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고찰

박정희 경제기적의 허구!

이경희330 2008. 6. 21. 11:38
1. 60-70년대는 누가 대통령 해도 고도성장(박정희 역대 집권자 중 내용상 4위)

1위 : 박정희 - 28%
2위 : 광개토대왕 - 14%
3위 : 세종대왕 - 11%
4위 : 이순신 - 8%
5위 : 김대중 - 5%

이상은 월간조선(3월호)에 실린 한국 역사상 최고의 인물 인터넷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결과다.
박정희가 이순신 장군보다 3배 이상 더 존경받고 있다. 안중근 의사는 아예 명함도 못비치고 있다. 참으로 피가 거꾸로 솟을 일이다.

박정희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독립투사를 토벌하는 일본군 장교가 됐다. 박정희는 당시 대구사범을 나와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는데도 일신의 영달을 위해 일본군 장교에 자원하여 일본에 충성하였다. 이런 민족반역자 박정희가 민족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안중근의사보다 몇 십 배 더 존경받는 나라. 이 참담하고 비극적인 현실 앞에 나 역시도 이러한 나라의 국민의 한사람이라는 사실에 너무나 수치스러울 따름이다.

박정희를 존경한다는 사람들은 십중팔구는 박정희의 경제적 기여가 너무 커 친일, 남로당 가입, 유신독재, 인권탄압 등 온갖 죄악을 상쇄하고도 남는다고한다(경제적 기여를 가지고 존경여부를 따진다면 건설, 자동자, 조선산업을 일으킨 정주영 회장이 더 존경받아야 함).
 
도대체 박정희가 우리나라 경제성장에 얼마나 기여를 했길래 박정희가 지은 죄악을 덮고도 남는지 한번 조사를 해 보았다. 먼저 역대 우리나라 집권자들의 경제분야 종합성적표라고 할 수 있는 경제성장률을 분석해 보았다. 객관성을 높이기 위해 경제성장률은 집권기간 연평균실질성장률을 기준으로 했다. 통계청의 직원에게 물어보니 실질성장률이 한 나라의 실제 성장정도를 가장 잘 나타내는 지표라고 한다.

역대 집권자들의 연평균실질성장률(이하 연평균성장률)은 전두환 9.3%, 박정희 8.5%, 김대중 6.8%, 노태우 7.0% 순으로 단순 수치상으로는 박정희가 2위이다. 그러나 각 집권자별 연평균성장률과 우리와 여건이 비슷하고 격차가 상대적으로 적은 대만을 포함한 주요국(8국:미,카,영,독,프,이,일,대)의 연평균성장률을 비교하여 보면 사정은 달라진다.

박정희 집권기간 동안 대만은 10.0%, 주요국은 5.2%의 성장률을 기록하였다. 이 기간 동안 비교적 소득수준이 높은 주요국의 성장률이 5.2%였다. 일반적으로 한나라의 경제개발에 시동이 걸리면 성장률이 일정수준까지는 급상승하나, 국민소득이 높아질수록 성장률이 둔화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선진국인 주요국 성장률 5.2%는 대단히 높은 수치이다. 뿐만 아니라 대만이 10%였다는 것은 박정희 집권기간동안 국제적으로 엄청난 호황기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박정희는 18년이 넘는 집권기간 동안 연평균 8.5%의 성장에 그쳐 10.0%의 대만에 못 미쳤고 주요국보다 3.3% 높았다.
 
전두환은 집권기간(7년) 동안 연평균 9.3%의 성장률 기록하여 수치상으로는 역대 대통령 중 최고를 기록하였다. 전두환의 성장률은 대만의 성장률 8.5%보다 약간 높았고 주요국보다 5.7%나 높았다. 노태우도 연평균 7.0%의 성장률은 기록 수치상으로는 전두환에 약간 못 미쳤으나 주변국의 성장률과 비교할 때 전두환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김대중의 집권시기는 대만이 연평균 3.1%, 주요국이 2.0%에 불과해 이 시기는 국제적으로 극심한 불황기였다. 그러나 김대중은 이 기간동안 연평균 6.8%의 성장률은 기록하여 수치상으로는 1위의 전두환에 뒤졌으나 대만보다 3.7% 그리고 주요국보다 4.8% 앞서는 내용면에서 매우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였다.

이상에서 경제통계를 근거로 분석한 역대대통령의 경제성적표는 단순수치상으로 전두환 1위, 박정희 2위, 김대중 3위 순이다.
그러나 대외 여건을 감안한 내용적인 면에서 분석한 결과는 김대중 1위, 전두환 2위, 노태우 3위, 박정희 4위이다. 박정희가 “박정희는 대한민국 경제를 세우고 경제기적를 창조했다”라는 칭송을 듣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실적이다.

박정희 추종자들이 늘 내세우는 논리가 박정희 이전과 비교했을 때 박정희 때부터 급성장했다고 한다. 이승만 때의 4.1%의 성장률이 낮은 것으로 여겨질 수 있으나 종전 후 잿더미 속에서 맨손으로 전후복구를 하고 나아가 4.1%의 성장을 이루었다는 것은 나름대로 평가 받아야 한다고 본다. 더욱이 역대 집권자의 재임기간 동안의 여건을 보면 이승만은 상상하기 힘든 전쟁피해 속에서 출발해야 했다.
 
전두환은 2차 석유파동의 후유증을 안았고, DJ도 IMF 환란 극복에 전력을 기울여야 했다. 노태우와 YS 시절도 민주화의 과도기여서 절대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룰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어떠했나. 우선 박정희 이전 정권의 전후복구와 빈약하기는 했지만 최소한의 국가기간산업의 유산을 받지 않았는가.
 
또 박정희 집권 초 우리 조상들의 흘린 피의 댓가인 월남 파병으로 또 70년대에는 우리건설회사의 중동진출로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많은 달러가 국내에 유입되었다. 뿐만아니라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60-70년대에는 국제적으로도 유례없는 장기간의 호황이 이어졌다.
 
또 박정희는 60-70년대 우리 군인들의 목숨의 댓가인 원남특수, 또 우리근로동자들의 피와 땀의 결실인 중동건설 특수를 누릴 수가 있었다. 우리 군인들의 목숨과 우리근로동자들의 피와 땀이 고스란히 박정희의 치적에 스며들었고 우리나라 경제발전이 오로지 박정희의 공으로 둔갑되었다. 그리고 당시 군부, 관계, 언론계 등에 포진해 있던 과거 친일분자들이 박정희를 우상으로 모시다시피하여 박정희는 누구보다도 좋은 여건이었다.

지금까지의 박정희 추정자건 비판자건 경제성장에 관한 한 박정희가 독보적인 존재로 알아왔다. 나 역시도 통계치를 분석하기 전에는 그런 줄로 알았다. 그러나 구체적인 통계치에 의한 분석결과를 볼 때 지금까지 박정희의 경제신화는 하나의 허상임을 알 수가 있다.

박정희 추종자들에게 이와 같은 통계분석 결과를 들이 대면 이들은 처음에는 도무지 믿으려하지 않는다. 구체적인 통계치에 논리가 궁색하면 박정희에게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80불의 절대빈곤 속에서 이만큼 사는 것도 박정희 덕이라고 한다. 그럼 왜 이승만 정권이 잿더미 속에서 거의 맨손으로 전후복구를 하고 입에 풀칠도 하기 어려운 열악한 여건 속에서 발전소, 시멘트공장, 비료공장을 짓는 등 최소한의 기간산업을 육성하여 훗날 경제개발의 발판을 마련한 것에는 의미를 부여해야 하지 않는가?
 
나는 이승만대통령 시절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포스터 등을 이용해 늘 국산품을 애용하는 마음을 고양시켰고 또 당시 이승만 박사는 늘 소비재 원조에 치중하는 미국에게 생산재를 원조해달라고 했다고 한다. 박정희와 추종자들은 모든 매체를 동원하여 이승만과 장면정권을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으로 매장시키고 우리를 세뇌시켰다.

박정희 추종자들이 늘 써먹었던 “80불의 절대빈곤 속에서 이만큼 사는 것이 박정희 덕이다”라는 말 속에는 상당한 과장과 왜곡이 있다. 마치 국민소득 80불은 지금 생각하면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의 빈곤국을 연상시키고 이만큼 산다는 것은 지금의 국민소득 만불을 연상시킨다.
 
보통 일반인은 경제학자나 전문가와는 달리 통계수치를 훤히 꿰차고 있지 않다. 박정희 추종자와 조중동이 늘상 박정희가 일으킨 경제를 YS와 DJ, 노무현이 말아먹었다는 것을 사실여부를 떠나 아예 기정사실화 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박정희가 죽은 79년 당시 국민소득은 지금의 1/8 정도인 1600불 수준이었다. 또 박정희가 집권하던 61년 당시의 국민소득 82불은 당시 일본의 국민소득이 500불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절대빈곤의 최빈국 수준이 아니었다. 이토록 박정희의 경제신화는 실제보다 많이 과장되었다.

흔히들 달라로 환산한 1인당 국민소득이 한나라의 경제수준을 나타내는 것으로 알고 있다. 과거 우리정부와 언론은 늘 국민들에게 그렇게 주지시켜왔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환율 변동 때마다 그 폭이 너무 커 실제 소득수준과 경제성장 정도를 나타내는데 문제가 있다. YS 재임기간 중 집권당시인 93년에 1인당 국민소득이 7,811불이었는데 퇴임시기인 98년에는 7,355불로 오히려 400불 이상 감소했다. 그러나 불변가격을 기준으로 한 실질성장률은 연평균 4% 이상을 기록하여 재임기간 중 실제로 23%의 성장을 하였다.
 
박정희는 1인당 국민소득이 실질소득이 아닌 명목소득으로 계산할 때 82불로 시작하여 죽을 때인 79년 1636불을 기록하여 외형상 연평균 18%의 엄청난 고도성장을 이룩하였다. 하지만 60년 12월까지 달러 당 65원이었던 환율이 집권시기인 61년 130원으로 두 배 올랐다. 또 박정희가 죽을 때 환율이 485원이었는데 74년부터 6년간 지속되어온 이 환율이 두 달 후인 80년 1월에는 20% 상승한 580원이었고 연말에는 700원에 육박하였다. 다시 말해 박정희는 집권 직전 2배의 환율 상승으로 저평가 된 국민소득액(82$)에서 출발하여 환율상승 전에 죽는 바람에(485원의 환율이 6년간 유지됨) 고평가된 국민소득액(1,636$)을 유지한 상태에서 죽었다. 즉 박정희는 집권과 종료시 환율변동을 잘 타는 바람에 외형상 성장률이 엄청나게 증폭되었던 것이다(실질성장율은 이 거품이 빠지는 바람에 8.5%에 그치고 주변국들과 비교할 때 내용상으로는 DJ, 전두환, 노태우보다 뒤지게 된다).
 
박정희 추종자들은 늘 “80불의 절대빈곤 속에서 이만큼 사는 것이 박정희 덕이다”라는 말로 상징조작에 성공한 것이다. 유신독재시절 박정희를 우상화시키는 일이 성공의 지름길이었고 박정희에 불리한 비판은 있을 수가 없었다. 또 박정희가 죽은 후도 조선, 중앙, 매일신문 등에 의해(박정희 전기 연재를 통해) 박정희의 우상화가 지속적으로 계속되었다.

 

 

2. 박정희 18년간 수출 638억불에, 수입 871억불, 무역적자 233억불

다음에 박정희와 추종자들이 그토록 내세우는 수출입국 건설에 대해 논의해 보고자 한다. 박정희의 18년간의 통치 기간 매년 38%의 매우 증가율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전두환 때 16%, DJ 때는 6%정도로 수출증가율이 둔화되었다. 이승만 정권 때는 자료입수 가능기간인 57년 이후부터 61년까지 연평균 15%의 수출증가율을 나타냈다. 그러나 내용을 들여다 보면 57년 2천3백만불이었던 수출액이 58년에는 천4백만불로 감소하다가 이후 집권종료 전 1년간 3천7백만불을 기록하여 연평균 48%의 수출 증가율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박정희의 38%를 능가하는 수치로서 박정희 집권이전부터 이미 급격한 수출증가의 기미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수출에 관한한 전두환씨가 지금도 큰소리 치는 것이 있는데 바로 그것이 바로 자신의 집권기간 중 대한민국 유사 이래 최초로 무역흑자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박정희 집권기간 동안 총 638억불을 수출하고 871억불을 수입하여 수출이 급격히 늘었지만 수입 또한 그 이상으로 늘어났다. 집권기간 중 무려 233억불의 무역적자를 기록하였고 집권종료시기인 79년는 150억불 수출에 203억불을 수입하여 한 해에만 53억불 적자를 기록하였다. 70년대 후반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이 지금도의 1/10수준임을 감안하면 79년 한해의 무역적자만 지금의 500억불 적자규모와 같다고 볼 수가 있다. 박정희 집권기간 무역적자 233억불은 지금의 2000억불 이상의 무역적자 규모에 해당한다. 그러니 집권기간 중 8억불의 무역흑자를 기록한 전두환씨가 자랑할 만도 했다.
 
후임 집권자 중 노태우씨가 132억불의 적자, YS가 366억불의 적자를 기록했고 DJ는 불과 5년 동안에 846억불의 흑자를 기록하여 지금까지 흑자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정리하여 보면 이승만 정권 때는 수출신장의 싹이 보였고 박정희 집권 18년 동안 높은 수출증가를 이룩했으나 수입 또한 그 이상으로 늘어나 당시 경제규모에 비추어 볼 때 매우 큰 규모의 무역적자를 나타냈다. 다시 말해 외형은 크게 늘었지만 결국 크게 믿지는 장사를 했다고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정치인으로서 운을 타고난 박정희는 대일청구권 자금, 월남특수, 중동특수 등으로 무역에서 펑크 나는 것을 메웠고 이것도 부족하여 매년 많은 차관을 도입해야 했다. 이 빛은 결국 후임정권이 짊어져야 했다.
 
최초로 흑자를 기록한 전두환은 남는 장사의 토대를 마련하였고 또 흑자규모를 늘리고 지속적으로 유지한 DJ는 크게 남는 장사를 하여 현재는 1500억불이 넘는 외환을 보유하고 있다. 여기서도 주관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평가한다면 박정희는 외형만 키웠고 실제적으로는 적자 투성이었다. 그러나 항상 수출이 늘어난 것만 보도되고 또 이것이 전적으로 박정희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홍보되었다.

 
3. 경제개발 치적은 박정희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다음으로 도로 및 발전설비 등 건설부문을 살펴보자. 박정희 정권은 모든 매체를 통하여 과거 정권을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으로 매도하고 마치 모든 경제개발이 5.16 이후에 이루어진 것처럼 졌다고 선전해 왔다. 과연 그런가? 생각해 보라! 이 좁은 땅에 2차 대전 때보다도 더 많고 가공할 포탄과 폭탄이 투하되었다는 사실을. 또 남북을 막론하고 완전히 초토화된 이 땅을 다시 복구하는데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했는가를. 이승만 정권은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37만 Kw의 발전량(지금 생각하면 보잘 것 없지만)을 확보하고 충주비료공장 및 문경시멘트 공장, 인천판유리 공장, 방직시설 등을 건설하여 국가기간 산업 육성에 박차를 가했다. 결국 박정희 집권 이전 정권에서도 경제개발의 의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박정희는 이승만 정권의 전후복구와 위와 같은 국가기간산업의 육성이 훗날 박정희의 경제개발에 귀중한 발판이 되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전 정권을 부패하고 무능한 집단으로 매도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마워 했어야 했다.
 
이제 박정희 추종자들이 그토록 자랑하는 치적인 고속도로건설을 살펴보기로 하자. 박정희는 18년이 넘는 집권기단 동안 총 1,225Km의 고속도로를 뚫었다. 이 가운데 경부선 428Km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거의 제한속도가 시속 70Km인 2차선이었다. 그리고 후임정권은 24년간 1,566Km(2002년 기준)의 고속도로를 뚫었다. 이 시기 건설된 도로는 대부분 4차선이었다. 뿐만 아니라 서울<->대전 간을 8차선으로 또 호남선을 4차선으로 확장하는 등 많은 고속도로를 넓혔다. 이 모든 것들을 감안하면 박정희 이후의 정권이 박정희보다 2.5배 이상 고속도로를 건설했다고 볼 수 있다.
 
발전설비는 어떤가? 이승만 정권 때 37만Kw, 박정희 집권기간 동안 766만Kw의 발전설비를 증설하였다. 그리고 후임정권은 무려 4,795만Kw의 발전설비 증설하였다. 발전소를 짓는데 수년이 걸리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 때의 발전설비는 다소 늘어나리라 짐작된다. 그렇더라도 박정희 이후의 정권이 박정희정권에 비해 무려 5배의 발전시설을 건설하였다. 이상에서 보듯이 국가기간산업 건설 측면에 있어서도 박정희가 유독 두드러지는 면이 없다. 집권기간을 감안했을 때 후임정권 때보다도 훨씬 부진했다. 다만 통계수치상 이승만 정권 때가 박정희정권 때보다 낮게 나왔으나 이승만정부가 전쟁 후 최악의 여건이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승만정권도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였다고 볼 수 있다.


4. 추종자들이 그토록 향수를 느끼는 70년대의 생활수준

이제 마직막으로 박정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토록 그리워하는 그 시절로 돌아가 보자. 여기서 유신독재, 인권탄압 등의 박정권의 죄악상에 대해서는 논외로 하겠다. 이해를 돕기 위해 나의 경우를 예로 들겠다. 박정희 정권 말기인 70년대 말 두 평 남짓한 단칸방에서 우리 집 세 식구가 살았다. 그 작은 방 옆에 손바닥만한 부엌이 있었고, 건너편에 냄새가 풀풀 나는 재래식 화장실이 있었다. 당시 만해도 연탄을 땠는데 윗목은 온기가 가지 않아 겨울이면 걸레가 얼어붙곤 했다. 연탄불에 겨우 물 한바가지 정도 데워 그것으로 세수하고 머리감고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때려 한참 말려야 했다. 동네에서 차 가진 사람이라곤 거의 찾아 볼 수가 없었고 같은 학년의 친구 중 열명에 한두 명 꼴로 대학엘 갔는데 그나마 아버지가 은행원이나 고급공무원인 경우에나 가능했다. 보통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철공소에 취직하거나 직업하사관으로 입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따끔 9급공무원이나 은행 등에 취직하면 동네에서 부러워했다.
 
우리 집은 동네에서 잘사는 편은 아니었지만 어머니가 손톱이 빠지도록 벌고 안 먹고 안 쓰고 하여 막내인 나는 형의 희생덕분에(일찍 취직하여 내 학비를 댐) 70년도에 대학문턱에 가보는 행운을 누렸다. 78년도에 취직하여 받은 초봉이 15만원 이듬해 17만원으로 13%올라 좋아했는데 그 해에 정부에서 발표하는 소비자물가가 18%였다. 70년대에는 물가가 20% 이상 뛰는 경우가 많았는데도 TV는 물론 조선, 중앙 등 신문도 외형적인 성장만 강조할 뿐 급격한 물가상승 등 정부의 실정에 대해서는 보도하지 못했다. 아마 DJ나 노무현 정권에서 물가가 10%만 상승했다면 박정희 추종자와 조중동이 온갖 선동으로 무능한 대통령으로 뒤집어 씌워 끌어내렸을 것이다.
 
내 말이 사실을 왜곡하고 과장되었다는 사람들을 위해 실제 통계치를 조사해 보았다. 박정희 시절 1000명당 승용차 보유대수가 6.4대, 1인당 주거 면적이 2.5평, 2년제 전문대를 포함하여 대학 진학자수가 18만명이었다. 그런데 전, 노, YS를 거쳐 DJ정권 집권 말인 2003년에 1000명당 승용차 보유대수가 204대, 1인당 주거 면적이 6.1평, 2년제 전문대를 포함하여 대학 진학자수가 60만 명이었다.
 
나는 70년대 초반 군대생활을 했는데 훈련소에서 동초근무를 선 후 새벽 2-3시경 잠자리에 들어서도 너무나 배가고파 뜬 눈으로 잠을 지새운 적이 많았다. 당시 쌀과 보리를 합쳐 1인당 하루 규정량이 732gr이었지만 정작 배식되는 밥은 몹시 적었고 부식이래야 콩나물국에 김치 몇 쪽이었다. 1주일에 한 번 돼지고기 국이 나왔는데 고기는 온데간데없고 비계덩이만 몇 개 떠 있곤 했다. 실무에 가서도 오히려 훈련소 생각이 날 정도로 배가 고팠다. 전방 오지일수록 정도는 더욱 심했다. 요즘 군대에서 배곯는 병사가 있는가? 요즘 우리생활 수준이 어떤가? 물론 요즘 취직이 안되어 고통을 당하고 아직도 달동네에서 적은 수입으로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분들도 있지만 웬만한 아파트 단지에 가보면 차를 2대 이상 가진 집이 많고, 조금만 덥거나 추워도 냉난방시설 틀어놓고, 웬만한 가정에는 컴퓨터에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식구마다 휴대폰을 차고 다니는 세상이 아닌가? 만약 요즘 소득수준으로 13평짜리 연탄 아파트에 차도 안 굴리고 휴대폰 대신 공중전화를 이용한다면 얼마나 풍족하고 여유로울가? 박정희 시절 작은 집에서 살고 차도 안 굴리고 밤낮으로 일만 하고 살았으니 먹고, 입고, 애들 학비 외에는 돈 들어 갈 일이 없었으니 불편만 감수한다면 어떤 면에서는 지금보다 삶이 편했던 것 뿐이지 박정희시절이 결코 잘 살아서 그런 것은 아니다.
 
한토마/한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