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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목사들이 정치에 직접 참여하게 되면 재앙이 끊이지 안으며 종국에는 그 나라는 망한다

이경희330 2008. 7. 5. 22:54

인류 역사의 경험법칙은 이미 거의 완전한 결론에 도달한 분야가 있다.

그것들 중 하나가, 종교와 정치를 결합시키면 반드시 실패한다는 거다.

멀리 중세 암흑시대 서구사를 언급할 필요도 없이, 언필칭 자유민주주

의의 종주국이라 할 미국의 건국 이념이 (혹자의 학설로는) 청교도 정

신이라고 표현되기도 하듯, 신대륙에 이주한 청교도들 자체가 사회 공

동체를 경영하는 일에 청교도적 율법을 적용하려 시도하다가 참담하게

실패한 경험을 가진 나라가 또한 미국이다.

 

그런데 이 경험법칙을 확인하기까지(서구사를 기준으로 볼 때)의 시간

을 낭비적 배회의 시간으로 만들어버리는 옛가르침이 있었으니 그것은

곧 청교도들이 가지고 온 성경책에 나오는 예수의 가르침이었다. 그는

말하기를, 내(예수/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했다.

현실 문제에서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염려했고 세상의 경제문제 (빵의

문제) 부담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정부와의

관계, 곧 정치적 및 법적 타협의 산물이기도 한 세금납부 문제에 있어

'시저의 것은 시저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내라고 명확히 구

분했다. 공존하되 같이 놀지 말라는 것이었다.

 

현실적으로 교회와 정치의 분리 문제는 정치 리더쉽과 교회 리더쉽 간

의 관계성 정립 문제가 된다. 둘이 한 울타리 안에 공존하되, 함께 타

협하거나 협상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이 원칙이다. 물론 세상에서는

예외 없는 원칙은 없다 말해도 그게 틀린 말이다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성경은 인간을 성악설에 두고 보는데, 인간은 그 본질이 타락해있어서

본능적으로 본질적으로 그 원칙에서 벗어나기를 위해 애쓰게 되어있다

고 보는 게 기독교적 인간관이다. 이런 관점을 받아들일 건지 아닐 건

지에 대해서는 여기서 토론할 대상은 아니다. 기독교 자체를 거짓이라

보는 견해도 존재하는 게 세상이니 더 말할 나위가 없음이다.

 

정치 지도자와 기독교 목사가 따로 놀라 하는 '오리지날' 가르침과 꽤

오랜 시간을 시행착오로 학습한 경험법칙과의 사이에는 어떠한 모순도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기독교 내부자들끼리의 이야기이다.

 

이 분리(separation)의 법칙은 타락한 먹물들에 의해 아주 점진적으로

교묘한 논리의 미로를 엮어가며 외면 또는 파기되어왔다. 흔히 들리는

바대로, 목사도 국민이고 사회 공동체 구성원이고 투표권을 갖는 유권

자이니깐두루... 목사와 신앙인은 (이때 목사와 신앙인이라는 말을 함

께 묶어들어가는 걸 주목하라) 정치건 사회문제건 경제 문화 영역이건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야 한다"는 거다.

 

교회밖과 안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공통으로 이 교묘한 궤설에 쉽게

넘어가는 게 바로 이런 '가면'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가는

이는 하나님 당신이시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고 줄이

고 세우고 없애고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럼 사람이 하나님이게?

 

오랜 시행착오 학습을 거쳤고, 지금도 기독교 나라라고 칭해지며 자유

민주주의의 최선봉 수색대 위치를 담당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미국에선

이런 정교분리의 원칙을 어떻게 현실속에서 적용하는가를 보는 방법도

이 개념 이해에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에서는 목사들이 정치 사회 경제 현실상에 대해 지적하고 평가하고 비판할 수있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지대가 있다. 주일 강대상에서의 설교에서는 어느 특정 정당이나 정파를 지적하는 발언을 할 수 없다는 '불문률'이있다. 물론 말할 필요도 없이, 국가가 설교 내용을 감시할 수도 없다.이런 불문률과 실천 관행을 통해 볼 때, 목사가 자기 현직을 포기하지

않고 정치판에 뛰어들어 어느 역할을 담당한다는 것은 일단 성경적 일

탈이 되는 것뿐만 아니라 당장 헌법조항 위배가 된다. 곧 범죄가 된다.

 

같은 맥락으로 미국에선 목사건 신부건 승려건 랍비건 구루이건 한 점

다를 바 없이 예를 들어 세금포탈죄에 걸리면 영락없이 쇠고랑을 찬다.

자금세탁 우범 가능성을 감시하는 대상에서 교회가 예외지대가 아니다.

교회가 세금 납부가 아니라 세무 보고(information report)를 하게 되

어있다. 돈(화폐)을 국가가 발행하는 것이고, 교회로 들어가는 헌금이

그 국가 돈(화폐구매력)을 수단(매개)으로 하기 때문이다.

 

설상가상, 교회 목사가 정당에 어느 요직을 맡는다거나 또는 선거철에

자기 선호정당의 선거유세 현장을 시종 따라다니면서 지원시위를 하는

일은 가히 상상 자체를 불허한다. '정치참여'라는 말을 투표권 행사가

아니라 이렇게 '정당활동에의 참여'라고 협의로 해석하면 지금 한국의

인명진 목사라든가 김진홍 목사라든가 하는 자들은 정작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준 나라인 미국의 기독교가 그 내부 유권해석과 오랜 전통

으로 유지해오고 있는 '정교분리의 원칙'을 엄숙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자유분방주의' 신학(학설) 감염자들이라는 사실이 확연해진다.

 

다시 경험법칙으로 말하면, 이 나라가 지금 실패를 향해 가려 하는 중

이라는 말이다. 세상적인 눈으로 볼 때에도 경건한 사람들이 많았었던

청교도 공동체도 와해되었다는 걸 눈여겨보는 이가 없다. 즉 정치판은

공동체의 질서유지를 위한 관리기술 협상의 마당이라고 하는 교과서적

의미에도 아랑곳 없이 기독교계의 목사들의 직접참여로 개화되는 곳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다. 양자가 그 "역할"이 전혀 다르다는 얘기다.

 

자 그럼 여기 한국적 상황에서 개개인이 돈을 많이 벌면 좋은 일이지만, 나라 전체 국민이 돈을 많이 벌면 그건 버나마나가 되는 사회과학적 관점이 우리 인간 개체적 관점이 보지 못하는 한계 지대를 지적할 만하게 한다. 착한 어린이와 나쁜 어린이를 구분하는 것처럼 좋은 정치인과 못� 정치인을 구분해, 못� 정치인들을 향한 반복되는 이야기들 ㅡ 못됐다, 못됐다, 못됐다, 하다 보면 그게 그룹핑이 되고, 정당별 집합 개념이 되고, 그게 지역적으로 (우리사회 구조상) 경상도는 좋은 동네, 전라도는 나쁜 동네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제논의 패러독스처럼, 이게 위험하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인문학적, 신학적 접근이 계속되다 보면, 목사의 현실 참여,

목사들의 사회 참여, 목사들의 정치 참여가 누적되다 보면, 그건 다시

전체로서 '실패'의 반복이 예견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것을 법칙

이라고 해서 사회적 역사적 경험법칙이라 이름해본 것이다. 이 부분에

관한 한, 거의 확신에 찬 결론이라 말할 수 있다. 물론 개인 생각이다.  

 

정치목사들이 정치에 직접 참여하게 되면 그 나라가 재앙이 끊이질 않

게 되는 이유를 성경은 명령 위반죄 때문이라 본다는 말이다. 뭔 명령?

교회와 세속과의 분리(separation)의 명령 위반 때문이다. 이 두 영역

이 합할 수 있는 공통 통로는 단지 권력 뿐이다. 교회권력과 정치권력.

 

지난 천 오백 년의 서구의 경험이고,이명박 정부 그들은 이제 그걸 시작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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