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현 경제학부 교수)은 지난 6월23일 기자 등과 함께 한 사석에서 얼핏 “총장 시절 국가정보원(국정원)으로부터 3~4개월 정도 도청당하고 미행당한 적이 있다”라고 말했다. 정식 인터뷰는 아니었다. 한담(閑談)을 나누던 중 바람이 스치듯 지나가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의 발언 내용은 거의 태풍급이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 국정원의 전신인 안기부가 불법 도청팀인 ‘미림팀’을 꾸려 정계와 관계, 언론계 등에서 활동하던 유력 인사들을 대상으로 불법 도·감청했던 사실이 지난 2005년 7월 하순께 언론에 의해 일부 드러나면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에 김승규 당시 국정원장은 같은 해 8월5일 기자회견을 통해 “이제부터 백지에 국가정보원의 역사를 새롭게 쓴다는 비장한 각오로 다시 시작하려고 한다”라고 고해성사를 했다. 그러면서 그는 “불법 감청은 국민의 정부 시절인 2002년 3월 이후 완전히 근절되었다”라고 고백했다.
“내가 자주 가던 술집까지 조사했다”
김원장의 회견 내용에 따라 이후 본격적인 검찰 수사가 시작되면서, 국정원은 청사를 압수수색당하는 수모까지 겪었다. 검찰은 국정원이 국민의 정부에서도 정계와 재계뿐 아니라 언론계와 사회 각계 유력 인사들을 대상으로 휴대전화를 불법 감청한 사실을 밝혀냈다. 그리고 이를 묵인했거나 사주한 혐의로 임동원·신건 전 원장이 구속되었고, 국민의 정부의 국정원 국내 담당 2차장이었던 이수일씨가 자살하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당시 ‘그렇다면 노무현 정부에서는 불법 도청이 없었나’ 하는 의문도 제기되었다. 이에 대해 검찰은 같은 해 12월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2002년 4월 휴대전화 감청 장비 폐기 이후 현재까지 불법 감청은 없었다. 휴대전화는 합법 감청도 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다”라고 덧붙였다. 이후 불법 도·감청 문제는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런데 지난 6월23일 정 전 총장은 당시의 검찰 수사 결과를 뒤집을 수 있는 충격적인 발언을 한 것이다. 노무현 정부에서도 불법 도청이 있었다는 주장이었다. 여기에다 미행까지 당했다고 했다.이에 기자는 지난 7월15일 오후 정 전 총장을 다시 만났다. 서울대 관악캠퍼스에 있는 그의 연구실에서였다.
|
|
|
ⓒ연합뉴스 |
그리고 지난 6월에 했던 발언에 대해 다시 물었다. 그런데 정 전 총장은 6월 말에 했던 주장과는 다소 차이나는 답변을 했다. “미행당한 것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도청은 했을 것이다. 그런데 확인되지는 않았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내가 총장으로 있던 2005년 늦봄부터 여름까지 국정원이 내 뒷조사를 했던 것은 확실하다”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국정원이 ‘개인 사찰(査察)’을 벌였다는 주장이다. 정 전 총장이 자주 찾는 술집까지 뒷조사를 했다는 것이다. 정 전 총장이 ‘뒷조사’를 당했다고 하는 시점에 국정원은 고영구·김승규 씨가 원장이었고, 국내담당 2차장은 이상업씨였다.
그렇다면 무슨 사연이 있었기에 국정원이 정 전 총장을 뒷조사했다는 것일까. ‘뒷조사’를 받게 된 배경을 헤아리기 위해서는 노무현 정부, 엄밀히 따져서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 정운찬 총장이 빚었던 갈등 사례들을 반추해볼 필요가 있다.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 지 1년 정도 지난 시점에 여권으로부터 ‘서울대 폐지론’이 불거졌고, 각계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이에 대해 정 전 총장은 지난 2007년 8월 출간된 자서전 <가슴으로 생각하라>에서 ‘마치 대한민국 교육 문제의 주범이 서울대학교인 것처럼 몰아붙였다. 정제되지 않은 말들을 내뱉으며 서울대를 공격했는데, 비판과 비난의 핵심 대상은 결국 나였다. 그러나 그것을 촉발한 원인 역시 나에게 있었다. 교육자로서의 소신이랄까, 지구화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으로서의 양식이랄까. 아무튼 나는 총장이 되기 전부터, 대학이 가르칠 학생들을 선발하는 권한은 그 대학의 손에 돌려주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라고 술회했다. 처음부터 노무현 정부가 표방해온 교육 평준화 정책과는 상반된 견해를 갖고 있었던 셈이다.
정 전 총장 자서전에도 비슷한 내용 들어 있어
노무현 정부의 교육 정책은 △본고사 부활 △기여 입학제 △고교 등급제를 금지하는 ‘3불 정책’으로 요약된다. 이에 대한 정 전 총장의 견해는 ‘노(NO)’였다. “‘3불 정책’이라는 하나의 정부 방침을 마치 변경 불가능한 국시(國是)처럼 떠받드는 것은 전근대적인 교조주의적 발상”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당연히 노무현 정부와 잦은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정 전 총장이 ‘뒷조사’를 당했다고 주장했던 2005년에도 여권과 또다시 대립했다. 뒷조사를 당하기 전인 2005년 초에 대학의 자율성 문제로 노무현 정부와 갈등을 빚었던 것이다. 서울대는 2005년도 통합교과형 논술시험을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그러자 노대통령을 포함해서 전체 여권으로 전선이 확대되었다. ‘3불 정책’의 하나인 ‘본고사 실시 금지’에 저촉된다며 정총장을 강하게 비난했다. 이같은 여권의 공격에 맞선 정총장은 “이 문제를 관철하지 못한다면 내가 총장직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라고 비장했던 당시 심정을 밝히기도 했다. 그만큼 노무현 정부와 정총장은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사이’였던 셈이다.
|
|
|
ⓒ연합뉴스 |
그래서 국정원이 정 전 총장의 뒷조사를 했던 것일까. 뒷조사와 관련해서 앞서 언급했던 자서전 <가슴으로 생각하라>에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 ‘내가 정면으로 맞서자 불을 켜고 나의 과거사와 개인적인 흠집을 뒤지던 여권은 별것을 못 찾았던지 마침내 눈을 슬그머니 감아주었다.’ 바로 정 전 총장이 기자에게 “뒷조사를 당했다”라고 언급했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문구다.
기자는 앞서 언급했듯이 지난 6월23일과 7월15일 두 차례에 걸쳐 정 전 총장을 만났다. 그리고 ‘도청·미행·뒷조사’ 등에 대한 그의 얘기를 들었다. 그런데 정 전 총장은 자신의 발언이 기사로 게재되는 것에는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시사저널>은 정 전 총장의 사회적 위상과 발언 내용의 중대성을 감안해 공익 차원에서 이를 보도하기로 결정했다.
정 전 총장과의 정식 인터뷰는 아니었으나, 인터뷰 형식을 빌어서 그와의 대화 내용 일부를 싣는다. 이와 함께 <시사저널>은 정 전 총장의 발언과 관련된 자료를 확보하고 있음을 밝혀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