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김대중 아들들의 여자편력,최규선 관계 등 거론하다 오래전 烹 당했다."
삼일빌딩 매입설은 사실 12명 파트너와 공동명의 구입
조풍언 씨는 김대중 정부들어 자신은 특혜를 본 사실이 단 한 건도 없다고 항변 했다.
(지난호 407호 5월 11일자) 자신이 실질적인 사주로 있었던 기흥물산이 무려 40배에 가까운 성장을 한 것은 김대중 정부의 배려가 아니라 김영삼 정권때 구입한 F-16 비행기의 전자장비와 관련한 계약이 IMF로 진행되지 못 하다가 2000년 경기회복에 따라 계약대로 전자부품을 납품, 정상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 이전부터 기흥물산은 매출이 수천만불에 달했으며 98년 매출이 1백만불에 불과했던 것은 IMF이후 계약이행이 되지 않아 한 해만 국한되었던 것이라고 밝혔다. 만약 DJ정부의 특혜를 받아서 성장했다면 야당이나 언론 등에서 그 정도로 끝났겠느냐고 주장했다.
2조 2천억원에 달하는 차기유도 무기 사업 선정과정과 관련 1천만불의 커미션을 받은 부분에 대하여도 자신은 이스라엘 무기업자( 이름은 밝히지 않음)의 대리점 역할에 불과 했다. 차기유도 무기사업과 같은 중대한 사업은 모두 미국이 국가와 국가간에 하는 계약이며 특히 FMS(Foreign Military Service)에서 메인 콘트롤을 하는 지극히 극비 사항이라서 현재는 그 구체적인 사항을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
조풍언 씨는 김대중 가(家)와의 정경유착 관계에 대해 자신의 무기 사업에 단 한 차례도 혜택을 받은 사실이 없다. 다만 김대중 씨가 대통령에 취임 하고나서 정치권에 휩쓸려 다니며 엔죠이를 한 것은 사실이나 그외에 달리 특혜를 받은 사실이 없다. 국방부 예산 집행서를 보면 그와 같은 사실을 구체적으로 증명 할 수 있다고 말했으며 ‘야당이나 언론에서 그렇게 나를 잡기 위해 뒤졌지만 결국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조풍언 씨 자신은 이미 무기장사를 그만 둔지 오래되었으며 김대중 정부 들어서 자신이 실질적인 소유로 되어 있던 기흥물산을 전 직원들에게 육/해/공군으로 나눠주었으며 현재는 경영과 관련이 없다고 했다.
(인터뷰 : 연 훈 본지 발행인)
*407호 인터뷰 전문:
5월 8일 아침 8시
기자는 조풍언 씨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조 씨의 부인이 경영하는 한인타운 복판에 자리하고 있는 가든 스위트호텔로 성급하게 들어가 프런트(front)에서 조 씨를 찾았다.
그러자 뒤에서 “연 사장” 하는 정겨운 소리가 들려왔다. 커피샵에 들어가 우리는 자리를 잡았다. 아침 시간이라 우리 외는 다른 손님이 없었다.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이 생각할 때 두사람이 무엇 때문에 만나나 하는 의아심이 드는 것은 자명한 노릇이니까/ 이번이 벌써 3번째 만남이었다. 3번째 만남 이라는 의미는 이번 선데이저널에서 조 씨와 김대중 일가와 관련된 의혹기사를 수차례에 걸쳐 보도하고 부터이고 조 씨를 알고 있는 것은 10여년전부터였다.
첫번 째는 우연치 않게 한 교포인사의 주선으로 만났으나 오랜 만에 만나는 의미 이외는 달리 없었고 두번째도 역시 그분의 주선으로 만났다. 그때 조 씨는 ‘기자들은 쓸 것은 다 쓰고 만나야 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기가 쓰지 못하면 다른데 팔아 버리기 때문이다. 골프가 싱글이라는데 언제 기회가 되면 골프나 한번 치자”라고 말해 그동안 조 씨가 언론에 얼마나 시달렸었는지 짐작이 가는 듯 했다. 그러면서도 조 씨는 ‘농담 반 진담 반’ 그만 써 달라고 애교 있는 주문을 하기도 했고 기자는 ‘그럴 의사도 있다. 그러나 내가 기사를 중단할 명분을 달라’고 하여 자연스럽게 세번째 만남을 갖게 되었다.
군납과 무기장사
일반 사람들은 보통 군납과 무기장사 하면, 같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조 씨가 말하는 그 의미는 전혀 달랐다. 군납은 군대에 무 배추 두부 밀가루 등 생필품을 파는 것이고 무기장사는 이름 그대로 방위산업과 관계된 무기, 비행기나 그와 관련한 부품을 파는 것이다라고 조 씨는 친절히 말해주며 “나는 지난 45년간을 군대에 있는 사람들과 동고동락을 같이 해 왔다. 경기 고등학교 시절 집안이 망해 갖은 고생 끝에 고려대학에 진학 했고 학비와 생활비가 없어 남산에서 잠을 자기도하고 가정교사를 하기도 했다” 지난 어려웠던 날을 들려주며 “ 학교를 졸업하고 나이 20대 중반에 군납을 하기 시작했다”고 술회했다.
“그때만 해도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었지/ 64년부터 군납을 했는데 매일 저녁 군인들과 술 먹는게 일이었지/ 60만 대군 생활 필수품을 대주다 보니 별의별 일이 많았다”면서 그때가 재미 있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끌어 갔다.
“내가 이런 얘기하면 안 되는데 - 옛날에는 말이야, 물건도 없고 가격이 없어 거짓말을 해서 가격을 정하다보니 매일 술 타령이고 돈을 짚차에 푸대로 싣고 다니며 뿌리지 않으면 군납을 할 수가 없었지 / 물건은 없고 파우치에 군인들이 도장을 찍어주면 짚차에 싣고간 돈에서 미리 반을 주면 군표(국고 수표ㅡ를 일컬음)를 받고, 나머지 반은 바꿔서 주는 그런 장사를 했는데 그게 바로 군납이라는 거야” 조풍언 씨는 군납을 하던 시절을 회고하며 그런데 바로 그 이유로 해서 무기장사를 시작하게 되었노라고 말을 이었다.
다른 군납업자나 군인들은 모두 조 씨가 야간중학을 나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렇지 않고 똑똑해 보이면 건방지다라는 소리에서부터 모두 적개심을 갖고 끼어 주지를 않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을 하고 다녔다고 했다.
그런데 어느날 한 군납업자가 조 씨에게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느냐고 물어 무슨 일인데 영어를 잘 하는 사람을 찾느냐고 하니까 “너 같은 무식한 사람은 몰라도 되는데”하면서 “사실 해군에서 7백만불 어치를 구매했는데 영어를 몰라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하더란다 .
그래서 겨우 설득하여 그 내용을 알아보니 해군에서 그 군납업자에게 엔진 제네랄 펌프 등 함정에 필요한 부품을 구매하기 위한 계약서였던 것이다.
그 때 조 씨는 그 군납업자에게 사실을 고백했다 ‘사실 나는 경기 고등학교를 나오고 고려 대학교를 나왔는데 같이 한번 해 보자’고 하니 믿지를 않더라는 것이다. 당시 7백만불 돈이면 하늘 색깔이 바뀔 정도의 큰 액수였다.
그 인연이 바로 조풍언 씨를 오늘의 무기장사 조풍언으로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노태우-김영삼 시절에 번 돈이다. 김대중 정권땐 한 건도 없었다"
조풍언은 샌프란시스코, 뉴욕 등지를 돌아 다니며 부속품을 구했다. 당시 한국 해군이 소유하고 있는 함정은 모두 미군들이 남기고 간 오래된 것 들이라 부속을 구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대부분 회사가 없어지거나 중단된 것 들이라서 구하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어렵사리 구해보니 모두 중고들 뿐이여서 수리비가 엄청 많이 들었음에도 6백만불이 남았단다. 당시 조 씨의 나이 불과 28세 때였다.
그 때부터 조풍언은 군납을 때려 차우고 ‘황금알을 낳는 거위 장사’ 인 무기장사를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 했다.
“당시 내돈 안 먹은 사람 없었지 / 그래서 여러 번 보안사 정보부 검찰 등에 끌려 다니며 고초도 많이 겪었는데 나는 술만 먹었지 절대로 돈은 준 적이 없다고 하니 몇 날 몇 일을 때리고 고문 하다가 포기하고 내보내더라” 그뒤로 군인들은 조 씨의 돈을 먹어도 탈이 없다고 생각, 내놓고 봐주기 시작 했다고 털어 놓는다.
기자가 그의 어려운 시절에 언급하는 것은 그에 대한 인간성이나 사업 철학 등에 관한 이해를 얻기 위해서였다.
기자는 조 씨에게 본격적인 질문을 하기 시작 했다.
기자 : 김대중 정부 시절 군납이권을 26건이나 했다는데
조풍언 : 그건 무기사업을 모르고 하는 이야기다.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군납과 무기사업은 별개다. 나는 김대중 정권 들어 단 한건도 계약을 한 사실이 없다. 그런 일이 있다면 한나라당에서 지금까지 가만이 있었을 턱이 없다. 나는 노태우 김영삼때 돈을 벌었지 김대중 시절에는 없다. 내가 잘못이 있다면 평생을 군인들과 정치인 들에게 굽실거리며 살다가 김대중 씨가 대통령이 되고나서 우쭐거리고 폼을 재고 다니며 장관 정치인 할 것 없이 욕지거리를 하고 엔죠이 한 건 사실이다. 그것이 죄라면 죄이고 그 죄를 달게 받고 있는 것이다. 김대중 씨가 나를 필요로 했던 것은 모르기는 몰라도 홍일(김홍일 의원)이 때문인 것으로 안다. 단 한 건이라도 있으면 갖고 와봐라
기자 : 지난 98년 기흥물산의 매출액이 1백만불이었는데 99년 무려 40배에 가까운 성장을 했다. 정경유착 없이 가능한 이야기인가
조풍언 : 무기사업에 관한 전문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특히 한국언론과 한나라당에서 나를 공격하기 위해 지어낸 말이다. 국방부 예산 집행서를 보면 알수 있는 일이다. 98년 이전 것은 거론치 않고 있는데 나는 그 때 벌써 수천만불의 매출을 했다. 김영삼 정권때 F-16 비행기 120대가 들어왔는데 나는 연도 별로 전자장비와 관련한 계약을 했었으나 IMF 여파로 40대의 전자장비 예산밖에 없었다가 99년 2000년에야 경기가 회복돼 다시 계약대로 추진했고 그로 인해 매출이 뛴 것이지 다른 별도의 사업을 통해 신장 된 것이 아니다 국방부 예산 집행서를 보면 알 수 있다. 남들 보기에는 그것을 의혹으로 보는데 나는 결백하고 김대중 씨를 만나서 언론에 부각 되면서 사실이건 아니건 기사화 되면서부터 무기장사로서의 수명은 끝난 것이다
기자 : 2조 2천억 규모의 차기 유도 무기 사업 선정과 관련하여 커미션으로 1천억을 벌었다는데 사실인가
조풍언 : 차기 유도 무기사업 같은 중대한 거래는 군원(FMS: Foreign Military Service) 에서 관장하는 데 이는 국가와 국가 사이끼리 극비밀로 하는 것 이기 때문에 뭐라고 말을 못 하겠다. 나는 평생을 비밀적인 사업을 해 왔기 때문에 대한민국을 위해 할말을 아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직은 이야기 할 단계가 아니나 분명한 것은 나는 이스라엘의 하청업자(이름은 밝히지 않음) 의 대리점 노릇을 한 것이고 불과 수십만 불의 커미션을 받았을 뿐 더 이상의 거래는 없다.
기자 : 수조원의 사업을 진행하면서 수십만불의 커미션을 받았다고 하면 누가 믿겠느냐
조풍언 : 사실이다. 무기거래의 메인 콘트롤은 모두 미국이 한다. 차기 유도 무기를 수입할 예산이 한국에는 없다. 한대에 1억불이나 하는 것을 수십대씩 사들일 수가 없다. 그러나 1대는 있다
기자 : 그럼 그 1대는 조풍언 당신이 관여 했느냐
조풍언 : 말할 수가 없다. 이런 말은 모두 린다 김이 떠들고 다니는 이야기에 불과 하다. 나는 대한민국의 무기장사 1호다. 린다 김이 언제부터 무기장사를 했다고 하며 떠들고 다니는데 참으로 가소로운 이야기이다. 누구라고 밝힐 순 없지만,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군 고위층이 침이 마르도록 부탁해 한구석 끼워 준 것 밖에 없는데 자기가 수십년 전부터 무기장사를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이가 없어 웃었다. 정말 웃기는 이야기다. 내가 린다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조풍언 씨는 느닷없이 린다 김에 대한 대목에서 몹시 흥분하고 가소로운듯 열변을 토했다. (린다 김과 관련한 조풍언씨의 인터뷰 내용은 다음호에 기재할 예정임)
기자 : 무기장사나 방위사업에 문외한인 기자가 생각해도 김대중 정부에서 단 한가지 혜택도 받지 못 했다면 누가 믿겠는가
조풍언 : 사실인 것을 어쩌 하겠느냐. 무기사업은 다른 사업과 달리 하루 이틀에 이뤄 지는 것이 아니다. 물건을 팔려면 평균 5년이 걸린다. 어떤 정권이 봐주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도입계획과 시험기간이 5년 걸린다. 그것이 끝난 다음에야 계약을 할 수 있는데 그런 사실 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김대중 정부로부터 특혜를 받은 양 말 하는 것 자체가 결국 내가 김대중씨 집안과 가깝다는 색안경을 끼고 보기 때문이다. 무기시장은 체계가 있고 연속성이 있어야 한다. 미국이 통제를 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이 사고 싶어도 못 사는 무기가 많다. 군납은 특혜가 있을지 모르지만 무기장사는 특혜가 없다 그 이유는 국방과학연구소 (ADD)에서 조사 연구하여 치밀한 과정을 거쳐 하기 때문에 5년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 이유는 한국을 비롯하여 외국에 파는 무기가 대부분 연구 결과 문제가 많기 때문에 국방과학연구소가 이를 철두철미 하게 조사하고 불량품을 팔 수도 있기 때문에 사전 예방하는 업무를 하는 것이 ADD의 역할이다.
그런 이유로 5년의 기간이 소요되며 모르는 사람들이 단지 단기간에 무기 판매가 가능한 것으로 생각해 김대중씨가 나에게 어떤 방위산업의 특혜를 준 것으로 오해하는데 사실이 아니다.
기자 : 만일 훗날 지금 인터뷰한 내용에 대해 거짓으로 드러날 경우에 책임을 질 수 있는가.
조풍언 : 물론이다. 나는 평생을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살아왔다. 다만 입이 험해서 욕지거리를 자주 하고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이 흠이라 주변 사람들이 나를 험담할 지언정 나 자신은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다. 믿어달라.
기자와 조풍언씨는 화기애애하게 오랜 시간을 인터뷰 했다. 조씨는 인터뷰 중간 중간 “할말이 많지만 지금은 말 할 단계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언젠가는 조씨 스스로가 말할 때가 올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어 그가 지니고 있는 폭발력을 짐작 할 수 있었다.
*408호 인터뷰 전문: 나는 김대중 아들들의 여자편력,최규선 관계 등 거론하다 오래전 烹 당했다.
- 김대중 정부들어 정치권 사람 들과 엔죠이를 했다는 것은 무슨 소리며 그로 인해 지금까지 돌팔매질을 당하고 있다는 말은 무엇인가?
나는 평생을 군납과 무기장사를 하면서 군인들과 정부 고위인사 들에게 고개만 숙이고 다녔다. 그런데 김대중씨가 대통령이 되고 나니 평생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장관 고위장성들이 형님 형님하고 부르며 술자리를가던 어디를 가던 나를 상석에 앉히며 대접을 받으니 우쭐해져 안하무인이 되었었다. 그들에게 반말은 차치하고 욕지거리를 해대기도 했으니 그거야말로 엔죠이가 아닌가. 그 당시야 조풍언을 통하면 안되는 일이 없다는 소문까지 나돌 정도로 나를 실세 중에 실세로 대해줄 때다. 그러나 실제로는 되는게 하나도 없었다. 그것이 오늘날 내가 세상사람 들에게 난도질을 당하고 있는 이유의 전부다.
-김대중 정부들어 단 한건도 특혜를 받은 사실이 없다고 하는 데 누가 그 소리를 믿겠는가?
DJ 정권 들어서 나는 돈만 썼지 정말로 아무런 특혜를 받지 못했다. 정치하는 사람들의 속성을 모르고 하는 소리 같은데 나와 김대중 씨간의 관계는 세상이 알고 있어 불을 켜고 볼 때인데 야당이나 언론에서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그리고 내 얼굴과 이름이 너무 팔려 무기장사를 더 이상 할 수가 없었다.
무기장사라는 것이 알려지지 않을 때 하는 것이고 참모총장이나 국방부장관 등 군 고위층이 나보다 연로할 때 하는 장사지 나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들이 그 자리에 가면 무기장사로써의 생명은 끝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김대중씨는 원래 누가 이권에 관계 된 것을 요청하면 금새 태도가 돌변하는 사람이다. 돈이 들어와도 쥐도 새도 모르게 부인과 둘이서 관리하지 누구를 믿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때문에 김대중씨 집안과 다시 인연을 맺었으며 홍일, 홍업, 홍걸의 후견인 행세를 하고 다녔나.
김대중 씨는 항상 새 사람을 좋아한다. 지난 93년 김대중 씨를 다시 만날 때 주변에는 이렇다할 사람이 없었다. 특히 돈 있는 사람이 없었고 오랫동안 보아온 사람들 속에 내가 나타나니 신선했을 것이다.
그리고 호텔도 가지고 있고 돈도 있다는 이야기도 있고 부친과의 관계도 있으니 우리의 만남은 자연 스러운 것이였다. 특히 당시 홍걸이가 학교 문제 등 거취 문제 등이 있어 내가 필요 했을 때였다. 그리고 김홍일 의원의 병 때문에 더욱 내가 필요했다.
-김대중 씨를 처음 본 것은 언제인가?
국민학교 시절로 기억된다. 당시 김대중 씨는 빨갱이로 몰려 우리 아버지 밑에 와 있을 때였다. 당시 빨갱이 아닌 사람이 어디 있었나 / 그때 대한 청년단 단장은 이범석 씨 였는데 우리 부친은 전라도 단장을 하고 있었다.
6.25가 터지면서 방위군으로 바뀌고 현지에서 별을 달아주는 그런 때였다. 그 때 김대중 씨는 내 부친의 도움으로 해양방위대에 근무하기도 했다.
바로 그 때 김대중 씨를 처음 뵌 것이고 지난 93년 LA에 방문, 내가 주관한 만찬에서 나를 소개하니 반갑게 만난 것이다. (조풍언씨는 그동안 김대중 씨를 어릴적부터 관계해 왔으며 그로 인해 박정희 전두환 정권 시절 많은 박해를 받아 온 것처럼 이야기 했다고 한국의 언론들은 보도하고 있었으나 이는 전혀 사실무근으로 밝혀졌음)
이런 사실 하나 만으로도 나는 평생을 고생했다. 김대중 씨와 내 부친과의 관계로 인해 대통령 선거 때마다 요주의 인물로 사찰 등으로 인한 피해를 받기 일수였고 사업을 할 때도 단지 목포 사람이라는 이유로 은행 융자는 꿈도 꾸지 못했으나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DJ에게 고맙다고 하고싶다.
- 한국의 언론 보도에 의하면 박정희 전두환 정권 때 너무 탄압이 심해 미국으로 온 것으로 되어 있는데 정말 김대중 씨로 인해 고초를 겪었는가?
말이 와전된 스토리다. 77, 78년 나는 서빙고 보안사에 끌려가 무지하게 매를 많이 맞었다. 군인들에게 돈 준 사실을 불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내 돈 먹지 않은 군인이 없을 정도였는데 그걸 다 불면 국방이 흔들릴 정도였다. 그걸 내가 불 리 없었고 그로 인해 전기고문까지 받았으나 결국 나오지 않자 상처를 치료해주고 나가라고 해서 나왔다. 그 뒤로 그들은 적어도 조풍언이 돈은 먹어도 뒤탈이 없다고 생각했던지 친해 졌다.
그리고 한 번은 당시 군대는 파벌이 많았고 경상도가 다 해먹을 때라서 전라도 사람 참모총장을 만들어 보려고 운동하다가 또 한번 보안사에 끌려가 치도고니를 맞았다.
그때 윤필용 씨가 나보고 미국에 가라고 권유해 81년 전 미8군 참모장 출신인 제네랄 스미스 장군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온 것이다. 스미스는 나의 은인이다. 나는 그로 인해 무기장사를 배웠으며 그를 통해 미국이나 한국의 고위층을 접할 수 있었다. 당시 스미스 씨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매월 한 차례씩 독대를 했는데 청와대에 들어갔다가 도청기를 설치하여 한미관계에 심각한 상황까지 야기시켰던 이른바 청와대 도청사건이 터졌는데 그때 나는 스미스와 친분이 있을 때여서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조사를 받다가 스미스가 CIA의 책임자라는 것을 알았다.
그 사건 직후 스미스는 미국으로 건너 갔다가 방위산업 회사인 E-Syetem의 아시아 책임자로 부임하였다. (E-System 회사는 당시 전군이 사용하는 PRC-77이라는 라디오를 납품하는 방위산업 회사였다)
그런 이유로 보안사에 두 번, 중앙정보부에 한번 끌려가 고초를 겪었을 뿐 김대중 씨와는 무관한 일이다.
- 제네랄 스미스를 은인이라고 했는데 어떤 도움을 받았나?
당시 무기장사는 나에게 있어 무풍지대나 다름이 없었다. 나는 전군에 레이다를 비롯 각종 통신장비, 무기 등을 팔았다. 당시 내 손 거치지 않은 무기는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그런 나에게 스미스는 미국 최대의 무기회사인 록히드 회장 등을 내게 소개시켜주는 등 무기장사로서의 발판을 마련해 준 사람이다. 그는 공군 3성 장군 출신이며 이름 까지 ‘김대호’로 바꿀 정도로 한국을 사랑했다. 이른바 청와대 도청사건 이후 한국을 많이 도와 주었는데 이럴 수가 없다는 배신감에 필리핀으로 떠나 버렸다. 나는 그의 도움으로 미국에 올 수 있었고 시민권도 받을 수 있었다.
- 지금까지 말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대한민국의 국방 관계자들과 군인들은 모두 부패하고 썩었다는 이야기인데 너무 심한 표현이 아닌가?
그래도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하면 무지무지하게 깨끗한 편이다. 무기장사라는 것이 시간이 많이 필요한 비즈니스다보니 비용도 많이 들고 처음부터 끝까지 복마전이나 다름이 없다. 부패했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속성이 그렇다는 이야기다. 로비 없이는 불가능한 사업이기 때문에 말도 많은 것이다.
조풍언 씨는 결국 김대중 정부 들어 군납이나 무기장사에는 단 한 건의 혜택을 받은 일이 없으며 오히려 피해자라는 주장이다. 다만 김대중 정부들어 분위기에 휩쓸려 정치인들과 어울려 다니며 자의 반 타의 반 실세 행세를 하고 다니다가 혜택 한 번 보지 못하고 여론에 떠밀려 곤욕을 치루고 있다고 주장한다. 조 씨는 무기사업과 관련해 지금과 같이 메인 콘트롤을 미국이 하는 상황에서 한 건으로 돈을 벌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자신은 연장 선상에서 계속해 온 일이며 30년 비즈니스에 매년 부속품만도 3천만불을 팔았다. 그외 차기유도 무기 사업과 같은 중대한 사업은 개인이 할수 없는 국가와 국가간의 일이며 대리점 역할을 통해 한건에 고작 5만불 정도(미국 방위산업 커미션을 법으로 정한 액수)가 전부라는 것이다.
조 씨의 이런 주장을 기자는 달리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지금까지 제기된 의혹을 조 씨의 입을 통해 알릴 뿐 객관적인 증거나 물증을 제시해 따지고 들 수가 없다.
3.1빌딩 매입과 스몰 락 의 실체
본보는 지난 405호(4월27일자)에서 <조풍언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삼일빌딩 매입의 진상 의문 그 실체를 추적한다> 라는 제하의 기사를 통해 의혹을 제기 했다. 그동안 한국의 정치권과 언론들은 수없이 그 실체를 알아 보려고 노력했으나 지금까지 의문만 제기되었지 그 진실은 규명하지 못했다. 삼일빌딩은 1970년 개발연대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그 빌딩이 한 홍콩계 회사로 넘어 갔는데 과연 그 건물을 매입한 사람은 누구이며 그 정체는 무엇일까 궁금해 했다. 아무도 이와 관련해 입을 열지 않았다. 매각환 산업은행도 그리고 등기업무에 관여한 법무법인 충정등 모두 모르쇠로 일관했다. 본보는 이에 대해 베일 속에 숨어서 은신 할 것이 아니라 삼일빌딩 매입 의혹과 관련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라고 보도했었다.
조풍언 씨는 삼일빌딩 매입과 관련, 처음으로 본보 기자에게 명확하게 자신의 입장을 표명 했다.
-삼일빌딩의 실질적인 주인은 누구이며 매입 과정을 이야기해 달라.
솔직하게 말하겠다. 삼일빌딩은 내가 주도하여 12명의 투자자를 모아 매입한 것이다. 단독으로 매입한 것이 아니다. IMF이후 내가 한국정부와 가깝다고 알려지면서 미국업자들이 많이 찾아 왔었다. 그 때만해도 고층 건물들이 모두 헐값으로 내놓아도 팔리지가 않았고 연쇄부도로 말미암아 파산이 속출 할 때였다. 그럴 즈음 삼일빌딩이 매각 물건으로 나왔는데 그때까지 삼성생명이 매입을 시도, 4번의 유찰 끝에 가격을 더 떨어뜨리려고 하다가 나한테 걸린 것이다. 당시 470억이면 살 수 있었던 것임에도 결국 502억에 매입했던 것이다.
- 매입 과정에 특혜는 없었는가?
특혜는 무슨 특혜 당시 502억에는 살 사람이 없었다. 4번이나 유찰돼 우리가 매입 했는데 무슨 특혜며 이권인가. 당시는 3백억에도 살 사람이 없었다. 그 이유는 입주자가 전무할 정도로 텅텅 비어있었기 때문이다.
- 스몰락 인베스트먼트 컴퍼니는 어떤 회사이며 왜 홍콩의 변호사 사무실을 통해 매입 했는가?
홍콩이나 싱가폴은 우리와 같은 업종의 사업가에게는 더 없이 좋다. 미국이나 한국처럼 까다롭지 않고 자유롭기 때문이다. 더욱이 매입투자에 참여한 6명이 모두 중국인이기 때문에 홍콩의 변호사를 고용 매입 했던 것이다. 한국인은 나 혼자이고 그때 만든 회사가 스몰락이라는 회사다.
- 왜 회사 이름을 스몰락 이라고 지었는가. 혹시 학교 다닐 때 소암(小岩)이라는 자신의 호를 따서 영어로 작은 바위의 의미로 만든 이름이 아닌가?
꼭 그런 의미 만은 아니다. 우리 파트너 6명은 세계 각국에 교회를 많이 짓고 있는데 모두 똑 같이 돈을 대서 교회사업에 사용한다. 성경 말씀대로 초석이 되라는 이유로 스몰락으로 짓게된 것이지 다른 의미는 없다. 6명의 파트너는 이런식으로 돈을 모아 골프장이고 건물에 투자하고 있다. 싫다는 사람은 빠지기도 한다.
- 매입 과정에서 김우중 씨의 돈이 유입되거나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닌가? 김우중 씨와는 아직도 관계가 있는지 알고 싶으며 대우정보시스템 등 알짜배기 회사만을 인수했는데 어떤 방법으로 인수했으며 김우중과 김대중 사이에서 모종의 메신져 역할을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역할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달라.
김우중 씨와 삼일빌딩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지금도 김우중 씨 와는 자주 연락하지만 그가 어디에 있는 지는 밝힐 수 없다. 사실 따지고 보면 김우중 씨야 말로 한국의 영웅이 아닌가. 가슴 아픈 일이다. 당시 대우는 정말 어려웠다. 나는 김우중 씨와 오랫동안 선후배 사이로 관계가 돈독 했고 그에게 많은 신세를 졌다.
그런 연유로 하여 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물(이름은 밝히지 않음)을 소개해 주었고 그 사람은 7천5백 만불을 김우중씨에게 빌려 주었다. 김우중 씨는 그 돈을 가지고 한미은행의 ‘전환사채’를 매입했다. 그 이유는 자금을 더 쓰기 위해서였는데 IMF 직후 자금난으로 곤경에 처한 김우중 씨는 전환사채를 담보로 자금을 썼으나 갚지 못해 결국 담보인 전환사채가 백지사채로 돼버려 김우중 씨는 엄청난 곤경에 빠졌다.
그 때 담보력이 제일 있는 물건이 바로 대우정보시스템과 힐튼 호텔, 아도니스 골프장 뿐이었다. 김우중 씨는 그 돈을 갚지 않으면 안되는 중대한 사항이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바로 대우정보시스템과 관련한 주식파동이었다.
김우중 씨는 자신의 소유주식 4천 5백만불을 주면서 한달 뒤에는 배로 뛸 것이니 그 때 주식을 팔아 본전을 챙겨가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주식이 폭락하면서 2천 5백만불만 찾아가는 소동이 있었다. 김우중 씨는 마지막까지 대우를 살려보려고 발버둥 친 건 사실이다. 그와 김대중 씨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나역시 아무런 메신져 역할을 한 적이 없다.
- 지금까지 대우정보시스템 주식 파동과 관련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조 회장이 40%의 경영권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안다. 대우 GM 컴퓨터에서 조 회장에게 경영권을 인계하려고 주당 12,000원(삼일 회계법인 평가)에 인수 제의했으나 팔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최근에는 독일계회사인 독일 유로피아 사가 15,000원에 매입을 하려고 시도 했었다는데 관계가 없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내가 대우정보시스템의 주식을 산다고 소문이 나니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주당 3만원에 매입을 했었는데 사고 나서 불과 몇 개월 만에 1만원 대로 떨어진 모양이다. 그러나 나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 혹시 2천 5백만불의 당사자가 조 회장이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나와는 상관이 없다.
조풍언 씨는 대우정보시스템과 관련된 대목에서 잘라 말하며 상당히 말을 아끼는 것 같았다. 김우중 씨 사이에 무언가 석연치 않은 관계가 있는 것을 직감적으로 인식하고 계속 반복되는 질문을 했지만 말 꼬리를 잡히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 나온 말은 ‘당시 대우정보시스템의 사장이 중앙정보부 출신이었는데 이 사람이 말을 흘려 정보기관 출신 인사들이 대거 주식 매입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해 대우정보시스템 주식파동에 정보기관 관계자들이 동원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조풍언 씨는 자꾸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다른 약속이 있는지 휴대폰으로 전화가 계속 걸려 왔다. 금새 끝날 테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고는 자리에서 일아나려고 했다. 기자는 마지막으로 두가지 질문 밖에 더 할 수 없었다.
- 김대중 씨의 세 아들과 관련해 이야기 해 달라 / 김홍일의원의 UCLA 병원 입원비를 대 준 적이 있느냐?
나 한테까지 차례가 오지 않는다. 돈 댈 사람들이 줄줄이로 있다. 대통령 아들의 힘이라는 것이 얼마나 막강한지 몰라서 하는 소리다. 나는 밥값도 못 낼 정도다. 그런데 내가 입원비를 대납해 주었다니 있을 수 없는 소문이다. 당시 홍일이는 이런 소문을 예견했는지 1천불짜리 여행자 수표를 준비해 와 입원비를 냈다. 나와 관련된 소문은 모두 추측일 뿐이다.
- 아직도 김대중 씨와의 관계가 있는가?
홍걸이가 최규선이하고 다니면서 많은 잡음이 있어 김대중 씨에게 최규선이는 사기꾼이니 조심시키라고 주의를 주었는데 그것이 DJ의 미움을 사서 그 날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최규선은 이름이 최 사기라고 할 정도로 나쁜 놈이다. 권노갑 의원도 꼼짝 못하게 만들 정도로 어린 친구의 사기술이 대단 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그에게 감사한다 / 최규선이가 나를 살려준 꼴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DJ와 소원해진 것은 ‘아들들의 여자문제가 너무 복잡해 말들이 많다’고 DJ 측근에게 말했던 것이 영원히 멀어졌고 더 이상의 왕래나 연락이 없다”고 말하며 "DJ 아들들의 복잡한 여성편력이 오늘날 이런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다. 누구를 원망 하거나 탓할 것없이 겸허하게 대가를 치루고 있다고 모두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할 말도 많지만 때가 오리라 본다. 맘 고생도 많이 했다. 장사꾼이 본연의 임무를 저버려 오늘과 같은 불행한 결과가 온 것이다. 모두가 내 주둥이 때문이다. 지금도 생각하면 내가 무엇 때문에 귀신에 씌여서 인지 정치권의 최고 실세들 주변을 맴돌았는지 모르겠다.
조풍언 씨는 수시간 동안 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과거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소상하게 말했다. 물론 기자는 과연 그의 말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거짓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진실은 오직 그의 가슴속에 남아 있을 뿐이며 하나님만이 알 뿐이다.
이제 조 씨의 나이 60대 중반이다. 기자와의 첫대면이 12년 전인데 그때 그의 나이 50을 전후 했었고 활기차고 자신만만해 보였었는데 이제 그의 행동과 걸음거리, 얼굴에서 나타나듯 세월의 무상함은 속일 수가 없는 것 같다.
그가 경험한 권력의 그늘과 무기장사를 하여 떼돈을 벌어 교회 선교사업에 쓴다는 대목에서 아이러니칼한 인생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어딘지 허전하게 느껴진다. 기자와 복도를 걸어 나오며 조풍언 씨가 “나는 닭모이를 열심히 주면서 살 것이네’라는 마지막 말에서 그의 인생여정을 엿볼 수 있었다. (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