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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교수님’ 지금 만나러 갑니다… 이필상

이경희330 2007. 1. 19. 12:21
좋은 교수님’ 지금 만나러 갑니다… 이필상
 이필상 교수를 만나러 가는 길, 발끝으로 조용히 떨어져 내리는 빗줄기처럼 내 마음도 설레고 있었다. 전공서적에서 종종 ‘마땅히 공부해야 하는 바’를 언급하셨던 분, 전 고려대 경영대학장, 재무학회 회장, 함께하는 시민행동 창립준비위원회장, 바로 그 분이다. 흘러내린 빗방울이 하나 둘 고여 갈 때, 첨벙첨벙 연구실 앞에 다다랐다. 훈훈한 연구실에서 해맑은 미소로 고개를 내민 이 교수, 자 ‘이제 만나러 갑니다….’
좋은 교수님 지극히 평범한 말이지만, 아무에게나 어울리는 표현은 아니다. 누구나 듣고 싶어 하지만, 함부로 들을 수 있는 말도 아니다. '좋다'는 말이 남용되고는 있지마, 이에 어울리는 사람은 꾸밀 수 없는 표정에서부터 엿보이기 마련이다. 적어도 '정직한 강의'의 히스토리를 설명하는 이교수의 표정은 그랬다.
좋게 말하면 적성에 안 맞고, 나쁘게 말하면 공부 못하는 공대생
어릴 적부터 농사일에 익숙했고, 스스로에게 어울리는 직업은 ‘농부’라고 여겨온 그였는데, 아버지는 뜬금없이 중학교에 진학할 것을 권했다.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싫어요. 왜 멀리 가서 고생해요.” 마을 사람들도 아버지를 만류했다. 인생 다 거기서 거긴데, 농사지으며 살면 될 걸, 공부는 왜 하냐는 거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단호했다. “중학교에 가거라.”
아직 책보다 논밭에서 뛰노는 것이 좋을 나이, 그는 화성에서 인천까지 유학을 왔다. 떠밀려 홀로 타지생활을 시작한 어린 아이가 공부에 흥미가 있을 리 만무했다.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공부해야 할’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고등학생 때였어요. 방학을 하고 집에 내려갔는데 우리 집 논에서 다른 사람이 일을 하고 있더라고요. 무슨 일인지 물었더니, 제 학비를 위해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을 팔았다더군요.” 갑자기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도대체 내가 뭐라고 아버지는 땅까지 팔아 학교에 보내셨단 말인가. 인천으로 돌아온 그에게 ‘공부’에 대한 당위성이 생긴 셈이다. 서울대 공대 입학. 평생 일궈온 재산을 아들에게 투자할 만큼 깊었던 아버지의 뜻이 일단 결실을 맺었다.
당시 서울대 공대생이라면 지나다 돌아볼 만큼 ‘대단한’ 타이틀이었다. 하지만 그 타이틀이 무슨 소용인가. 좋게 말하면 적성에 안 맞았고, 나쁘게 말하면 실력이 없던 이 교수는 학과 수업이 점차 벅차게 느껴졌다.
“재미가 없었어요. 이 길은 내 길이 아니란 생각을 4년 동안 했으니까요. 그래서 전공 공부 외의 낭만만 즐겼습니다. ‘타임즈’를 보며 영어공부도 하고, 3학년 때는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데모도 수차례 나갔었죠. 운 좋게 붙잡혀 가지는 않았지만, 그때 전과자가 됐다면 지금 내 인생이 또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르겠네요.”(웃음)
유신정권 반대 운동, 삼선개헌 반대 운동 등 요즘대학생들에게 그는 ‘역사 속의 인물’이다. 그렇게 지낸 젊은이의 열정도 좋고, 낭만도 좋았다. 하지만, 4학년이 되고 취업 문턱에 서고 보니 말 그대로 ‘갈 곳’이 없었다. 서울대 공대생이라면 서로 오라고 기업들이 손 내밀던 때였다.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부모님도 그렇게만 믿고 계신데 아무도 그에겐 손을 내밀지 않았다.
“절박한 마음에 전공과 상관도 없는 금융회사에 들어갔어요. 사실 뭐하는 곳인지도 잘 몰랐죠. 살길이 막막했으니 우선 들어가고 보자는 마음이었습니다.”
직장은 비교적 마음에 들었다. 우선 월급이 많았고, 공학대신 그가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새로운 분야였다. 직장 내에서 ‘왕따’를 당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경영, 경제학 출신밖에 없던 그 곳에서 이 교수는 ‘이방인’이었다.
하는 일마다, 하는 말마다, 하는 행동마다 ‘공대생답다’는 사람들의 핀잔은 그의 오기를 자극하고 말았다. 꼭 다시 돌아와 복수하겠다는 결심으로 어렵게 오른 유학길, 그의 인생 전환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럭저럭 말하면 적성에 맞았고, 좋게 말하면 공부 잘하던 경영학도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받은 퇴직금은 고스란히 부모님께 생활비로 드렸다. 빈손으로, 경영학 마인드 제로로 그의 아메리칸 라이프는 막을 열었다.
공대생 출신인 그를 경영학 대학원에 합격시켜 준 것 외에 미국 땅은 냉정했다. 주말이면 교회청소를 나가고,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피곤한 날들이 계속됐다. 전공 책을 들고 강의실에 앉아 수업을 듣지만, 까막눈과 귀머거리가 된 듯한 기분이 몰려올 때면 그는 스스로 ‘내가 왜 그랬을까’를 고민했다. ‘쓸데없이 멀쩡한 직장 관두고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내가 어리석었던 게야.’ 다시 돌아갈까도 수십 번 고민했지만, 그 때마다 그의 발목을 붙잡았던 건 ‘복수심’이었다.
“원수를 갚겠단 생각으로 졸려도 버텼어요. 반드시 경영학 석사학위를 따서, 그 사람들 앞에 보란 듯이 던져주겠단 생각만 했었죠.” 그렇다고 마음먹은 대로 되는 건 아니다. 첫 중간고사. 실무 위주의 수업을 즐겨하던 담당 교수는 오늘날 경제 현상에 대해 진단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라는 문제를 출제했다. “당연히 모르죠. 이론 책을 혼자 공부한다고 해결되는 시험문제가 아니잖아요. 생각나는 대로 열심히 적어 낼 수밖에요.”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교수의 피드백은 ‘무응답’이었다. ‘답안지를 열심히 작성한 것 같지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어 점수를 줄 수 없음.’ 막막했다.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포기하는 마음으로 교수를 찾았다.
“미안해요. 내가 더 열심히 답안지를 읽고 이해하려고 노력했어야 하는데…. 포기하지 않을 거죠? 대부분의 유학생들이 첫 시험에서는 비슷한 경험을 한답니다. 다음 시험에서는 좋은 성적을 받을 거라 믿어요.”
당황한 것은 이 교수 쪽이었다. 답답한 심정을 토로할 겨를도 없이 그의 마음속엔 이미 또 다른 희망이 샘솟고 있었다. ‘하면 되는구나, 그럼 해보자.’
그냥 그렇게 말하면 적성에 맞았고, 좋게 말하면 공부를 잘했던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아이비리그에서 MBA 석사학위를 받았다. 별거 아닐지도 모르는 종이 한 장짜리 학위증이지만, 빈손으로 악에 받쳐 손에 넣은 가슴 찡한 ‘내꺼’그에겐 눈물 날 만큼 기쁜 일이었다. 2년 간 벼르던 과업이 현실로 다가왔지만, 고난을 이겨내는 동안 더 성숙했기 때문일까. 작은 감정에 얽매이는 작은 그릇이 되지 않기 위해 한국행을 포기하고 박사과정을 시작했다.
정직한 강의, 정직한 사람
한국으로 돌아와 교단에 서기까지 그는 부모님과 조상들의 논밭, 회사에서 받은 설움, 용기를 북돋워 준 담당교수를 기억해야 했다. 남들은 쉽게도 성취하는 길을 만리장성만큼이나 힘겹게 돌아온 그이기에, 남다른 다짐과 약속이 필요했다. 그가 내세운 ‘정직한 강의’는 힘겨웠던 지난 시간을 보람 있게 만드는 하나의 지렛대였다.
“학생들과 첫 시간에 약속합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말하고, 내 자신에게 솔직할 수 있도록 강의 준비에 노력하겠다고요. 또 학자로서 잘못된 현실은 정직하게 비판하고 바른 길을 제시하는 사람이 되겠다고요.”
강단에 선지 24년. 꾸밈없는 강의, 현실적인 강의를 진행해온 이교수를 학생들은 ‘좋은 교수’라고 부른다. 이왕이면 ‘좋은 교수’한테 ‘나쁜 학생’이라도 좋으니, 좀 귀찮게 굴면 좋으련만, 강의실 밖에선 서먹해져버리는 학생들과의 관계가 늘 아쉽단다. 그래서 고민했다. 어떻게 학생들을 연구실로 끌어(?)들일까.
“5가지를 제시하고 이 중에 한 가지라도 해당하면 연구실로 오라고 했어요. 첫째, 수업 내용 중 모르는 것이 있는 사람. 둘째, 요즘 경제에 대해서 궁금한 게 있는 사람. 셋째, 진로에 대한 고민이 있는 사람. 넷째, 수다라도 좋으니 대화 상대가 필요한 사람. 마지막, 할 일이 없고, 갈 곳도 없고, 심심해서 연구실이나 구경해 볼 사람. 그랬더니 몇 명씩 찾아오더라고요. 대화를 나누다 보면 집안사정, 학업문제까지 맺혀있던 이야기들을 풀어내더군요. 그렇게라도 학생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좋겠는데 말이죠.”
이 교수가 말하는 요즘 학생들은 고민이 너무 많다. 자유롭게 사회를 논하고, 이상을 이야기하며 더 넓은 미래를 고민해야 할 젊은이들이, 취업문제에 급급해 어두워진 표정을 보노라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점차 학생들 간 동기애도 사라지고, 교수도 학점 주는 사람으로 여기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스승으로서 출교된 고려대 학생들을 바라보는 마음도 착잡하다. 어느덧 ‘학교’라는 곳이 진정한 의미의 교육적 기능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런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만약 알려진 것처럼 학생들이 교수를 감금한 것이 사실이라면 학칙에 따라 처벌을 해야겠지만, 대학은 교육기관입니다. 그 학생들을 교육적으로 구제할 가능성은 없었는지 우리 모두가 뜨거운 마음으로 고민해야 합니다. 학생들이 반성할 기회를 주는 것이 교육의 역할이니까요.”
내로라하는 외부활동에 소홀한 교수. 다시 말해, 사회에서는 그를 찾지 않는단다.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고, 나쁜 것은 고치라고 일침을 가하는 학자이기에, 이 교수는 대학에서 주는 월급으로‘만’ 살아간다. “정부의 정책을 옹호해주고, 뒷받침할 수 있는 자문을 부탁하곤 하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데요. 다른 소득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난 학생들과 함께하는 선생이고, 학생들에게 정직한 강의를 하면서, 학생들이 내는 등록금만으로 살아갈 거니까요.”
정직한 학문으로, 정직하게 소통하며, 정직한 미래를 제시하는 이필상 교수, 그는 오늘도 정직한 마음으로 학생들의 연구실 노크 소리를 기다린다. “어서오세요.”
임수민 학생리포터 tnalssid@hanmail.net · 사진 김다운 Studio Zi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