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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 생각하면 잡힌 게 다행" 국보법 굴레속 애틋한 사랑

이경희330 2008. 3. 2. 02:19

10년 도피생활 윤기진·황선 부부 사연


10년 만에 두 딸을 처음으로 한품에 안아보는 남편을 바라 보던 황선(34·전 민주노동당 부대변인)씨는 울음을 몰래 삼켰다. 기나긴 수배생활로 두 딸을 제대로 만나보지조차 못했던 남편이 경찰에 붙잡히면서 오히려 아이들을 마음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역설적인 상황에 황 씨의 눈시울은 더욱 시큰해졌다.

황씨의 남편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배돼 10년간 도피 끝에 지난 27일 집 앞에서 붙잡힌 윤기진(34·전 범청학련 남측본부 의장)씨.

언제나 미행과 도청의 위험에 놓여 있다 보니 휴대전화는 물론 집 전화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었던 황씨 부부.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한 번 만날 때 다시 만날 약속을 정하고는 속절없이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했다. 만나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버스에서 택시로, 지하철로 다시 버스로 갈아타기를 수차례 반복하며 '누가 뒤따라 붙지는 않을까' 라는 불안감에 시달려야 했다.

만남의 장소는 '흔들리는 차 안'이 대부분이었고 그 시간도 고작 몇 분. 아이들과 부모님 안부를 묻고 나면 서로의 온기를 느끼기에도 부족한 시간이다. 가끔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까지 남편이 나오지 않을 때는 극도의 불안감에 휩싸이기도 했다.

'어디서 붙잡힌 것은 아닐까, 이 자리에서 계속 기다려도 되는 걸까….'

황 씨는 남편 없이 혼자 두 번의 출산 과정을 겪어야 했다. 한창 입덧이 심해져 산부인과를 찾을 때면 황씨는 남편과 함께 병원을 찾은 임신부들을 물끄러미 바라만 봐야했다.

첫 딸 민이(4)를 낳을 당시 분만실 안에서 때마침 걸려온 남편의 전화를 받기 위해 황씨는 간호사들과 실랑이를 하기도 했다. 분만실 밖에서 며느리의 출산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시어머니의 휴대전화로 남편이 전화를 걸어왔던 것.

 
시어머니는 분만실 문을 박차고 들어와 간호사에게 황씨가 전화를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사정했지만 '감염 가능성'을 이유로 거절당했다. 그러나 남편의 전화를 너무도 받고 싶었던 황씨가 간호사에게 "남편이 수배자라 오지 못한다"며 사정을 털어놨고 그제서야 "고생이 많다"는 남편의 목소리를 전화를 통해서나마 들을 수 있었다.

한 해, 두 해 아이들이 커가며 걸음마를 배우고 옹알이를 하면서 두 딸이 집에 '아빠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황씨는 그저 "아빠는 나쁜 사람들이 잡으러 다녀서 민이랑 겨레랑 같이 살지 못한다"고 말해야 했다.

남편이 기나긴 수배생활을 하다보니 살림살이도 쉽지 않았다. 강연료나 원고료로 근근이 살림을 꾸려가다가 결국 시부모님께 손을 벌릴 때면 '이게 무슨 불효인가'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우리 부부의 사랑은 무화과 같아요. 꽃은 피우지 않고 열매만 맺는 무화과." 남들 처럼 알콩달콩, 티격태격 신혼생활을 맛보지 못한 채 두 아이의 학부모가 돼버린 황 씨의 말에는 아쉬움이 묻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황씨는 지난 10년의 세월을 후회하지 않는다. 지난 2005년 평양에서 아리랑 공연을 관람하다 낳은 둘째딸 겨레(3)를 바라보며 황씨는 하루 빨리 남과 북의 핏줄이 하나로 이어지길 바라고 있다.



CBS사회부 강인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