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관광증'을 내밀었다. 그 속에 얼굴, 이름, 생년월일, 직장직위, 주소가 나와있다.
입경(入境) 비자인 셈이다. 북측출입사무소의 군인은 내 얼굴을 쳐다본 뒤, 앞에 놓인 A8용지에 인쇄된 관광객 명단과 사진들을 훑었다. 명단 용지의 맨 첫 번째 열에 내 얼굴과 '조선일보 부장'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관광객들 중 1번으로 내가 등록돼있었던 것이다. 군인은 무슨 말을 할 것 같은 표정을 짓다가 명단에 체크했다.
출입사무소를 나오니, 광장에 관광버스 10대가 서있었다. '개성 관광' 도안이 그려진 버스였다.
북측 안내원 세 명이 탔다. 두 명은 앞자리에, 한 명은 뒷자리에 앉았다. 관광 일정에 나온 대로 정각 오전 8시40분에 버스가 출발했다. 주변 산야(山野)에는 나무가 없었다. 야산 머리까지 구불구불 밭을 일궈놓았으며, 그 흙들은 푸석푸석했다.
'안내요원 ×××'이라는 명찰을 단 사내가 일어나서 마이크를 잡았다.
"…개성 관광이 아직은 시작 단계이니 불편한 점이 혹 있더라도 이해해주시고, 아시다시피 버스 안에서는 시내 거리나 군인들을 찍는 것은 금지돼 있으니 조금만 주의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북측 안내원 동무가 '너무 세련되게' 말을 하니, 낯선 기분이 들었다.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그는 개성 시내 명소와 전설 등을 소개하면서, 성적(性的) 농담까지 곁들었다.
"늙은 남편이 빌빌거려 개성 인삼을 먹였더니, 너무 세져서, 부부가 만날 방 안에만 틀어박혀 지내니…."
틀에 박힌 '민족' '통일' '주체' '위대한 수령 동지' 등은 간데 없다. 좀 지나서, 그는 "지금 '정전 상태'(수면)로 들어간 분들이 있는데, 제가 노래 한 곡을 부르겠다"고 했다. 노래도 관광 안내의 레퍼토리에 들어있는 것 같았다.
그는 '뜨거운 가슴'이라는 북한 유행가를 열창했다. 관광객들이 "앙코르, 앙코르"를 연호하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 곡을 더 불렀다. 마치 동남아 관광버스에 타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1999년 여름, 나는 유람선으로 금강산에 간 적이 있었다. 당시 하선(下船)하기 전에, 현대 측은 관광객들을 모아놓고 "북측 사람들에게 먼저 말을 붙이지 말라"는 '선실 교육'까지 시켰다. 실제 북한 안내원들에게 말을 걸어도 사무적인 대답만 돌아오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개성 관광에서는 북측 안내원과 관광객들이 서로 말을 섞었다. 사적인 농담을 주고받으며 낄낄거리기도 했다. 선죽교에서였다. 북측 안내원이 내게 따라붙으며 먼저 말을 걸어왔다.
―무슨 일을 하세요?
"직장 다닙니다."
그는 씩 웃으며 "일보사(日報社)?"라고 말했다. 알고 접근한 것이다.
―다른 대통령들은 취임 때 지지율이 80%가 넘었다는데, 이명박 대통령만 50%라면서요?
"나보다 더 잘 아시네. 그걸 어떻게 아세요?"
―여기 오시는 남측 분들한테 듣고, 또 남측 테레비(TV)도 다 보니까요. 그런데 앞으로 북남합작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이명박씨가 됐으니 많이 바뀌겠지요?
"뭐, 잘될 겁니다."
―이번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얼마나 이길 것 같아요?
"…."
그의 말투는 조심스럽고 진지했다. 내가 설명하면 수긍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북측 안내원의 스타일이 이렇게 바뀌는 동안, 북한 관광도 많이 달라졌다.
1999년 금강산 관광은 유람선에서 머물면서 출퇴근하듯이 이뤄졌다. 도시락을 지참한 채 올라갔다가, 산 입구 주차장에 앉아 그걸 먹고는 다시 배에 올라탔었다. 금강산사업에 들어간 천문학적인 돈 1조5000억원을 떠올리면, 금강산 관광은 절망으로 비쳤다. 그때 이렇게 썼다.
"우리 관광객이 들어오면서 금강산 코스는 북한 주민에게는 접근 금지 구역이 됐다. 한국 관광객들만의 구역이었다. 금강산 속에 '북한'이 없다는 뜻이다. 개혁·개방할 대상이 금강산에 없다면 금강산 관광으로 북한의 개혁·개방을 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8년 뒤인 2007년 가을, 나는 육로로 금강산을 갔다. 금강산 호텔에서 하룻밤을 잤다. 금강산에는 대형 호텔 5곳뿐만 아니라, '신용카드'를 받는 음식점, 가라오케, 포장마차들이 들어섰다. 또 유람선으로 들어오던 시절의 출입관리소 자리는 한국 민간인이 경영하는 '고성항 횟집'으로 바뀌어 있었다.
북한 잠수함들이 떠있던 군항(軍港)의 모습은 찾을 수 없고, 비치 호텔과 등대, 수은 가로등이 들어선 선창으로 관광객들이 한가롭게 산책하고 있었다. 횟집에서 소주와 맥주를 섞어 마시면서 '여기가 남인지 북인지' 혼란스러웠다.
금강산으로 올라가는 산행 포인트마다 노점들도 한 개씩 생겨났다. 말 걸면 "우리 그런 거 모릅네다"라고 일삼던 그 '안내원 동무'들은 "좀 지나면 깔딱고개가 나올 테니 미리 빵이나 사과 음료를 준비하시라요"라며 상술(商術)을 발휘하곤 했다.
하지만 금강산은 개성의 파괴력에 비하면 어쩌면 별거 아닐지도 모른다. 금강산은 엄격히 말해 '자연(自然)'이지만, 개성은 북한 주민 30만 명이 사는 도시다. 그 속으로 날마다 자본주의 관광객들을 태운 관광버스 10대가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오전 10시, 개성 관광의 첫 코스인 박연폭포에 도착했다. 입구에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몇몇 토착 양반들의 유흥지였던 박연폭포를 모든 인민들의 유원지로 돌려줬다'는 게시판이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관광하는 동안 북한 인민들은 접근 금지다.
주변 매점에서는 북한산 과자와 음료수들을 팔았다. 종이컵 커피 한잔에 1달러였다. 북한 주민들의 평균 월급은 4달러다. 유니폼을 입은 여성 종업원들이 "필요한 거 없으세요"라며 호객을 했다.
관광객이 가는 곳에는 북한의 일반 주민은 없다. 북한 주민들은 오전에 박연폭포를 구경할 수 없고, 오후에는 늘 지나치던 '민속여관'(전통 기와집 단지)이나 선죽교 근처에는 얼씬 못 한다.
과연 물샐틈없이 차단할 수 있을까. 정몽주의 집터인 '숭양(?陽)서원'을 구경하기 위해, 시내 도로변에 관광버스들을 주차했다. 주차한 도로 쪽으로 북한 주민들의 통행은 통제됐다. 맞은편 도로로만 주민들은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지나갔다.
어쩌면 개성 주민들은 "보행 시 남측 관광객들 쪽으로 응시하지 말고 그냥 지나가도록" 교육을 받았는지 모른다. 거의 차를 볼 수 없는 시내 거리에 관광버스 10대가 서있고, 관광객들이 모여 있는데도, 북한 주민들은 고개도 돌리지 않는다. 마치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처럼 지나갔다.
그러나 도로의 이면 골목 안에서 북한 주민들은 발걸음을 멈춘 채 홀린 듯 쳐다보고 있었다. 혹은 비닐로 덮어씌운 집의 창문에서, 공사 중인 건물의 빈 구멍으로, 동네 안쪽 공터에서, 들판에서 멍하니 우리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들은 우리를 보면서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 그 상념이나 욕망(欲望)은 결코 권력과 감시의 힘으로도 통제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모습은 과연 북한 주민들에게 희망을 줄까, 절망을 줄까.
적어도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 '전설적 영웅김정일 장군님 고맙습니다'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동지'라는 북한 당국의 선전물은 100% 진실이 아닐 수 있음을 깨달을지 모른다. 바깥에는 정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도….
개성 관광을 다녀온 러시아인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역사학)는 "개성 관광에서는 남북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를 볼 수 있게 되면서 엄청난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했다.
현대 측은 장사의 논리로 접근했을 것이다. 하지만 개성 관광은 '트로이 목마(木馬)'처럼 될지 모른다. 폐쇄된 성(城) 안으로 자본주의 전사들이 숨어들어가서 어느 순간 일제히 튀어나올 때 무슨 일이 벌어질까. 현대 측으로는 기업의 판돈을 걸었지만, 그 패(牌)를 받아들인 북측이야말로 더 큰 도박을 하고 있는 셈이다.
개성 관광은 작년 12월 5일부터 시작됐다. 아침 8시에 군사분계선을 넘어가 정각 오후 5시에는 다시 나와야 한다. 하루 관광 인원을 500명으로 한정해 놓았다. 당일 관광료는 18만원(점심 포함). 서울에서 임진각까지 오가는 버스 비용은 별도다.
육로(陸路)로 휴전선을 넘는다는 의미를 빼고, 오로지 관광 상품만으로 봤을 때 비싼 편이다. 관광 일정은 박연폭포, 그 바로 위쪽에 있는 관음사, 시내로 들어와 민속여관에서 점심, 숭양서원, 바로 옆 선죽교, 고려박물관이 전부다. 개인마다 취향이 다를 수 있지만, 내게는 단조로웠다.
북한 관광에서 늘 쟁점이 되는 것이 북한 정부의 몫이다. 개성 관광 요금 중 100달러, 금강산 관광의 96달러(2박 기준)는 북한의 수중으로 떨어진다. 북한 당국은 우리 관광객이 한 사람 들어올 때마다 앉아서 100달러씩 챙기는 셈이다.
금강산은 지금까지 180만 명, 개성은 시작 두 달 반 만에 2만2472명이 관광했다. 이들 관광료에서 북한으로 넘어갔을 현찰의 행방을 놓고 '북한 관광=대북 퍼주기(일각에서는 한국으로 총구를 겨누는 군자금이라고 주장)'를 떠올릴 수도 있다.
일부 확신을 갖고 있는 보수주의자들로서는 북한 관광은 결코 용납하기 어려운 것이다. 실제 내 주위에서는 관광 기회가 생겨도 "이런 관광으로 북한 독재 정권을 도울 수 없다"며 '소신'으로 안 갔던 이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동서독 시절, 서독도 이와 비슷한 '관광 요금'을 동독 정권에 지불했다. 서독 지역에서 서베를린으로 들어가려면 동독의 영토를 지나야 한다(베를린은 동독 영역에 있었음). 이 도로를 지날 때 서독 측은 도로사용료를 냈고, 도로의 유지·하자보수 비용도 모두 서독 측이 맡았다. 서독 차량은 이 도로를 이용할 수는 있었지만, 이 도로 바깥으로 벗어나 동독 지역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30년 동안 동독이 서독 주민들로부터 받아들인 도로 이용료는 약 10억 마르크(통일 당시 1마르크는 약 550원)에 달했다. 또 입국 비자는 15마르크, 통과 비자는 5마르크였다. 비자 발급료로 동독은 1968년부터 통일 전해인 1989년까지 10억 마르크를 챙긴 것으로 집계됐다. 독일 사례는 북한 당국의 몫을 옹호하기 위함이 아니라, 통일과 통합을 지향하는 분단 현실에서는 어쩔 수 없는 비용일지 모른다는 얘기다.
주독 한국대사관의 이봉기 통일관(훔볼트대학 박사 과정)은 "분단과 통일 사이에는 또 다른 단계인 화해·협력·동질성 회복 과정이 숨어있다"고 말했다. '접촉'을 통한 북한 주민들의 의식 변화가 없이는 실질적인 통일은 어려운 것이다.
오후 5시 북측 출입사무소에 되돌아왔다. 버스에서 내리니, 북측 안내원이 "부장 선생님, 좋게 써주세요"라고 인사했다. 군인들은 관광객들의 디지털 카메라에 찍힌 사진들을 즉석에서 검사했다. 참고로 개성 관광에는 디지털 카메라의 반입만 허용된다.
입경(入境) 비자인 셈이다. 북측출입사무소의 군인은 내 얼굴을 쳐다본 뒤, 앞에 놓인 A8용지에 인쇄된 관광객 명단과 사진들을 훑었다. 명단 용지의 맨 첫 번째 열에 내 얼굴과 '조선일보 부장'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관광객들 중 1번으로 내가 등록돼있었던 것이다. 군인은 무슨 말을 할 것 같은 표정을 짓다가 명단에 체크했다.
북측 안내원 세 명이 탔다. 두 명은 앞자리에, 한 명은 뒷자리에 앉았다. 관광 일정에 나온 대로 정각 오전 8시40분에 버스가 출발했다. 주변 산야(山野)에는 나무가 없었다. 야산 머리까지 구불구불 밭을 일궈놓았으며, 그 흙들은 푸석푸석했다.
'안내요원 ×××'이라는 명찰을 단 사내가 일어나서 마이크를 잡았다.
"…개성 관광이 아직은 시작 단계이니 불편한 점이 혹 있더라도 이해해주시고, 아시다시피 버스 안에서는 시내 거리나 군인들을 찍는 것은 금지돼 있으니 조금만 주의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북측 안내원 동무가 '너무 세련되게' 말을 하니, 낯선 기분이 들었다.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그는 개성 시내 명소와 전설 등을 소개하면서, 성적(性的) 농담까지 곁들었다.
"늙은 남편이 빌빌거려 개성 인삼을 먹였더니, 너무 세져서, 부부가 만날 방 안에만 틀어박혀 지내니…."
틀에 박힌 '민족' '통일' '주체' '위대한 수령 동지' 등은 간데 없다. 좀 지나서, 그는 "지금 '정전 상태'(수면)로 들어간 분들이 있는데, 제가 노래 한 곡을 부르겠다"고 했다. 노래도 관광 안내의 레퍼토리에 들어있는 것 같았다.
그는 '뜨거운 가슴'이라는 북한 유행가를 열창했다. 관광객들이 "앙코르, 앙코르"를 연호하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 곡을 더 불렀다. 마치 동남아 관광버스에 타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1999년 여름, 나는 유람선으로 금강산에 간 적이 있었다. 당시 하선(下船)하기 전에, 현대 측은 관광객들을 모아놓고 "북측 사람들에게 먼저 말을 붙이지 말라"는 '선실 교육'까지 시켰다. 실제 북한 안내원들에게 말을 걸어도 사무적인 대답만 돌아오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개성 관광에서는 북측 안내원과 관광객들이 서로 말을 섞었다. 사적인 농담을 주고받으며 낄낄거리기도 했다. 선죽교에서였다. 북측 안내원이 내게 따라붙으며 먼저 말을 걸어왔다.
―무슨 일을 하세요?
"직장 다닙니다."
그는 씩 웃으며 "일보사(日報社)?"라고 말했다. 알고 접근한 것이다.
―다른 대통령들은 취임 때 지지율이 80%가 넘었다는데, 이명박 대통령만 50%라면서요?
"나보다 더 잘 아시네. 그걸 어떻게 아세요?"
―여기 오시는 남측 분들한테 듣고, 또 남측 테레비(TV)도 다 보니까요. 그런데 앞으로 북남합작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이명박씨가 됐으니 많이 바뀌겠지요?
"뭐, 잘될 겁니다."
―이번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얼마나 이길 것 같아요?
"…."
그의 말투는 조심스럽고 진지했다. 내가 설명하면 수긍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북측 안내원의 스타일이 이렇게 바뀌는 동안, 북한 관광도 많이 달라졌다.
1999년 금강산 관광은 유람선에서 머물면서 출퇴근하듯이 이뤄졌다. 도시락을 지참한 채 올라갔다가, 산 입구 주차장에 앉아 그걸 먹고는 다시 배에 올라탔었다. 금강산사업에 들어간 천문학적인 돈 1조5000억원을 떠올리면, 금강산 관광은 절망으로 비쳤다. 그때 이렇게 썼다.
- ▲ 개성 관광의 첫 코스인 박연폭포. 우리 관광객이 관광하는 동안 북한 인민들은 접근이 불가하다.
그리고 8년 뒤인 2007년 가을, 나는 육로로 금강산을 갔다. 금강산 호텔에서 하룻밤을 잤다. 금강산에는 대형 호텔 5곳뿐만 아니라, '신용카드'를 받는 음식점, 가라오케, 포장마차들이 들어섰다. 또 유람선으로 들어오던 시절의 출입관리소 자리는 한국 민간인이 경영하는 '고성항 횟집'으로 바뀌어 있었다.
북한 잠수함들이 떠있던 군항(軍港)의 모습은 찾을 수 없고, 비치 호텔과 등대, 수은 가로등이 들어선 선창으로 관광객들이 한가롭게 산책하고 있었다. 횟집에서 소주와 맥주를 섞어 마시면서 '여기가 남인지 북인지' 혼란스러웠다.
금강산으로 올라가는 산행 포인트마다 노점들도 한 개씩 생겨났다. 말 걸면 "우리 그런 거 모릅네다"라고 일삼던 그 '안내원 동무'들은 "좀 지나면 깔딱고개가 나올 테니 미리 빵이나 사과 음료를 준비하시라요"라며 상술(商術)을 발휘하곤 했다.
하지만 금강산은 개성의 파괴력에 비하면 어쩌면 별거 아닐지도 모른다. 금강산은 엄격히 말해 '자연(自然)'이지만, 개성은 북한 주민 30만 명이 사는 도시다. 그 속으로 날마다 자본주의 관광객들을 태운 관광버스 10대가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오전 10시, 개성 관광의 첫 코스인 박연폭포에 도착했다. 입구에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몇몇 토착 양반들의 유흥지였던 박연폭포를 모든 인민들의 유원지로 돌려줬다'는 게시판이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관광하는 동안 북한 인민들은 접근 금지다.
주변 매점에서는 북한산 과자와 음료수들을 팔았다. 종이컵 커피 한잔에 1달러였다. 북한 주민들의 평균 월급은 4달러다. 유니폼을 입은 여성 종업원들이 "필요한 거 없으세요"라며 호객을 했다.
관광객이 가는 곳에는 북한의 일반 주민은 없다. 북한 주민들은 오전에 박연폭포를 구경할 수 없고, 오후에는 늘 지나치던 '민속여관'(전통 기와집 단지)이나 선죽교 근처에는 얼씬 못 한다.
과연 물샐틈없이 차단할 수 있을까. 정몽주의 집터인 '숭양(?陽)서원'을 구경하기 위해, 시내 도로변에 관광버스들을 주차했다. 주차한 도로 쪽으로 북한 주민들의 통행은 통제됐다. 맞은편 도로로만 주민들은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지나갔다.
어쩌면 개성 주민들은 "보행 시 남측 관광객들 쪽으로 응시하지 말고 그냥 지나가도록" 교육을 받았는지 모른다. 거의 차를 볼 수 없는 시내 거리에 관광버스 10대가 서있고, 관광객들이 모여 있는데도, 북한 주민들은 고개도 돌리지 않는다. 마치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처럼 지나갔다.
그러나 도로의 이면 골목 안에서 북한 주민들은 발걸음을 멈춘 채 홀린 듯 쳐다보고 있었다. 혹은 비닐로 덮어씌운 집의 창문에서, 공사 중인 건물의 빈 구멍으로, 동네 안쪽 공터에서, 들판에서 멍하니 우리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들은 우리를 보면서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 그 상념이나 욕망(欲望)은 결코 권력과 감시의 힘으로도 통제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모습은 과연 북한 주민들에게 희망을 줄까, 절망을 줄까.
적어도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 '전설적 영웅김정일 장군님 고맙습니다'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동지'라는 북한 당국의 선전물은 100% 진실이 아닐 수 있음을 깨달을지 모른다. 바깥에는 정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도….
개성 관광을 다녀온 러시아인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역사학)는 "개성 관광에서는 남북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를 볼 수 있게 되면서 엄청난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했다.
- ▲ 박연폭포 주변 매점에서는 북한산 과자와 음료수 등을 판매한다. 종이컵 커피 한잔에 1달러다.
개성 관광은 작년 12월 5일부터 시작됐다. 아침 8시에 군사분계선을 넘어가 정각 오후 5시에는 다시 나와야 한다. 하루 관광 인원을 500명으로 한정해 놓았다. 당일 관광료는 18만원(점심 포함). 서울에서 임진각까지 오가는 버스 비용은 별도다.
육로(陸路)로 휴전선을 넘는다는 의미를 빼고, 오로지 관광 상품만으로 봤을 때 비싼 편이다. 관광 일정은 박연폭포, 그 바로 위쪽에 있는 관음사, 시내로 들어와 민속여관에서 점심, 숭양서원, 바로 옆 선죽교, 고려박물관이 전부다. 개인마다 취향이 다를 수 있지만, 내게는 단조로웠다.
북한 관광에서 늘 쟁점이 되는 것이 북한 정부의 몫이다. 개성 관광 요금 중 100달러, 금강산 관광의 96달러(2박 기준)는 북한의 수중으로 떨어진다. 북한 당국은 우리 관광객이 한 사람 들어올 때마다 앉아서 100달러씩 챙기는 셈이다.
금강산은 지금까지 180만 명, 개성은 시작 두 달 반 만에 2만2472명이 관광했다. 이들 관광료에서 북한으로 넘어갔을 현찰의 행방을 놓고 '북한 관광=대북 퍼주기(일각에서는 한국으로 총구를 겨누는 군자금이라고 주장)'를 떠올릴 수도 있다.
일부 확신을 갖고 있는 보수주의자들로서는 북한 관광은 결코 용납하기 어려운 것이다. 실제 내 주위에서는 관광 기회가 생겨도 "이런 관광으로 북한 독재 정권을 도울 수 없다"며 '소신'으로 안 갔던 이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동서독 시절, 서독도 이와 비슷한 '관광 요금'을 동독 정권에 지불했다. 서독 지역에서 서베를린으로 들어가려면 동독의 영토를 지나야 한다(베를린은 동독 영역에 있었음). 이 도로를 지날 때 서독 측은 도로사용료를 냈고, 도로의 유지·하자보수 비용도 모두 서독 측이 맡았다. 서독 차량은 이 도로를 이용할 수는 있었지만, 이 도로 바깥으로 벗어나 동독 지역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30년 동안 동독이 서독 주민들로부터 받아들인 도로 이용료는 약 10억 마르크(통일 당시 1마르크는 약 550원)에 달했다. 또 입국 비자는 15마르크, 통과 비자는 5마르크였다. 비자 발급료로 동독은 1968년부터 통일 전해인 1989년까지 10억 마르크를 챙긴 것으로 집계됐다. 독일 사례는 북한 당국의 몫을 옹호하기 위함이 아니라, 통일과 통합을 지향하는 분단 현실에서는 어쩔 수 없는 비용일지 모른다는 얘기다.
주독 한국대사관의 이봉기 통일관(훔볼트대학 박사 과정)은 "분단과 통일 사이에는 또 다른 단계인 화해·협력·동질성 회복 과정이 숨어있다"고 말했다. '접촉'을 통한 북한 주민들의 의식 변화가 없이는 실질적인 통일은 어려운 것이다.
오후 5시 북측 출입사무소에 되돌아왔다. 버스에서 내리니, 북측 안내원이 "부장 선생님, 좋게 써주세요"라고 인사했다. 군인들은 관광객들의 디지털 카메라에 찍힌 사진들을 즉석에서 검사했다. 참고로 개성 관광에는 디지털 카메라의 반입만 허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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