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금융제도 추종 벗어나 한국형 찾아야
(서울=연합뉴스) 김문성 정성호 최윤정 기자 = 위기에 빠진 미국의 금융산업이 한국의 벤치마킹 모델이 될 수 있을까.
서브프라임 모기지론(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로 촉발된 금융위기로 국제 금융시장에 군림하던 리먼브러더스와 메릴린치 등 미국의 대형 투자은행(IB)들이 줄줄이 몰락하면서 이 같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미국 정부가 이번 위기를 계기로 시장 자율에 맡기는 기존의 자유방임 정책에서 선회해 금융산업에 대한 규제를 강화할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우리 정부가 역점 과제로 추진하고 있는 대대적인 금융규제 완화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전문가들은 미국식 IB 모델을 일방적으로 추종하기보다는 한국형 성장 모델을 모색해야 하며 미국과 같은 금융 시스템의 허점을 막기 위해 금융회사의 건전성 규제와 감독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 "미국식 성장모델 환상 버려야"
그동안 미국이 IB를 중심으로 금융공학을 이용한 파생상품과 인수.합병(M & A) 등으로 막대한 이익을 내며 세계 자본시장을 주름잡자 한국은 동경의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1997년 외환위기를 맞은 우리나라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으로 살아난 뒤 외환시장과 주식시장을 개방하며 국제 금융시장에 몸을 맡겼으며 사모투자펀드(PEF)를 도입하는 등 국내 자본시장 육성에 역점을 뒀다.
그 사이 미국의 금융산업은 저금리를 기반으로 한 풍부한 유동성을 바탕으로 국제 금융시장에서 고속 성장을 해 왔다.
이를 지켜본 우리 정부는 국내에 안주해서는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해외로 무대를 넓히는 데 전력을 쏟고 있다. 그 대표적인 방법이 한국판 골드만삭스나 메릴린치의 육성을 제시하며 만든 자본시장통합법의 내년 2월 시행이다.
금융권역의 장벽을 허물고 다양한 금융상품을 허용해 미국과 같은 대형 IB가 탄생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정부는 이를 통해 국내 금융산업이 선진화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미국의 IB 모델이 국내 금융산업이 나아갈 `바이블'로 인식돼 왔다.
하지만 미국의 대형 IB와 최대 보험사인 AIG 등이 금융위기에 휩쓸려 침몰하면서 신중론이 제기되고 있다.
한양대 하준경 교수는 "IB는 고위험.고수익을 추구하는데, 시장 메커니즘이 항상 정확하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면서 "IB가 금융 선진화의 유일한 길은 아니며 미국이나 영국 이외의 다른 선진국들도 다양한 방법으로 금융을 발전시키고 있는 점을 감안해 우리에게 맞는 대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LG경제연구원 신민영 박사는 "우리나라는 그동안 미국을 모델로 자본시장통합법 등을 도입했는데 난감한 상황이 됐다"며 "미국 시장의 변화를 반영해 건전성 및 규제 강화 바람이 부는 것은 물론 자통법도 손질해야 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그러나 성신여대 강석훈 교수는 "미국의 대형 IB가 이번에 폭격을 맞았지만 리스크(위험)를 안고 금융 파이낸싱을 해주는 기능 자체가 불필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새로운 IB 출현의 기회가 될 수 있다"며 "자통법의 방향 자체를 바꾸는 것은 기회를 버리는 것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 "규제완화 속도조절…감독 강화해야"
자유방임적인 미국 방식의 금융시스템에 대한 점검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연세대 김정식 교수는 "미국의 금융 자본주의는 규제를 완화하는 방향으로 산업을 발전시키는 형태"라며 "미국의 감독시스템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미국은 여러 개의 금융감독기구가 있는데도 금융 부실을 예방하지 못했는데 영국식 단일 감독체계와 비교해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분석하고 우리나라의 개선점은 없는지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규제 완화를 통해 금융산업 성장의 토대를 만들겠다는 우리 정부의 계획에 대해서도 면밀한 검토와 보완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많다.
정부는 현재 1천300여건의 금융 규제 가운데 상당수를 없애거나 완화할 계획이다. 금융회사의 신규 설립요건 완화, 파생금융상품 발행과 거래에 대한 규제 완화, 산업자본의 은행 소유지분 한도 확대, 금융지주회사에 제조업 자회사 허용, 헤지펀드 허용, 채권보증 전문회사의 설립 허용 등이 대표적이다.
이처럼 규제를 풀어주면 금융시장이 큰 변화의 물결을 맞게 되지만 정부는 금융회사의 건전성이나 금융 시스템의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을 함께 내놓지 않고 있다. 규제 완화에만 쏠려있다는 평가다.
고려대 이필상 교수는 "금융산업의 경쟁력을 키우기 위한 규제 완화에 공감하지만 위험 관리 능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규제를 지나치게 많이 풀어줄 경우 금융회사가 부실화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규제 완화와 감독 강화가 맞물리지 않을 경우 금융시장이 불안해지면서 위기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삼성경제연구소 권순우 박사는 "미국식 자본시장 시스템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감독이 제대로 안된 것이 문제"라며 "시장이 너무게 빠르게 발전하는 것을 감독체계가 못 따라간 것"이라고 진단했다.
성신여대 강석훈 교수는 "미국에 금융위기가 온 것은 기본적으로 IB 분야에 대한 금융감독이 부족하고 리스크를 사전에 제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파생상품의 위험성 등에 대한 감독을 철저히 하고 금융회사의 건전성 감시를 강화해야 한다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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