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21세기를 눈앞에 두고 있는 우리에게 박정희시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1961년 봄 쿠데타와 함께 시작하여 1979년 가을 돌연 최후를 맞이했던 박정희시대. “우리의 괴로움을 아는 것은 오직 우리뿐”(신경림 시 「겨울밤」)인 시대, “치떨리는 노여움”(김지하 시 「타는 목마름으로」)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복제하고 싶은 인간’의 한 사람, ‘직무를 가장 잘 수행한 대통령’ ‘역사적으로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대통령 박정희를 그리워하고 추억하는 원인(原因)은 무엇인가. 강력한 리더십에 대한 간절한 향수인가, 아니면 보수세력과 언론매체의 ‘영웅 만들기’ 씬드롬에 불과한 것인가. 박정희에 대한 이러한 상반된 평가야말로 박정희시대의 물리적 시간이 오래전에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회적 시간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보여준다.
이 글의 목적은 한국 근대의 전개과정 속에서 박정희시대가 갖는 역사적 의미를 탐색하는 데 있다. 근대성이 자본주의 근대화에 따른 사회적인 변화와 개인적인 경험을 의미한다면, 한국현대사에서 1960년대와 70년대는 그 어느 시기보다도 자본주의 구조변동의 폭과 깊이가 두드러졌던 시대였다. 변화가 격렬했던만큼 그 경험에 대한 평가의 진폭이 클 수밖에 없는 것은 일견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해방과 방향 상실, 환희와 고뇌의 동시적 경험은 근대성의 본질이며, 근대성의 이러한 이중적 성격에 대한 생생한 기억이야말로 박정희시대에 대한 극단적인 평가의 또하나의 원인(遠因)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동시대에 대한 역사적 분석은 가치판단이 과잉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분명 곤혹스러운 작업이다. 그러나 역사가 현재와 과거의 거리를 두는 성찰의 작업이라면, 박정희시대를 역사화하는 것은 21세기를 눈앞에 둔 현재 시급한 과제이기도 하다.
2. 근대성의 명암: 이론적 토론
근대성이 무엇인가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그것이 제도와 제도 간의 관계를 의미한다면, 근대성은 자본주의(경쟁적인 노동과 상품시장 안에서의 자본축적), 산업주의(자연의 변형: ‘인위적 환경’의 발달), 폭력수단(전쟁의 산업화와 관련된 폭력수단의 통제), 감시체제(정보에 대한 통제와 사회적 관리)와 그 관계들의 총합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註1)이러한 근대성의 자기전개 과정으로서의 근대화는 단일 유형을 갖고 있지 않다. 중범위 수준에서 근대화의 역사적 경로에는 혁명 혹은 개혁의 유럽 근대화, 아메리카 신세계의 근대화, 외부적으로 주어진 근대화, 식민지근대화의 여러 유형들이 존재한다. 註2) 그리고 다시 이 유형들은 세계체제에서의 구조적 위치와 국내의 개인적 및 집합적 행위간의 상호복합적인 관계에 따라 개별 사회의 역사적 궤적으로 구체화된다.
대략 17세기경부터 서유럽에서 시작하여 이제는 전세계적으로 확산된 근대성의 중요한 특징은 신뢰와 위험, 기회와 위협, 또는 해방과 방향 상실, 환희와 고뇌의 이중적인 성격에 있다. 근대성에 내장된 이러한 이중적 성격을 월러스틴은 ‘기술(technology)의 근대성’과 ‘해방(liberation)의 근대성’의 협력과 갈등으로 재치있게 표현한 바 있다. 註3) 기술의 근대성이 끝없는 기술적 진보와 지속적 혁신을 말한다면, 해방의 근대성은 편협성ㆍ도그마티즘, 그리고 무엇보다도 권위에 의한 제약이란 중세적인 것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두 개의 근대성은 역사적으로 혼돈스러운 공생관계를 이루어왔다. 근대사회 초기에 중세와 봉건사회라는 공동의 적에 맞서 기술의 근대성과 해방의 근대성이 동일시되었다면, 프랑스대혁명 이후에 이러한 동일시는 근대 교육 및 군대 제도를 통해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지배적인 지리문화로 내면화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양적 팽창으로 대표되는 기술의 근대성이 해방의 근대성을 압도하면 할수록 근대성의 어두운 뒷면, 다시 말해 정치적 억압, 문화적 소외, 생태계 파괴는 더욱 선명해질 수밖에 없었으며, 68혁명에 이르러서는 기술의 근대성에 대항하는 해방의 근대성이 근대성의 새로운 과제로 설정되었다.
요컨대, 근대성이란 자연과 사회적 삶에 개입하여 물질문명을 성취하는 동시에 그러한 개입이 경제적 양극화, 생태적 위기, 민주적 권리의 부정, 전쟁의 위협 등과 같은 ‘인위적 불확실성’(manufactured uncertainty)을 낳는 자기모순적인 체계이다. 註4)근대성의 이러한 명암은 근대성에 대한 이율배반적인 태도, 근대를 성취해야 하면서도 동시에 이를 극복해야 하는 애증병존적인 감정을 낳는다. 이러한 이율배반과 애증병존은 사실판단을 넘어선 가치판단을 요구하고, 그 가치판단의 규범적 지향은 역으로 사실에 대한 분석과 탐구에 끊임없이 개입한다. 註5) 이러한 연유에서, 외부적으로 강제되었을 뿐만 아니라 단기간 내에 압축적으로 이루어져왔던 우리의 근대성에 대한 연구는 언제나 뜨거운 논쟁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한국 근대화의 한 분수령을 이루었던 박정희시대에 대한 분석의 경우 사실분석과 가치판단 간의 긴장은 그 격렬했던 근대화의 경험만큼이나 두드러지며, 또한 그것은 박정희시대에 대한 좀더 객관적이고 총체적인 평가를 가로막는 장애요인이기도 하다.
3. 근대성의 제도적 긴장: 경제성장.민주주의.민족주의
역사에서 비약은 없으나 박정희시대가 우리 근대화에서 커다란 전환기였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註6) 그 단적인 사례로, 1960년 64%이던 농어민은 80년에 31%로 감소했으며, 중화학공업화가 진행된 70년대에는 2차산업이 1차산업을 능가하고 중공업이 경공업의 비중을 추월하는 선진국형 산업구조를 갖추었다. 경제구조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생활수준 및 생활양식의 변화였다. 1961년 87달러에 불과했던 1인당 GNP는 79년에는 1597달러로 증가하여 보릿고개로 상징되는 절대적 빈곤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다. 급속한 경제성장은 또한 아파트와 텔레비전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도시적 생활양식을 보급했을 뿐만 아니라, 미니스커트와 장발족으로 대표되는 미국식 서구문화의 유행을 가속화해왔다. 요컨대 박정희시대의 자본주의 산업화는 우리 사회를 오랜 농업사회에서 공업사회로 단숨에 변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박정희시대에 대해서는 그 동안 학술적 토론을 비롯하여 정치비사를 파헤치는 저널리즘, 개인적 회고담, 박정희 개인사의 소설화에 이르기까지 여러 각도에서 조명되어왔다. 註7) 박정희 개인에 대한 평가 또한 ‘민족의 영웅’에서 ‘독재의 원조(元祖)’ 그리고 ‘권력욕의 화신’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이루어져왔으며, 급기야 지난 대선에서는 ‘산’ 후보들이 ‘죽은’ 박정희에게 호소하는 진풍경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러한 진풍경은 그 개인에 대한 평가가 어떠하더라도 역사적 개인으로서의 박정희가 여전히 매우 강렬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박정희 개인에 대한 평가는 필자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이 글의 직접적인 관심사도 아니다. 이 글의 관심은 박정희시대에 진행된 근대성의 경험을 조명하여 그 이중성을 밝히는 데 있다. 근대화가 다층적인 제도화를 말한다면, 박정희시대는 변화가 격렬했던만큼 그 제도적 긴장과 갈등이 더욱 두드러졌던 시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경제성장의 '기적과 환상'
고도의 경제성장은 박정희정권의 대표적인 치적으로 손꼽힌다. 이 경제성장을 분석하는 데는 상이한 접근이 제시되고 있다. 제3세계에서 성공적인 ‘후후발’자본주의 산업화의 가능성을 보여준 기적의 대표적인 사례라는 평가가 그 하나라면, 양적 팽창을 인정하더라도 대내적 불균형과 불평등 및 대외종속의 심화를 내포한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이 다른 하나이다.
박정권의 경제성장을 다루는 데서 제일 먼저 부딪치는 이슈는 과연 1960년대 초반 세계시장에의 통합전략이 불가피했는가의 문제이다. ‘내포적 공업화’냐, ‘수출지향 공업화’냐의 선택의 문제는 수출지향이 종국에는 세계시장에의 종속을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켜왔던 쟁점이다. 註8) 비교발전론적 관점은 이러한 선택에 대한 하나의 거시적인 답변을 제공하고 있다. 유럽의 자본주의 역사는 한 나라가 통합과 이탈 가운데 어느 전략을 추진할 것인가는 산업화 초기 세계시장에의 통합정도, 국가의 개입, 그리고 내수시장의 규모에 달려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註9)자원 및 인구, 특히 내수시장이 협소한 한국의 경우 세계시장에의 통합전략에 기반한 수출지향 산업화를 추진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거시적으로 볼 때 박정권의 산업화전략은 전후 세계자본주의의 구조변동에 따른 국제분업의 재편과정에서 이례적으로 이익을 취한 사례의 하나이다. 註10) 70년대 이래 대다수 제3세계 국가들이 외채 문제로 인해 성장의 위기에 봉착했다면, 한국은 상품ㆍ생산ㆍ신용자본의 국제화를 특징으로 하는 국제분업의 재구조화 과정에서 세계시장에 제조품을 특화하여 경제성장을 도모해왔다. 무엇보다도 전후 선진자본주의의 포드주의 확립이 가져온 대중소비재의 광범위한 수요증대는 제3세계 노동집약적 제조품의 새로운 성장공간을 창출했으며, 박정권은 이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국제분업에서의 지위상승 전략을 구사해왔다. 이 점에서 한국의 경우 자본주의 세계시장은 발전의 장애를 이룬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발전의 잠재력으로 나타났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경제성장을 가능케 했던 좀더 중요한 요인은 그 내적 조건인 토지개혁ㆍ분단상황, 그리고 국가와 노동의 역할이다. 우선 이승만정권하에서 추진된 토지개혁은 봉건적인 지주계급을 몰락시킴으로써 자본주의 산업화에 유리한 정치경제적 조건을 형성했다. 이러한 한국적 조건은 봉건 농업구조가 끈질기게 잔존하여 자본주의 산업화를 지체시켰던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사례와 흥미로운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한편 냉전분단체제의 형성이 박정권의 경제성장에 끼친 영향은 이중적이다. 박정권은 이승만정권과는 달리 경제성장을 위해 전후 동아시아에 고착화된 냉전체제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는데, 한일 국교정상화를 통한 일본 자본의 도입과 베트남 파병을 통한 베트남 특수는 그 대표적인 사례로 지적할 수 있다. 註11) 냉전분단체제가 낳은 또하나의 조건은 반공이데올로기의 강화에 따른 새로운 이데올로기 지형이다. 분단체제의 형성과 특히 한국전쟁의 생생한 체험을 통해 내면화된 반공주의는 정치사회와 시민사회는 물론 일상의식까지도 결정적으로 변형시켰는데, 이러한 반공주의는 한국판 ‘프로테스탄트의 윤리’ 註12)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6,`70년대 북한과의 치열한 산업화 경쟁에서 경제적 동원을 극대화하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풍부한 노동력과 국가의 적극적인 역할은 박정권 고도성장의 좀더 직접적인 원동력이었다. 수출지향 공업화의 특징을 절대적 잉여가치 생산방식에 기반한 ‘원시적’이자 ‘유혈적’ 테일러화에서 찾을 수 있다면,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이야말로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핵심적인 원천이었다. 이른바 발전국가(developmental state)의 대표 사례의 하나로 손꼽히는 박정권의 효율적인 경제정책 또한 고도성장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註13) 박정권 경제정책의 중요한 양 축은 금융정책과 노동정책이다. 금융정책의 경우 정권은 만성적인 자본 부족을 겪고 있는 대기업들에 대규모 외자배분은 물론 일반금리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저리의 자본을 지속적으로 공급해줌으로써 재벌 성장의 후견인 역할을 떠맡아왔으며, 노동정책의 경우 노동조합법ㆍ노동쟁의조정법 같은 입법적 절차에서 노동운동의 직접적인 탄압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억압적 노동정책과 노동통제를 통해 ‘산업평화’와 저임금 유지를 도모해왔다.
요컨대 박정권의 경제성장은 전후 포드주의 축적체제의 확립이 낳은 국제분업의 재편과정에서 토지개혁과 냉전분단체제의 역사적 조건 아래 국가의 효율적 경제정책과 풍부한 노동력이 결합되어 나타난 이른바 ‘초대에 의한 반주변적 발전’이라 볼 수 있다. 註14) 이 점에서 박정권 경제개발정책의 효율성, 특히 박정희 개인의 리더십과 결단력이 경제성장에 커다란 역할을 했음을 과대평가할 필요도 과소평가할 필요도 없다. 경제성장의 원동력을 역사적 조건의 결과나 집합의지의 실현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일면적이다. 왜냐하면 축적전략은 복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어떤 전략을 추진할 것인가는 역사구조적 조건 속에 놓인 주체 혹은 집단의 선택, 다시 말해 ‘구조와 전략의 변증법’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註15)다만 주체적 조건이 중요하다고 해서 박정권의 리더십만을 특권화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자본축적이 잉여생산물의 지속적인 창출을 의미한다면, 고도성장을 담당한 주체는 박정희 개인 혹은 정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생산현장의 민중이었다. 최저생계비조차 되지 않는 저임금과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을 감내해야 했던 이들이야말로 고도성장을 성취한 진정한 주인공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박정권의 경제성장 모델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 근대성의 맥락에서 이 평가에는 이중적 잣대가 존재한다. 자본주의 발전전략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가 그 하나의 잣대라면, ‘어떤’ 자본주의 발전전략이 바람직한 것인가는 또하나의 잣대이다. 전자의 기준에서 볼 때 박정권에 의해 추진된 산업화의 본질은 그 성장이 비약적이라 하더라도 결국 잉여가치의 착취 메커니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거시적 비판은 자본주의의 구조적 동학과 내적 한계를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떤 대안적인 발전모델이 현실적으로 가능한가에 대해서 이 비판은 여전히 만족할 만한 답변을 제시하고 있지 못하다.
후자의 기준에서 볼 때 그것은 내포적 공업화냐 수출지향 공업화냐의 선택의 문제이며, 성장과 형평의 균형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의 문제이다. 60년대 초반 당시 수출지향 공업화가 불가피했고 또 그것이 절대적 빈곤을 벗어나게 했다 하더라도, 그 양적 성장의 결과가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었다. 종속의 심화, 경제력 집중, 농업의 희생, 소득분배구조의 악화는 박정권의 종속적 발전의 부정적 결과로 지적할 수 있다. 그 가운데 재벌의 성장과 함께 공고화된 정경유착은 대표적인 부정적 유산이다. 50년대 원조물자의 불하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는 한국 재벌은 박정권의 후견 아래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60년대 경제개발과정에서 외자도입의 급속한 증가, 수출시장 여건의 조성, 개발수요의 급증, 그리고 무엇보다도 박정권의 금융 및 세제의 특혜가 재벌에게 새로운 활로를 열어주었다면, 70년대에 중화학공업화를 위한 국민투자기금과 저리의 금융정책은 재벌의 성장을 가속화시켰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박정권을 상위파트너로 재벌을 하위파트너로 한 엘리뜨연합으로서의 정경유착은 한층 공고화되었다. 현재 한국사회의 발전에 가장 커다란 장애가 되고 있는 거대 공룡 재벌의 등장은 박정권의 절대적 후원 아래 관치금융과 족벌경영을 양 축으로 하여 성장한 결과였다.
경제성장이냐 민주주의냐
경제성장과 민주주의의 관계는 박정권을 분석하는 데 핵심적인 쟁점이다. 이에 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시각이 대립하고 있다. 그 하나가 박정권이 경제성장에는 성공했지만 정치적 민주주의에는 실패했다는 시각이라면, 정치적 민주주의를 희생시켰기 때문에 경제성장에 성공했다는 시각이 다른 하나이다. 개발독재론이라 부를 수 있는 후자의 시각은 다시 박정희시대 고도성장의 원인이 박정권의 리더십과 현명한 정책에 있다고 보는 견해와 박정권의 친독점자본적 민중배제성ㆍ민중억압성이 고도성장을 가능케 했다는 견해로 나누어진다. 註16)이러한 여러 견해 가운데 마지막 견해가 적실성이 높지만, 박정권의 경제성장의 원동력은 앞서 지적했듯이 세계자본주의의 국제적 환경, 토지개혁과 냉전분단체제의 역사적 조건, 그리고 강력한 국가의 역할과 풍부한 노동력 등의 내외 요인들의 복합적인 결합에서 찾을 수 있다.
경제성장과 민주주의의 관계를 둘러싼 핵심적인 이슈는 민주주의 정치체제로는 경제성장을 달성할 수 없었는가의 반사실적(counter-factual) 가정, 다시 말해 초기 자본주의 산업화에 권위주의 정치체제가 불가피한 것인가의 문제이다. 사실판단의 수준에서 볼 때 이 문제에 대한 역사적 근대화의 다양한 경험은 비관적인 듯하다. 세계시장으로부터 가해지는 주변화 압력을 극복하고 추격 발전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재분배 압력으로부터 자율성을 부여하고 단기적 이익을 희생시킬 수 있는 고도의 중앙집권적인 국가기구가 불가피했으며, 이러한 권위주의 국가는 정치적 민주주의를 유보시키는 경향을 보여왔기 때문이다. 註17) 독일과 일본으로 대표되는 후발자본주의의 발전이 그러했으며, 구소련과 중국으로 대표되는 국가사회주의 발전도 예외는 아니었다는 점은 그 역사적 증거 사례가 되고 있다. 요컨대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기반한 외연적 축적체제가 계급타협적인 국가보다는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국가와 양립할 수 있는 ‘선택적 친화성’이 높은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경제성장과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한 사실과 규범의 긴장에 대면한다. 그것은 권위주의가 민주주의보다 경제성장에 효율적이라고 해서 민주주의를 유보하고 권위주의를 선택해야 하는가, 다시 말해 경제성장, 질서와 안정이 인권, 정치적 자유 및 시민적 권리보다 중요한 것인가의 문제이다. 역사해석에서 어려운 점은 그것을 판단하는 시점(時點)에 있다. 1967년에 지식인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한 사회조사는 흥미로운 결과를 제시한다. 註18) 한국의 실정을 보아 근대화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공업화 내지 산업화’(29.6%)와 ‘국민 생활수준의 향상’(22.6%)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반면에, ‘정치제도의 민주화’(7.1%)와 ‘생활의 합리화 및 과학화’(13.0%)는 그 중요성이 낮게 평가되고 있다. 더욱이 ‘경제발전을 위해서 개인의 자유를 희생시킬 수 있다’(60.7%)는 점을 다수가 인정하고 있는 조사 결과는 당시 근대화에 대한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름아닌 60년대 당시 기술의 근대성이 압도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한국전쟁에 대한 생생한 기억은 질서와 안정에 대한 희망을, 보릿고개의 암울한 현실은 경제성장에 대한 간절한 열망을 낳았으며, 이러한 희망과 열망은 위로부터의 국가적 동원을 통한 산업화에 유리한 정신적 토양을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경제성장에 성공했다고 해서 박정권의 권위주의에 일방적인 면죄부를 주기는 어렵다. 정치적 권위주의와 초기 자본주의 산업화 사이에 ‘선택적 친화성’이 있고 다수가 경제성장을 열망했다고 해서 우리가 모든 권위주의를 사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의 역사를 쉽게 재단해버리는, ‘경제성장이냐 민주주의냐’의 양자택일적 사고의 오류이며, 또한 결과론적 역사해석이다. 지나간 ‘역사적 현재’는 죽어 있는 시간이 아니라 열려 있는 선택의 공간, 부르디외(P. Bourdieu)가 말하는 ‘가능성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과연 박정권이 경제적 효율성과 민주적 자율성을 결합시키는 데 얼마나 노력을 경주했는가에 있다. 3선개헌에서 10월유신에 이르는 절차적 민주주의마저도 부정되는 일련의 정치변동과 70년대 유신체제의 암울한 권위주의는 박정권이 얼마나 비민주적이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한 걸음 물러서서 볼 때 경제성장과 민주주의의 이슈는 경험적 문제이기도 하지만 이론적 쟁점이기도 하다. 그것은 경제가 발전하면 민주주의를 실현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근대화론의 기본 가설에 연관된 문제이다. 註19) 거시적인 시각에서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는 정합적인 상관관계를 보여주고 있으나, 두 요인 사이에는 여러 매개변수들이 존재한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 산업화는 점차로 시민사회의 밀도를 증대시키는바, 시민사회의 이러한 성장은 피지배계급들의 정치적 조직화를 위한 기반을 형성할 뿐만 아니라 노동자계급을 국가의 압도적 권력에 대한 하나의 견제세력으로 등장시킨다. 註20)이러한 역사적 경험이 의미하는 바는 경제성장과 민주주의의 관계에는 그 매개변수로서 시민사회의 성장과 노동자계급의 형성이라는 주체적인 조건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그 장기적인 추세에도 불구하고 중기적이고 단기적인 민주화의 경로는 개별 국가에 따라 역전되고 후퇴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것은 기존의 지배체제가 위기에 직면한 특정 국면에서 지배블록과 피지배블록의 세력관계의 균형에 따라 민주화의 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박정권하에서 시민사회와 노동자계급의 피지배블록은 여러 사회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지배블록에 필적할 정도로 아직 성숙되어 있지 않았다. 또한 한국 부르즈와계급은 민주주의에 친화적이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권위주의 정권의 가장 충실한 동맹세력이었다. 이 점에서 ‘부르즈와지 없이 민주주의는 없다’는 무어(B. Moore)의 가정은 적어도 한국의 경우 적실성이 없으며, 동시에 경제성장이 민주주의의 발전에 기여한다는 근대화론의 가정도 시민사회와 노동자계급의 성장을 매개변수로 전제할 때 타당하다. 註21)박정권이 추진한 산업화의 내부 동학에는 민주화의 씨앗이 배양되고 있었다. 註22) 이렇게 배양된 시민사회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또하나의 억압적 권위주의 지배를 거친 다음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분출하였다
민족주의와 근대성
박정권이 민족주의적이었는가의 문제는 또하나의 토론 쟁점을 이루고 있다. “퇴폐한 민족동의와 국민정기를 바로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한다는 쿠데타의 공약은 5ㆍ16 군사정부의 민족주의적 지향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흔히 박정희의 역사적 라이벌로 지목되는 장준하도 당시 쿠데타를 “국가의 진로를 바로잡으려는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註23) 쿠데타 중심세력의 대다수가 빈농 출신이었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군사정부가 농어촌 고리채 정리, 중소기업 자금지원, 부정축재처리법 실시 등을 중심으로 민족주의적 경제발전을 모색했던 것은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군정 초기의 이러한 민족주의적 경향은 이내 변화되었다. 그것은 농업육성에 기반하여 내수시장을 확대하고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수입대체산업화를 추진하려는 내포적 공업화 전략의 좌절로 구체화되었다. 그러나 경제적 민족주의 전략이 좌절되었다고 해서 정치적ㆍ문화적 민족주의가 포기된 것은 아니었는바, 박정권은 민족주의를 발전주의와 결합시켜 경제적 동원화를 위한 담론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註24) ‘산업화 민족주의’라 부를 수 있는 ‘조국 근대화’ ‘새역사 창조’ ‘자립경제’ ‘민족중흥’ 같은 박정권의 일련의 담론은 민족발전이 곧 경제성장이라는 논리로 구체화되었다. 박정권의 이러한 민족주의 담론은 또한 노동자계급에 대한 통제이데올로기로도 활용되었는데, 충효사상과 안보논리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가부장적 노사관계를 강요했으며 선성장 후분배론은 개량에 대한 환상을 심어놓았다. 註25)
역사적으로 근대 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의 산물인 민족주의는 근대 민주주의와 내적인 긴장관계를 이룬다. 그것은 민족주의가 갖고 있는 이중적 성격, 즉 대외적인 민족자결을 부각시키는 이념이자 동시에 대내적인 체제유지를 위한 헤게모니 장치라는 점에서 비롯된다. 이 점에서 민정이양을 전후로 구사되기 시작한 박정권의 ‘민족적 민주주의’ 담론은 애초부터 민주주의와의 긴장을 내포하고 있었다. 곧 민족주의 담론은 서구와는 다른 한국적 전통을 부각시키고 냉전분단체제의 반공주의를 특권화함으로써 서구적 민주주의를 평가절하하고 권위주의적 통치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민족적 민주주의’는 3선개헌을 거쳐 10월유신에서 ‘한국적 민주주의’로 변질되었으며 그것은 선거, 토론, 집회 및 결사의 절차적 민주주의의 기본원칙마저도 부인하는 반민주주의의 공고화로 나타났다.
박정권의 이러한 민족주의 담론은 그렇다면 헤게모니를 결여하고 있었는가. 경험적인 수준에서 이를 평가하기란 쉽지 않지만, 이른바 ‘전통의 창조’ 註26) 라 부를 수 있는 박정권의 민족주의 담론은 적어도 60년대에는 헤게모니를 창출하는 데 성공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3세계의 경우 물질적 영역에서 서구에 대한 모방이 성공적일수록 정신적 문화에 대한 보존의 욕구가 더욱 강화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註27) 단일민족으로서의 오랜 역사와 일제식민지하에서의 민족해방투쟁 경험에 대한 기억은 서구문화에 대응하는 한민족의 역량과 주체성, 전통문화의 계승과 발전을 강조했던 특수주의적 담론의 헤게모니를 창출하는 데 유리한 조건을 형성했다. 註28) 하지만 3선개헌에서 10월유신에 이르는 일련의 정치변동 속에서 민족주의 담론의 수사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이 점차 가시화되었으며, 그 결과 박정권과 대중의 헤게모니적 접합은 내적으로 균열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한국적 민주주의’가 박정권 특유의 담론은 아니다. 그것은 싱가포르의 리콴유(李光耀)와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가 강조하는 ‘아시아적 민주주의’와 동일한 내용을 갖는다. 이들은 민주주의의 과용이 무질서와 방종을 낳을 뿐만 아니라 발전에 장애가 된다고 주장하고, 따라서 유교적 전통과 권위에 대한 존중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註29) 최근 서구에서 관찰되는 가족의 해체와 개인주의의 과잉발전을 지켜볼 때 분명 서구의 민주주의가 최선의 미덕은 아니다. 하지만 하나의 담론을 평가하는 데 내용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 ‘효과’이다. ‘한국적’ ‘아시아적’이라는 특수주의가 과잉화될 때 그것은 “높은 성장률이 유지되는 한 민주주의에 대해서 신경쓰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는 마하티르의 논리에서 볼 수 있듯이 민주주의 원칙에 대항하는 이데올로기 도구이자 사회의 조정과 공작을 옹호하는 담론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다. 註30) 민족주의가 방어적이고 보수적인 국수주의로 나타날 때 그것은 정치적 억압을 정당화하고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며, 또한 싸이드(E. Said)가 말하는 또다른 오리엔탈리즘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4. 근대성의 그늘과 생활세계
자본주의와 국민국가로 대표되는 근대성의 제도적 차원은 사적 영역과 공공 영역으로 구성된 생활세계와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다. 인성이 형성되고 사회통합이 이루어지며 문화가 재생산되는 생활세계는 근대적 제도와 상호관련을 맺으면서 변화하지만, 제도적 변화의 속도가 빠른 경우 그 제도가 생활세계를 압도하고 위협하는 이른바 ‘생활세계의 식민화’ 경향이 두드러진다. 註31) 박정권의 압축적 경제성장은 우리의 생활양식 또한 압축적으로 그리고 심대하게 변화시켰다. “어제는 카시미롱이 들은 새 이불이, 오늘 오후에는 새 라디오가,” 그리고 내일은 ‘원효대사와 금발의 제니를 함께 방영하는 텔레비전’이 들어오는(김수영 시 「라디오계」 「원효대사」) 생활양식의 변화는 신작로가 열리고 기차가 개통되는 것으로 상징되는 근대 물질문명이 우리의 생활세계에 본격화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하나의 징표였다. 수출지향 산업화의 결과 국내시장의 국제화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으며, 그것은 소비생활과 이와 연관된 생활문화를 크게 변화시켰다. 서구의 문화와 상징구조는 50년대보다도 한층 광범위하게 우리의 일상 속으로 침투하고 일상을 지배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할리우드 영화와 팝송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문화산업은 그 어떤 문화매체보다도 대중들의 의식과 일상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부상하고 있는 신중간계급을 중심으로 미국문화가 일상화되기 시작했다고 해서 6,70년대 노동자계급의 생활수준이 크게 증대한 것은 아니었다. 절대적 빈곤을 어느정도 벗어났다 하더라도 노동자계급의 임금수준은 임노동의 최소 재생산비용인 최저생계비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며 노동조건 또한 대단히 열악했다. 농민과 도시빈민의 생활수준 또한 이와 커다란 차이가 없었다. 박정권의 일관된 저곡가-저임금 정책이 농민의 생활을 피폐화시켜왔음은 주지의 사실이거니와, 무허가 판자촌으로 상징되는 도시빈민의 생활은 1971년 광주대단지 사건이 보여주듯이 참혹하고도 서글픈 것이었다.
근대성의 대표적인 그늘이라 할 수 있는 억압적 감시체제가 박정권하에서 결정적으로 제도화되었다는 점 또한 주목되어야 한다. 중앙정보부로 대표되는 강력한 감시체제는 억압적 국가기구의 중핵을 형성하여 정치 및 경제권은 물론 일반대중들의 일상을 감시하고 통제했다. 1961년 6월 중앙정보부법에 의해 3천명의 특무대 요원을 바탕으로 출발한 중앙정보부는 ‘권력 내의 권력’ 기관으로서 국내 정치는 물론 대북정책을 포함한 대외정책의 실질적인 입안기관이자 집행기관이었으며, 70년대 유신체제하 박정희 1인통치의 가장 강력한 친위부대였다. 이러한 억압적 감시체제의 존재는 푸꼬(M. Foucault)가 말하는 통제 이전의 감금이 오히려 박정권의 중요한 정치적 지배메커니즘이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억압적 감시체제는 민주주의를 형해화했을 뿐만 아니라 시민사회의 반정치주의와 가족적 이기주의를 강화시켰다. 우리 시민사회에서 반정치주의의 역사는 물론 식민지국가의 감시체제에 그 기원을 두고 있지만, 그것은 냉전분단체제의 고착에 따른 이데올로기 지형의 협애화와 함께 더욱 공고화되었다. 반공논리와 군사문화가 일상화된 상황하에서 반정부는 반국가와 등치되었으며, 이러한 ‘반공병영사회’(anticommunist regimented society) 註32) 에서는 정치와 거리를 두고 자기검열을 하는 것이야말로 생존의 방법이었다. “보려고 하지 말고 들어야”만 하는 침묵을 강요당한 “안개의 나라”가 다름아닌 박정권의 유신체제였으며(김광규 시 「안개의 나라」), 이러한 감시체제가 강화될수록 시민사회의 왜곡된 반정치주의는 심화되고 민주주의는 박제화되었다.
가족주의는 우리 근대 생활세계의 또하나의 명암을 이루고 있다. 가족주의는 근대화 과정 속에서 약화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되는 양상을 보여왔다. 조선후기 이후 신분제 붕괴, 식민지지배, 한국전쟁, 급속한 산업화를 거치면서 국가, 문벌, 공식적 사회집단 등이 기존의 권위를 담당할 수 없게 되자 개인들은 물질적 생존을 위해 직계가족을 중심으로 가족지상주의를 키워왔다. 註33) 기업 및 국가 복지가 부재한 상황에서 가족은 재생산비용을 담당하여 시장의 폭력을 약화시키는 스펀지와도 같았으며, 註34)이러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애정과 연민의 가족관계는 많은 문학작품과 영화 및 드라마의 주제이기도 했다. “아홉 마리의 강아지”와도 같은 어린 자식들을 위해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온 ‘아버지의 어설픈 미소’(박목월 시 「가정」)야말로 우리 근대성의 또하나의 서글픈 자화상이었다. 가족은 또한 정서적 생존을 위해서도 중요한 보호막이었다. 자본주의 산업화가 압축적이었던만큼 근대 개인주의 문화는 제대로 정착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개인은 가족이라는 정서적 울타리를 통해 급속한 사회변동에 적응하고 삶의 불안감을 해소하고자 했다.
이러한 가족주의는 학연ㆍ지연을 매개로 유사가족주의로 변형되고 확대되어왔다. 60년대 이후 급속한 근대화와 도시화에 따라 전통적 농촌공동체를 떠나온 사람들이 도시 속에서 그 공동체를 대신할 수 있는 동창회ㆍ계ㆍ종친회 같은 ‘의사근대적’(quasi-modern) 공동체를 만들어왔음은 그 단적인 사례이다. 註35) 이러한 유사가족주의는 사회조직의 충원 및 주요 의사결정에 이르기까지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여 집단이기주의를 강화시켰는바, 그 가운데 특히 박정권하에서 본격적으로 표출된 지역주의는 경제적 지역격차를 심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에 커다란 장애가 되어왔다.
요컨대 박정권의 성장중심 발전전략은 어느정도의 물질적 보상을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생활세계를 황폐화하고 인간적 삶의 가치를 훼손했던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억압적 감시체제, 반공병영사회의 반정치주의, 그리고 이기적 가족주의는 우리의 시민사회를 보수주의로 기울게 하여 국가를 견제할 수 있는 공공영역 또한 협소하게 만들었다. 이 보수적 공공영역의 공간 속에서 국민들의 다양한 정치적 의사표현과 여론 형성의 통로는 제한되고 극도로 억압될 수밖에 없었다. 근대 민주주의의 실현이 공공영역의 형성에 기반하고 있다면, 박정권의 억압적 정치체제는 생활세계를 식민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비판적 시민의식의 발전을 가로막아 근대 공공영역의 창출을 지체시켰다.
5. 박정희 시대의 교훈
돌이켜보면 우리 사회의 근대화는 서구의 경험과도 다르고 여타의 제3세계와도 구별되는 경로를 거쳐 진행되어왔다. 이러한 근대화 과정에서 특히 박정희시대는 하나의 이정표적인 시기였다. 박정권은 세계시장의 구조적 재편에 편승하여 이른바 보수적이고 방어적인 근대화를 추진했으며, 그것은 우리 사회를 농업사회에서 공업사회로 변화시키는 가시적인 고도성장을 가져왔다. 이 점에서 박정권에 의해 이루어진 기술의 근대성은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박정권의 이러한 근대화 전략은 권위주의적 통치방식, 억압적 감시체제, 민족주의적 동원에서 볼 수 있듯이 애초부터 제도적 긴장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러한 근대성의 제도적 긴장은 여러 후발 및 후후발 산업화에서 관찰될 수 있는 일반적인 현상이라 볼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박정권의 근대화 전략에 내재된 이러한 제도적 긴장은 정경유착, 노동통제, 인권탄압, 생태계 파괴, 그리고 생활세계의 식민화라는 유례없는 대가를 요구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천민적 자본주의, 권위적 정치구조, 이기적 시민사회로 대표되는 박정권의 부정적 유산은 우리 사회에서 해방의 근대성의 실현을 지속적으로 차단시켜왔다.
근대성의 이러한 명암에는 무엇보다도 단선적인 발전논리, 기술의 근대성을 특권화하려는 생산지상주의의 논리가 내장되어 있다. 생산지상주의 발전전략의 근본적 문제는 그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그리고 무엇을 위한 성장인가에 있다. 생산지상주의는 단기적으로 가시적인 성장의 과실(果實)을 가져다줄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민주주의의 발전을 저해하고 다수의 인간적 삶을 훼손시킨다. 박정권의 생산지상주의 발전전략의 파국은 그 정권이 종막을 고한 지 20년이 지난 현재 우리가 생생하게 목도하고 있다. 민주주의와 인간적 삶의 가치를 존중할 수 있는 대안적인 발전 패러다임을 모색하는 것이야말로 박정희시대가 우리에게 남긴 커다란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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