에도 거리의 승용차 수는 그대로고 우리의 생활 방식은 거의 바뀌지 않고 있다. 아직은 그런대로 감당할 만한 여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여력’이 바로 조만 간에 진정한 에너지 위기를 몰고 오는 주범이 된다는 점이 다. 진짜 위기를 느끼고 막상 행동하려면 이미 때는 늦어 있을 가능성이 크고, 그 결과 빚어지는 미래는 영화 ‘매드맥스’나 ‘북두의 권’ 같은 참혹한 것이 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따라서 기존의 에너지 절약과 같은 소극적인 관점으로는 현재의, 혹은 조만간 닥칠 석유 정점의 위기를 극복해 나갈 수 없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는 단순한 절약 이상의 보다 적극적이고도 광범위한 접근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문명 개조’를 통한 석유 시대로부터의 ‘연착륙’이다. 그리고 이는 대략 3단계로 나누어질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로 에너지에 대한 우리의 기존 관념과 발상부터 변해야 한다. 에너지는 마치 공기 같은 것이고, 적당한 수준의 비용만 지불하면 마구 써도 닳아 없어지지 않는 무한한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 그리고 지금처럼 많은 에너지를 흥청망청 소비해야만 행복하게 잘 살수 있다는 사고 방식이 그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화석 연료가 주종인 우리의 에너지는 단지 무한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지극히 유한할뿐더러 지금 이 순간에도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고갈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석유와 화석 연료는 우리에게 지금껏 편리함과 힘을 가져다 줬지만 얼마 안되어 그 반대급부로 큰 재앙을 불러 올지도 모를 양날의 칼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인식이 먼저 서지 않으면 어떤 절약 운동을 벌이고 무슨 정책을 써도 소용이 없다.

이런 인식과 발상의 전환은 물론 어려운 일이지만 결코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예컨대 이산화탄소가 지구 온난화와 그에 따른 재앙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은 지금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이는 종말론이나 다름없는 잠꼬대로 치부되었다. 직접 독성을 내뿜는 일산화탄소나 이산화황 같은 가스만이 공해 물질로 알려져 있었고 이산화탄소의 해악을 눈치챈 사람은 그야말로 극 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각은 이렇게 변할 수 있다.

두 번째로는 정부의 정책 및 도시 계획/디자인을 바꿔가야 한다. 위와 같은 관점의 변화를 구체적인 실생활로 연결시키기 위해서다. 예컨대 자동차의 경우라면, 지금 관용차량을 상대로 정부가 벌이고 있는 ‘홀짝제 운행’ 이나 10부제 같은 방식은 오래 갈 수 없기 때문에 장기적인 실효가 떨어지고, 또 돈 많은 사람들은 번호판이 다른 쪽인 차를 하나 더 구입함으로써 쉽게 비켜갈 수 있다는 점에서 바른 접근도 아니다. 영국 런던에서 시행하고 있는 도심 혼잡 통행세(Congestion Charge)도 같은 한계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해답인가? 기본적으로 차가 필요 없는 생활, 나아가 승용차를 몰고 다니면 오히려 불편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이것이 바로 발상의 전환에 의한 정책 수립이다. 유럽이나 중남미 일부 도시에서는 실제로 도심에 아예 승용차가 못 다니게 하는 등의 다양한 정책들이 이미 펼쳐지고 있으며 그로 인해 쾌적해진 도시 환경이나 편해진 시내 교통 등의 결과는 괄목할 만 하다.

이렇게 정책적으로 접근해서 성공한 사례는 바로 우리나라의 쓰레기 분리 수거다. 우리나라는 전세계에서 쓰레기 분리 수거가 잘 이루어지는 나라다. 10여 년 전만해도 웬만한 아파트 다용도실에 쓰레기 던지는 구멍이 하나씩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거기다 음식 쓰레기던 유리병이던 종이던 플라스틱이던 마구 던져 넣으며 살던 우리들의 모습을 생각해 본다면 참으로 엄청난 변화를 일궈 낸 것이다.

세 번째 단계는 이런 부분들을 바탕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의 성격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적인 대사업으로 개인적인 발상의 전환이나 일국의 정책 변화 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국제 사회가 동의하고 서로 이해관계가 다른 나라들이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뜻을 같이 해야 하기 때문이다.

넘쳐나는 석유와 기술 문명으로 인해 지금 우리 문명은 ‘속도’와 ‘양’ 이라는 두 가지 단어를 충족시키는 쪽으로만 너무 지나치게 기울어 있다. 그것이 행복을 가져다 주는 필수적인 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미 멈추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제 결국 석유 정점과 지구 온난화라는, 서로 다른 듯 하지만 사실은 같은 뿌리를 갖고 있는 문제들에 의해 제동이 걸리고 있다. 여기에 발이 걸려 넘어지지 않으려면 이제는 우리 모두가 자신을 한번 진중하게 돌아보고 현명한 선택을 해야 한다.

사실 그 선택이란 별 다를 것이 없다. 바이오 디젤이나 바이오 에탄올, 태양광이나 풍력 등이 지금의 석유 문명의 속도와 양을 유지하게 턱없이 부족하다면 답은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그 부족한 에너지에 맞게 우리의 삶과 세상을 바꿔 가는 것이다. 부족한 것을 서로 싸워서 빼앗아 억지로 지금처럼 계속 살아가려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만큼 서로 양보하고 나눠 쓰는 형태의 문명을 새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처럼 조심스럽게 공동의 선을 향해 나간다면 우리는 추락하지 않고 연착륙할 수 있으며, 매드맥스도 아닌, 19세기도 아닌 훨씬 나은 형태의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 물론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다면 자칫 우리가 지금껏 이루어 놓은 것을 모두 잃게 될 것이다. 우리가 소유한 것들을 다소 잃는 것은 비록 불편하지만 그리 끔찍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가치와 존엄을 잃는다면 그것은 그저 비극일 뿐이다.

쇠고기는 안 먹어도 살 수 있고 고급 승용차나 대화면 TV 같은 것도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원과 에너지가 부족해져 가는 상황에서 만약 그런 것들에 집착해 추한 투쟁을 벌인다면, 그래서 인류가 그 동안의 역사를 통해 어렵사리 배우고 실현해 온 민주주의와 인권, 자유와 평등, 약자에 대한 배려 등을 모두 잃고 만다면 그때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래서 석유 정점과 에너지 문제는 단지 그 자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인류가 이 위기를 극복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만큼 성숙해 있는지, 그리하려 오히려 지금보다 인간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미래의 기회로 만들어 나갈 수 있는지의 거대한 시험장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는 이 시험을 제대로 통과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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