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고찰

박정희와 경제개발

이경희330 2008. 6. 21. 12:43

1960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의 쿠데타는 한국 역사를 크게 뒤바꾸어 놓았다. 그의 독재는 분명한 범죄이고 박정희는 분명 존경은 하기 힘든 인물이지만 경제개발을 이룬 사람이기도 하다.

 

장면 정권은 경제개발계획을 세우고 추진하려 했다. 김일성 역시 개발을 시작했다. 그 때 박정희는 쿠데타를 일으키고 장면의 정책, 김일성의 정책, 메이지 유신을 모두 참조해 경제개발에 착수했다.

 

박정희는 화려한 성공을 거두었다. 우선 박정희에 대해 잘 알 필요가 있다. 한국 현대사에 가장 큰 변수가 된 사람은 김일성과 박정희라고 볼 수 있다. 박정희는 군인이었고 독재자였다. 그리고 경제개발에 성공했다. 수하르토, 후지모리와 상당히 유사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박정희는 장면, 김대중 씨 같은 민주 투사 출신 대통령과 비교하면 좋은 대통령이었다고는 보기 힘들다.  박정희, 수하르토를 비교해 보면둘 다 군인 출신이었다. 모두 쿠데타로 집권했다. 쿠데타 당시 선글라스를 끼고 양쪽에 수하를 두고 있었던 것은 우스개로 많이 쓰인다. 경제개발에 성공해냈다. 그러나 그들의 개발정책은 뒷날 경제위기를 불러왔다. 그리고 민주주의를 철저하게 밟았다. 초장기 집권을 했다. 그리고 큰 지지세력과 큰 반대세력을 동시에 가졌다. 강력한 반대투쟁을 겪었다. 그리고 비참하게 권좌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다른 면도 많다. 일단 박정희는 한국이 큰 자신감을 지니고 성장하고 있을 때 자신의 측근에 의해 사망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지지자들이 많다. 그러나 수하르토는 막판에 경제와 사회가 무너지며 인도네시아가 혼란기에 빠져 있을 때 민중들에 의해 물러났다. 그리고 수하르토는 막대한 비자금, 자식들의 많은 사업 진출로 따른 독점 등을 자행했으나 박정희는 그 부하들은 상당히 부패했지만 그 자신은 부패하지 않았다.

 

6.25 전쟁 이후 남쪽은 공업 시설이 거의 없었다. 6.25 전까지만 해도 남은 북에서 발전한 전기를 공급받아 썼다. 미국의 원조 아래 간간이 유지해 오던 우리 민생에게 6.25전쟁은 절망이었다. 남은 공업시설을 모조리 파괴시키고 집을 부수고 아예 생명을 죽인 전쟁이었다.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한편 북은 1948년에 즉각 토지개혁을 실시해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으로 자작농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그나마 실시한 농지개혁을 흐지부지 시켜 버렸다. (농지개혁은 유상구입, 유상분배의 원칙으로 실시해서 1963년에 완전히 해결했다.)

 

4.19혁명은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에서 일어났다. 한국 역사 사상 최초의 민주정권이었던 장면 정권은 이제 경제개발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경제제일주의를 바탕으로 국토개발사업, 중소기업 육성을 통한 개발을 추진한 장면 정권은 5.16군사쿠데타를 맞아 제대로 성공하지 못한 채 물러났다.

 

박정희 정권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워 개발에 일본형 모델을 사용하여 경제개발에 착수하였다. 일제시대에 일본의 자본을 침투해 우리 경제가 지나치게 외국에 의존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승만 정권은 그것을 해결해내지 못하고 오히려 미국에게 원조를 받았고 정권말에는 차관을 받음으로써 그 의존성이 더 뿌리 깊어지기만 했다. 장면 정권은 그 의존성이 큰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의존도를 줄인 개발을 추진하려 했다. 그런데 박정권은 오히려 더 의존도를 높인 개발을 했다.

 

1965년 한일협정 후 그 의존도는 급속도로 높아졌다. 그렇지 않아도 원유 100% 수입, 소비재 중심 생산 때문에 우리 경제 구조는 쉽게 의존도를 낮추기 힘들다. 박정희 정권은 외자경제 체제를 구축해 개발을 추진한 정권이었던 것이다.

 

그 다음 박정희 정권은 수출제일주의를 표방했다. 박대통령은 만드는 것(工)보다는 파는 것(商)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사람이었다. 수출 기업에는 온갖 특혜를 주었고 수출액 목표도 정해두어 그 목표를 달성하도록 노력을 기울였다. 그에게 국력의 척도는 수출이었다. 정부가 선정한 수출기업들에게는 세금 면제에다가 특별 해외 여행도 시켜주었다. 심지어 밀수가 적발되어도 봐준 적도 있었다.

 

많은 기업인들이 박정권 시대를 그리워 하는 이유가 이런 어마어마한 특혜다. 그러자 코가 높아진 건 상공부 관료들이었다. 박대통령이 온통 관심을 기울이는 곳은 수출이니 발언권도 높았고 수출 목표 달성을 위해 야근도 밥 먹듯 했다. 이런 관료 주도형 개발은 그 당시 경제발전에 큰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이 계속 통할 수는 없었다. 관료들은 힘이 강해지니 뇌물을 많이 먹었고 이런 부정부패는 1970년대말부터 문제가 되어 오늘날까지 우리 사회의 큰 문제가 되고 있다.

 

1970년대말부터 슬슬 분 국제화 바람에 부패 관료들은 각종 규제를 묶어 제 배나 채운 행동들은 우리 경제에 좋을 리 없었다. 신자유주의라고 해서 민간 자율이 중요한 오늘날에 정부 주도는 절대적인 악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나친 해외의존도도 문제가 될 수 있었다. 1997년 전세계적으로 금융위기가 닥치자, 해외의존도가 높았던 우리나라는 쉽게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박정권의 개발정책은 우리를 잘살게 해주었지만, 지금 오늘날 경제위기를 가지고 온 근본적 원인이 되는 것이다.

 

박정권의 개발 정책의 문제는 또 있다. 일본식 모델은 두 가지가 있다. 메이지 유신 방식과 맥아더 군정식이다. 메이지 유신 당시에는 대규모의 재벌, 대기업을 키웠다. 미쓰비시 같은 그룹들이 이때 탄생한 것이다. 이 재벌 중심 구조는 대성공해 일본을 강국으로 키웠다. 그러나 일본의 패전 후 군정이 들어섰다. 맥아더 중장과 요시다 총리는 재벌 해체 작업에 착수하였다. 재벌을 자른 후 시작한 것이다. 이 역시 성공해 맥아더 중장, 요시다 총리 모두 일본인들의 존경을 크게 얻고 있는 사람들이다. 대만은 맥아더 군정처럼 개발했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장징궈 총통은 중소기업 육성을 통한 개발을 추진해 오늘날 대만 경제를 이끌어냈다.

 

장면 총리 역시 그와 같은 방식을 채택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삼은 사람이었다. 거기에 스탈린의 개발도 참조한 사람이었다. 중화학 공업 중심 재벌 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재벌의 장점은 막강한 돌파력이다. 그러나 규모만큼 둔해서 융통성이 없다고 할까? 재벌 중심 체제는 그 스피드와 돌파력으로 빠르게 우리 경제를 성장시켜 주었다. 그러나 그 재벌은 정부의 비호 아래 자랐다. 냉엄한 시장경제 체제와 세계화가 시작된 김영삼 정권. 그 시대에 재벌은 그 변화를 잘 따라가기 힘들었다. 결국 재벌이 무너지자 우리 경제도 함께 무너졌다. 비효율적인 재벌 구조가 오늘날 경제위기를 갖고 온 것이다.

 

마지막으로 노동자 인권이다. 사실 그 시대에 우리가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박대통령과 그 휘하의 관료들의 유능함보다는 우리 국민들의 근면성실 덕분이었다. 수 백년을 이어져 오던 가난은 이미 바닥을 쳤다. 그 때 우리 국민들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을 만큼 가난했다. 1원도 아끼던 그 당시 우리 국민들이었다. 근면, 검소의 정신은 독일과 일본의 번영을 가져다 준 정신이었다. 그 정신이 우리에게도 깃든 것이다.

 

또 다른 원인은 정치인들의 이해타산이었다. 공산주의는 못사는 나라에 온다. 굶으면 공산주의에 매료된다. 미국이 독일의 분단 후 서독에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은 것은 서독의 공산화를 막기 위함이었다. 이것이 성공했고 서독이 동독보다 잘살게 되었기에 독일은 서독 쪽으로 통일이 된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서독이 유럽의 반공라인의 최전선에 있다면 남한과 대만은 극동 반공라인의 최전선에 있었다. 남한과 대만의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국민들이 못 살면 국민들이 분노해 자신들을 내쫓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박정희가 아니었어도 장면 총리가 개발에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충분히 할 수 있다. 박정희는 그 개발이 시작될 때 어쩌다가 남한의 지도자가 된 사람일 뿐이다.   그런 가난에서 필연적으로 벗어날 때에 우리 국민들은 너무나도 근면하게 일했다. 그리고 많은 국민들이 가난을 이겨냈다. 그러나 그 밑바닥에는 너무나도 슬픈 일들이 있었다.

 

노동자들은 진짜로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일했다. 어린 나이에 가난한 집안 살림을 도우려 일하러 나간다. 그 아이들이 일하는 시간은 거의 15시간, 언제나 잠이 부족하지만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피곤한 상태에서 일했다. 전태일 열사가 일했던 청계천 평화시장 같은 곳을 예로 들어본다. 옷감에서 엄청난 먼지가 날 것이다. 그러나 환기할 장치, 창문조차 없다. 그런데서 좀 오래 일한 사람들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질병에 걸린다. 그러나 병에 걸린지조차 모르는게 태반이며, 알아도 치료도 못한다. 계속 일하라는 재촉에 점심은 굶기가 일쑤, 화장실은 있어보았자 더러운 거 조그만거 있다.(거리를 지나가다가 어쩌다 볼 수 있는 이동 화장실을 생각하면 됨) 조금 게으름 피웠다고 얻어 맞는다. 일거리가 밀리면 무조건 야근이다. 잠을 제대로 못 자 피곤한데 야근은 해야 하니 수면제를 먹는다.(수면제를 먹는 것이 좋은게 아닌 것은 알 것이다.) 이렇게 해서 겨우겨우 일해도 보수는 1전도 올라가지 않는다. 월급은 3000원 정도. 교통비를 감안하면 차 한 잔 겨우 마실 수 있는 정도이다.

 

이런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전태일 열사 분신자살 사건은 충격적이었다. 이 사건은 국민들에게 충격을 충분히 줄 수 있었다. 특히 그가 남긴 유언 세 마디는 훗날 박정권을 뒤흔들었던 계기가 될 수 있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화려한 경제개발의 뒤에는 이런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