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정부 초기인 2003년 하반기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단 회의. 삼성 이건희 회장을 비롯한 원로·현직 재벌총수들이 모인 회의에서 참석자들은 “박정희 시대의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2004년 5월 전경련 부설 한국경제연구원 좌승희 원장은 열린우리당 주최 강연회에서 “여러분이 싫어할지 모르겠지만 청산 대상인 박정희 패러다임이 한강의 기적을 가져왔고 이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재벌기업들이 박정희 경제모델을 ‘좋았던 옛날’로 추억하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재계 판도, 70년대 말에 거의 짜여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어디선가 “박정희 정권에서의 70년대가 기업하기에 가장 신바람 났던 시기였다”고 회고한 바 있다. 정 회장은 “개인적인 혜택을 받은 것은 없으나 나는 현대의 성장 자체를, 경제발전에 역점을 두고 강력하게 추진한 박정희 대통령의 덕분으로 생각한다”고 술회했다(정주영,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실제로 1970년대는 ‘재벌의 황금기’였다. 재벌기업은 1960년대 수출 기간산업에 속속 참여하면서 재벌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 기간 동안 금융·조세·차관 등 정부의 모든 특혜 지원이 수출 관련 활동에 집중됐다. 이어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 추진과 함께 재벌은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에 이르는 전 분야를 거느리는 거대집단으로 성장했다.
럭키그룹은 계열사를 1974년 17개에서 4년 뒤 43개로 대폭 늘렸고, 대우도 10개에서 35개로, 효성은 8개에서 24개로, 롯데는 6개에서 15개사로 늘렸다. 우리나라의 재계 판도는 1970년대 말에 거의 짜였다. 국민경제 전체에서 20대 재벌의 부가가치가 차지하는 비중은 1973년 7.1%에서 1978년 14%로 커졌다. 중화학공업화로 재벌 확장은 급속히 진행됐는데, 상위 10대 재벌의 부가가치가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73년 5.1%에서 1978년 10.9%로 증가했다. 1970년대에 재벌은 전체 경제보다 더 빨리 성장했으며 큰 그룹일수록 더 빨리 성장했다.
재벌 체제가 한국의 경제환경에 가장 적합한 체제인지, 아니면 외환위기의 주범이자 해체의 대상인지를 둘러싼 논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1960∼70년대에 형성된 재벌이 압축적 고도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했지만 동시에 취약성과 모순을 폭발시키기도 하는 등 재벌 체제는 긍정적 유산과 부정적 폐혜를 둘 다 안고 있다. 재벌 없이 중소기업 중심의 기업구조로 한국 경제의 눈부신 성장이 과연 가능했을가, 라고 물을 수도 있지만 ‘가정’을 통해 역사를 평가하는 어렵다.
아무튼 재벌의 형성과 성장은 박정희 정권의 정부주도 개발전략의 산물이었다. 우리나라 재벌이 시장논리와 경쟁을 통해 자생적으로 탄생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박정희 정권은 전략산업과 이 과제를 떠맡을 기업집단을 선정한 뒤 집중적으로 지원·보호했다. 재벌을 산업화의 역군으로 지명하고 이들한테 산업발전을 맡긴 것이다. 당시에 “투자에 필요한 저축이 부족한 상황에서 선진국을 단숨에 따라잡으려면 소수 특정 기업에 자본을 집중시키는 길밖에 없다”는 논리가 지배했다. 박정희는 재벌기업에 대규모 외자를 배분하고 시중 금리의 절반에 불과한 저리 ‘정책자금’을 지속적으로 공급해 재벌 성장의 후견인 역할을 했다. ‘대한상공회의소의 산증인’으로 불리는 대한상의 강승일(66) 상의역은 “당시 박 대통령은 작은 기업으로는 국제 사회에 나가서 선진국의 일류 기업들과 싸울 수 없으므로 기업을 키워야 한다고 늘 말하곤 했다”며 “당시에는 대기업에 혜택을 주는 것을 사회적으로 문제 삼지도 않았고, 재벌을 규탄하는 일도 없었다”고 말했다. ‘재벌’이란 말은 1970년대 초부터 이미 쓰이기 시작했다.
과잉·중복 투자의 모순 폭발
1960∼70년대에 제정된 8개 개별산업육성법은 재벌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인 주요 산업 진입 제한, 정책금융, 조세 감면 등 금융·재정 지원을 담고 있었다. 이렇듯 금융·조세·행정적 차원의 집중적인 지원으로 잠재기업의 시장 진입을 막는 장벽이 두껍게 형성되면서 재벌은 독점적 이익을 제도적으로 보장받아 급성장하게 된다. 치약은 럭키, 라면은 삼양, 텔레비전은 금성 이런 식이었다. 재벌이 자본을 축적하는 과정에서 다수 국민들의 희생이 뒤따랐다. 재벌에 배분할 자금을 동원하기 위해 중앙은행은 통화를 증발해 인플레이션을 일으켰고, 이를 통해 사실상 강제 저축을 유도했다. 물가 폭등에 따라 노동자들의 실질임금과 생활수준은 계속 떨어졌다. 정부가 소수 재벌을 선택한 뒤 자금을 집중 배분하는 시스템에서 금융기관은 박정희의 명령에 따라 재벌에 재원을 지원하는 정부의 말단 창구로 전락했다. 이러한 ‘관치금융’에 따라 금융기관은 본래의 대출심사와 사후감독 기능을 상실하고 만성적인 저발전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특히 재벌기업은 “우선 많이 빌리고 보자. 문제가 생기면 정부가 구제해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도덕적 해이에 빠져들었다. 박정희가 이익을 보장해주자 재벌들은 전공 분야든 아니든 가리지 않고 무분별한 확장에 나섰다. 정부도 시장도 ‘길들일 수 없는 괴물’(영국 <이코노미스트>, 1995) 재벌이 탄생한 셈이다.
박정희는 1966년 외자도입법을 개정해 해외에서 돈을 빌리기 힘든 재벌기업들한테 정부가 지급보증을 해줬다. 이에 따라 기업들은 무리하게 외채를 빌려다 썼고, 기업 부실로 인해 1970년대 초에는 국가가 외채지급불능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특히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이전에 일어난 가장 큰 경제위기였던 1979∼80년의 공황은 중화학공업화 추진 과정에서 발생한 과잉·중복 투자의 모순이 폭발한 것이었다. 상위 10대 재벌의 평균 계열사 수는 1972년 7.5개에서 1979년 25.4개로 대폭 늘었는데, 재벌의 팽창 속도만 봐도 당시 중화학공업 과열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다. 과열·중복 투자는 1979년부터 대규모 기업부실을 낳았다.
박정희의 최고경영자(CEO) 수첩에는 언제든지 영입 가능한 인물들의 리스트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평소에 잘 아는 몇몇 사람들 중에서 사업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을 찍어 맡긴 것이다. 1978년 가을 미국 뉴욕에 가 있던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전화를 받고 화들짝 놀랐다. 옥포조선소 건설공사가 대우에 맡겨졌다는 통보였다. ‘그럴 리가 없어.’ 김우중은 출국 전에 남덕우 부총리와 만나 “저는 조선이 무엇인지 전혀 모릅니다”라고 사양했다. 당시 조선 경기는 최악의 상태였기 때문에 재벌들은 옥포조선을 맡기 꺼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 부총리는 “박 대통령께서 직접 선정하셨기 때문에 당신과의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되었소. 아무튼 미안하오”라고 말했다(<대우그룹 김우중>, 율곡문화사). 대우의 성장은 철저하게 박정희 정권의 수출 드라이브 정책과 궤를 같이하고 있었다. 대우는 정부로부터 수많은 부실 기업을 인수해 1970년대 말에 재벌 상위 10위권에 진입했다.
사채동결, 국민의 돈 떼먹다
재벌들은 투기에 가까운 사업을 박정희의 말에 따라 거의 타율적으로 떠맡았지만, 일단 사업이 결정되면 온갖 특혜를 요구했다. 1963년 박정희는 삼성 이병철 회장을 만나 농약공장 건설을 권유했다. 이병철이 어렵다고 하자 박정희는 “그러면 비료공장은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다. 이병철이 ”생각해보겠다”고 시큰둥하게 대꾸하자, “이 사장은 우리에게 협조할 생각이 없습니까”라고 박정희가 다시 다그쳤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내가 전적으로 뒷받침하겠습니다.” 그러자 이병철이 맞받았다. “대통령 혼자 애써주신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행정부는 물론 거족적인 뒷바침이 필요합니다.”(<이병철 경영대전>, 바다출판사)
재벌들이 온갖 특혜를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인 건 1972년 8·3 조치에서 드러난다. 정부와 은행의 무분별한 재벌기업 지급보증으로 인해 기업 부실이 골칫거리로 등장하자 박정희는 부실기업을 살리기 위해 1972년 8·3 사채동결 긴급명령 조치를 취했다. 모든 기업의 사채 지급을 동결하고 월리 1.35%에 3년 거치 5년 분할상환 조건으로 전환하거나 기업에 대한 출자로 전환하도록 강제한 것인데, 다수 국민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재벌기업들에게 이전소득을 안겨준 것이었다. 이에 대해 대한상의 강승일 상의역은 “당시에 경제인 간담회를 하는데 기업인들이 사채업자한테 빌린 돈을 탕감해주는 조처에 대해 국민들한테 미안한 마음을 갖지 않고 뻔뻔스러운 모습을 보여 착잡했다”고 털어놓았다.
정경 유착과 ‘검은 돈’으로 대표되는 정권과 재벌의 밀월도 이때부터 시작됐다. 정부의 특혜와 비호 속에서 성장한 재벌은 대규모 정부사업을 발주받거나 외국 차관을 제공받을 때 일정 비율의 정치자금을 갖다 바쳤다. 전두환·노태우 비자금 사건 당시 전두환씨는 수천억원의 비자금 축재를 “관행이었다”고 말했는데, 박정희 시대부터 만연돼 있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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