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대통합민주신당'의 운명, 민주세력의 '멸종위기'를 보는 눈 |
(1) 사람의 운명은, 누구나 태어나기 전엔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던 물질계의 한갓 먼지였고, 한동안 기적처럼 부여된 ‘행운’의 삶을 다하면, 다시 아무 것도 인식치 못할 세상으로 ‘편안히’ 복귀한다. 소수의 근본주의 종교인들은 빼고. 그들은 한편으로 우리가 태어나자마자 이른바 ‘원죄’를 갖는다고 윽박지르면서, 다른 한편으로 불멸의 ‘사후 부활’을 내걸고 위안을 내미는, 참으로 지독한 ‘사도마조히스트’들이다. 우리의 반쪽인 여자가 사과 하나 따먹은 걸 갖고 꾸지람 한 번이면 족할 터인데, 죽음의 형벌로도 모자라 인류사 최악의 ‘대대손손 연좌제’까지 적용시키다니! (2) 생명 - ‘생’이라 함은 삶을 이어가는 동안 끊임없이 그 모습을 변화시키는 생물들을 일컫고, ‘명’이라 함은 본시 주어진 모습 그대로 최대한 보존코자 하는 무생물들을 일컫는다. 시간의 축을 기준으로 비록 상대적 구분법에 불과하지만, 모든 생명에는 딱 두 가지의 존재양식이 존재한다. 하나는 이슬처럼 홀연 생겨났다 해가 뜨면 곧바로 사라지는 하루살이(하루도 너무 긴 시간은 아닐까) 방식, 또 다른 하나는 한 번 만들어지면 마치 바위인 양 오래오래(영겁의 시간에선 한갓 모래로 스러질 것들이니 오래오래는 너무 짧은 시간인가) 버티는 방식이다. (3) 최근 출현한 ‘대통합민주신당’의 운명은 이 중 어느 쪽에 가까울까? 신당의 정체성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한때 유망했던 정치인 김근태가 온 몸을 살라가며 이뤄냈던 성과물인데, 그게 이슬처럼 사라질 운명일지, 아니면 적어도 한동안은 유기체적 생존의 모습을 보여줄지 짐짓 궁금하다. 불길하게도, 신당의 출범 과정에서 말끔히 제거됐어야 마땅한 노무현 일파의 자취와 흔적이 군데군데 얼룩진 모습이다. 고작 얻어낸 게 여전히 절반쯤은 제2의 노무현 신당인가. 잠시 속단은 피하고자 한다. 김근태, 지난 90년대 재야생활 마감 후 정치에 입문하여 마치 땅속의 매미 유충처럼 13년여 세월 숨죽이다 마침내 세상으로 내뱉은 외침, “대통합이 시대정신이다!” 그게 맞기나 한 말인가. 그래서 생겨난 신당의 운명만큼이나 전적으로 그의 ‘팔자’ 소관이다. 미래의 일에 대해 비합리적으로 운명이나 팔자를 믿지는 않지만, 시간의 축에서 한 번 지나친 행위와 그 결과는 모두 다 팔자로 돌릴 수 있음 또한 분명하다. (4) 참으로 영악하고 교활한 자들이다. 지금 이들 중 일부는 문국현을 내세우며 보험에 들고자 한다. 노무현의 일선 부대는 바로 이해찬이나 유시민 등의 신당 합류파이고, 이선 부대로 지금 준비되는 게 일부 인터넷 매체(흔히들 ‘노무현의 조선’이라고 한다)가 힘껏 함 키워보자는 문국현 부류다. 노무현 식 감성교활 정치의 마지막 해프닝이 아닐까 의심된다. 물론, 이들 족속의 최종 배후세력은 역사적 관점에서 따져보자면 근래 급부상한‘뉴라이트’ 계열이다. 권력 생리상 이들의 희망사항에 그칠 가능성이 크지만, 최후의 보험은 그간 수시로 공존 공생을 도모해온 유력 대선후보 이명박이다. 최근 언론매체의 보도에 의하면, 청와대 비서실장 문재인은 이명박을 고소한다는 등 이들이 그간 기회 때마다 그랬듯이 노무현과 이명박(박근혜 쪽에서는 둘 다 영남의 2급 지역주의자들로 친다) 간의 적대적 모습을 재현하기 바쁘다. 노무현 집권 후 지난 4년 반 동안 그들 간의 ‘헤게모니’ 다툼 차원에선 겉보기로 가장 치열하게 조선 등 보수매체들과 대립적이었으나, 그러면 그럴수록 은밀하게 공고해졌던 그들만의 비열했던 동맹 수법을 다시 써먹자는 거다. 지난 2002년 노무현 일파를 정치적 성공으로 이끌었던 ‘적대와 분열’의 수법이긴 하나, 한때의 성공 요인은 언젠가 반드시 실패 원인으로 돌변하는 법. 지금의 신당 출현 국면에서 이런 수작이 과연 또 한 번 통할 수 있을까. (5) 대통합민주신당의 생존 가능성을 좌우할 현안들이다. 무엇보다 ‘한미 FTA’에 대한 입장 문제다. 지난 4월 2일 한미FTA 타결 당시 조선 등 보수 매체에서 이를 두고 일본 등 선진국에서 조바심을 일으킨다는 내용의 순전히 작문성 기사를 내보냈다. 단언컨대 미국, 일본, EU 간에 상호 FTA 같은 협상은 결코 추진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필요하지도 않거니와, G-7이니 뭐니 하면서 그들 간의 협력동맹관계 유지면 필요충분 이상이다. 이들 선진국들 특히, 단일패권국 미국의 속셈은 그간 큰 틀에서 우루과이 라운드나 그것을 이어받은 도하 라운드 같은 다자간 협상 정도로는 성이 차지 않아, 저개발 및 중진 국가들을 직접 개별 상대하여 보다 더 ‘제로섬 게임’ 이득을 탈취해보겠다는 것으로, 이는 작금의 선진국과 비선진국 간 쌍무 FTA 협상의 본질이다. 과연 신당이 그리고 그 당의 예비 대선후보들이 노무현 정권의 온갖 예상되는 술수에도 불구하고 오늘(9.7.) 국회에 송부된 비준 동의안에 대해 분명히 거부하거나 최소한 차기 국회로의 이월 태도를 단호히 취할 수 있을지 초미의 관심 대상이 아닐 수 없다. (6) 다음 기회로 부동산, 교육 등의 문제는 미루고, 여기에선 ‘비정규직’ 문제를 하나 더 들어보기로 하자. 신당이 그리고 당내 예비 후보들이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어떤 입장을 보일 것인가는 신당 자체의 역사적 생존가능성을 가름할 또 다른 요인이다. 일찍이 김대중 정부는 민족문제에 관한 한 대중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끌어내며 기득 헤게모니 세력과 전혀 타협하지 않고 끝내 2000년 남북정상회담의 결실을 맺음으로써 급기야 한나라당의 대표적 수구꼴통이던 정형근 의원 등의 사고방식까지 오늘날 전향시키는 커다란 성취를 이뤄냈다. 이에 비해 노무현 정부는, 김대중 정부가 기득 경제 헤게모니와는 ‘타협’으로 일관하며 잘못 빚어냈던 비정규직 문제 등 경제사회적 실패 측면을 민주정부의 연속선상에서, 당연히 지지자들의 힘을 결집시켜 이를 해소시킬 역사적 책무를 안고 출범했다. 그러함에도 대기업 등의 파트타임 아닌 8시간 전일제 비정규직이나, 매우 비자본주의적이고 심지어 탈법적이기도 한 ‘사내하청’등을 전면 금지시켜 이를 성취하는커녕, 한 술 더 떠 노무현 자신의 수족이라 할 이광재 의원 등을 앞세워 삼성 등 재벌권력에 아예 자진 ‘굴종’하면서 스스로 묘혈을 팠던 게 저간의 사정이다. 자신들을 뉴라이트 세력의 일원으로 최종 자리매김하면서 본색을 유감없이 드러낸 거다. (7) 고개를 들어 창밖으로 짙푸른 숲을 내다보자. 아니 상상해보자. 큰 나무들은 그 아래 다른 나무들과 풀들의 성장을 방해한다는 점에서 일종의‘폭목’이다. 하늘을 찌를 듯 나란히 치솟아 오른 나무들 간에는 좀 더 햇볕을 받아보고자 좀 더 광합성 작용을 해보고자 몸부림치는 ‘제로섬’의 경쟁 관계이다. 자연계 숲의 생태 모습에서건, 사람들의 정치나 여타 영역 경쟁 차원에서건, 생명계 불변의 법칙은 생존과 번식을 위한 치열한 경쟁이다. 폭목 노무현을 지난 탄핵총선 이후 보안법폐지 파동 등을 거치면서 진작 ‘더럽게’ 떠나보냈듯이, 또 다른 거목 김근태를 얼마 전 ‘고이’ 떠나보낸 지금이다. 그 뒤로 이어진 신당의 역사적 운명은 과연 어찌 될까? 도태시킬 건 도태시키는 게 인간사회를 포함한 자연의 엄연한 법칙이다. 우리가 그러길 바라는 것과 현실로 실제 나타나는 것은 전혀 차원이 다르다. 한때나마 대중들이 김대중이나 노무현, 김근태 등등의 이름을 빌려 간구하였지만, 더 이상 자신들의 역사적 ‘현실’로 실현시킬 수 없다고 판단될 땐 그들을 미련 없이 떠나보낸다. 한 시절 우뚝 솟았던 희망의 정치인들도 세월과 함께 어느새 개혁의 ‘걸림돌’로 수시 변질되곤 한다. 혹여 ‘강시’들로 환생하여 재차 소동을 일으킬까 겁난 대중들이 지금 이들의 관 뚜껑에 쾅쾅 대못질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8) 돌이켜보면, 지금부터 30여 년 전 유신시절의 반독재 외침은 얼핏 대중들의 외면을 받았지만, 적어도 대중들의 속내는 은밀히 열려있었다. 힘겹게 몸을 숨겨야 할 때면 기적적으로 그들의 문이 열리곤 하였다. 독재파쇼(독재를 권위주의로, 파쇼를 국가주의로 완곡 지칭하는 자들은 거개가‘호남차별’을 지역주의로 고쳐 부르며 이를 해소하니 어쩌니 해왔고 또한 오늘의 ‘신호남차별’이라 할 비정규직 문제 등에 마찬가지로 소극적이다)가 극으로 치닫던 1980년 5월, 무차별적 광주학살로 희생됐던 영령들의 혼백에 크게 힘입어, 대중들은 마침내 문을 박차고 용감히 일어섰고, 20년 전 1987년 6월의 위대한 민주항쟁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어디에서나 판이 벌어지면 의당 장사꾼들이 따라 나선다. 이름 없는 무수한 영웅들이 피와 땀으로 헌신한 결과 드디어 판이 될 성 싶으니, 노무현 부류의 '가짜 영웅'들도 이에 뒤늦을세라 가담하게 되었고, 보상 욕구에서 더욱 맹렬하게! 87년의 치열했던 노무현의 모습과 오늘의 치졸하기 그지없는 그의 본색이 여실히 대비된다. 그들 일파는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가 아니라 지금 자신들만의 패거리 잇속을 채우면서 유감없이 ‘정치 졸부’의 근성을 드러내고 있다. (9) 당연한 업보다. 이들 암세포로 변형 성장한 사이비 분파들까지 포함하여 하나의 역사적 유기체로서 ‘민주세력’이 공동으로 맞게 된 가혹한 시련들은. 대중들은 지금 엄청난 분노 속에 마음의 문을 꽁꽁 잠가둔 상태다. 지금 같은 민심의 ‘절벽’에 직면해서는 더 이상 아무 것도 성취할 수 없고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 만일 아직도 자신을 민주주의자(지난 시절 반독재 세력의 절반 정도는 자칭 민주세력이란 표현과 상관없이 민주주의자 아닌 자유주의자 정도로 보는 게 온당하다)로 여긴다면, 그간 누적된 민주정부들의 과오, 무엇보다 경제사회적 민주화를 ‘시장화’나 ‘경제자유화’ 정도로 잘못 생각하여 무능하고도 무책임하게 서민들의 일상적 삶을 피폐케 한 엄청난 죄과로 인해 오늘날 대중들이 집단적으로 분출시키는 엄청난 분노에 동참할 자격조차 가질 수 없음을 심히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 그들의 열광적인 지지로 집권하고서도 집권 후 민주정부라는 게‘벼룩의 간’을 빼다 가진 자에게 몰아주다니! 이게 어디 있을 수나 있는 일인가? 지난 십수 년간 직접이건 간접이건 정권에 참여하였는지 여부를 떠나서, 가히 민주세력 전체의 ‘멸종위기’상황으로 판단된다. (10) 더 이상 먹혀들 여지가 없다. 지난 시절 김대중과 노무현을 향했던 식의 ‘비판적 지지’ 같은 건. 작년 5.31. 지방선거에서 대중들은 더 이상 '너흰 아니다’는 최종 심판을 내렸음에도 이를 제멋대로 해석하여 기껏 만들어낸 신당이라는 게 지금 한창 노무현의 공과를 한정승인 한다느니, 심지어 포괄승계 한다느니 하는 ‘의리’ 논쟁을 벌이는 것은 참으로 세상물정 모르는 더러운 처신이다. 독한 마음으로 다시 시작해야 한다. 김대중과 노무현을 넘어, 그리고 이들에 기생하던 ‘386’이란 이름의 현실 정치인들도 어느 정도 정리시킨 연후에야 비로소 민주의 새 싹들이 움틀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만큼, 현재로선 별로 기대하지도 않고 더욱이 예단하고 싶지도 않지만, 이른바 대통합민주신당이 자신들의 역사적 정체성을 그나마 인식, 강화하고 서민들의 일상적 삶에 대한 민주적 노선 정립에 어느 정도라도 성공할 수 있길 충심으로 기대한다. 아울러 오늘의 시대적 과업에 그간 거의 고군분투해 온 민주노동당의 더 큰 분발과 분전을 기대하면서 그들의 넘어서야 할 마지막 관문, 대중적 성공을 이룰 수 있도록 마음으로 힘찬 성원을 보낸다. 이미 ‘장’은 들어섰지만 여전히 대중들은 섣불리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희대의 정치 사기꾼, 노무현을 학습한 당연한 효과이다. 이대로는 더 이상 그들의 그리고 우리들의 장은 어디에서도 들어설 여지가 없다. 여기저기 장돌뱅이들만 분주히 설쳐대 갖곤, 어디 제대로 들어선 장이라고 할 수나 있나. 한 마디로, 난장판이다. * 글쓴이는 경제학자로서 양극화 해소에 관심이 많으며, 평생 화두로 삼고 있는 주제는‘사람과 경제 그리고 역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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