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먼데이’가 계속 재현되고 있다. 시장은 이번 금융위기를 현실화시킨 9월14일(현지시각)의 리먼브러더스 파산 신청 이후 구제금융 법안의 진전과 상관없이 대체로 부정적으로 반응하고 있다. 미국 행정부가 구제금융 계획을 발표한 뒤에도, 미 증시는 26일까지 2.15%가 하락했다. 법안 통과가 지연된 탓도 있지만, 구제금융안이 시장에 ‘믿음’을 주지 못한 탓이 더 크다. 다우지수 102년 역사상 가장 큰 29일의 폭락은 법안 부결의 영향을 받았으나, 이날 시장은 부결 전에도 이미 3%나 폭락한 상태였다. 시장의 불안이 법안 통과 여부와 상관없이 크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번 금융위기를 예견했던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는 이날 자신의 블로그에 “정부의 어떤 정책적 행동도 시장을 통제할 수 없다는 신뢰의 상실이 금융시장에 보편화됐다”고 밝혔다.
미국의 블랙먼데이는 단순히 법안 통과 지체에 따른 일시적인 진통이 아니라, 대공황 이후 최악인 이번 금융위기에 대한 구제안이 지니는 근본적 한계를 보여주는 성격이 짙다. 국제통화기금(IMF) 수석 이코노미스트를 지낸 사이먼 존슨은 “구제금융안이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을 것”이라고 비관적으로 전망했다. 미 정부가 구제금융 이외에 여러 정책수단을 동시다발적으로 꺼내 드는 것도 구제금융안이 지닌 한계를 방증한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연준)는 이날 오전 하원 표결에 앞서 영국·일본 등 8개국 중앙은행과 미 달러화의 일시적 통화교환예치(중앙은행 간의 통화 스와프) 한도를 기존의 2900억달러에서 6200억달러로 확대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긴급대출 프로그램을 통해 은행들에 1500억달러를 추가로 공급하겠다고도 발표했다. 미 금융시장의 급변동에 따른 일시적인 달러 유동성 부족사태를 방지할 목적이다. 하지만 폭락하는 증시를 전혀 막지 못했다. ‘매크로이코노믹 어드바이저스’의 로런스 마이어 부회장은 “연준의 유동성 공급 조처들은 미봉책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가용정책도 줄어
미 정부의 가용 정책수단도 줄어들고 있다. <뉴욕 타임스>는 “연준이 이미 ‘돈 찍어내기’(통화 발행)를 남용하면서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며 “지난해 말 기준, 연준이 재무부 채권 형태 등으로 보유한 8천억달러의 달러보유고가 3천억달러 이하로 줄어들었다”고 전했다. 로버트 다이 ‘피엔시 파이낸셜’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이러한 정부의 노력들이 신용시장의 신뢰를 증강시키는 데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지방은행들인 ‘소버린 뱅코프’와 ‘내셔널 시티 그룹’의 주가가 60% 하락하는 등 이날 에스앤피(S&P) 파이낸셜지수는 10%나 떨어졌다. 지금까지 12개 지방은행이 파산했는데, 앞으로 100개 이상의 지방은행들이 신용경색으로 파산할 전망이라고 미 연방예금보험공사(FDIC)가 전망한 바 있다. 정부가 나서서 시장을 치료하기엔 상처가 너무 깊다. 미국 경제를 이끄는 리더십의 실종도 시장의 불안정성을 키우고 있다. 레임덕에 빠진 조지 부시 대통령은 사실상 지도력을 상실한 지 오래다. 11월4일 대선과 하원 선거가 끝나고서야 금융위기에 대처할 정치적 추동력이 생길 것이라는 전망이 크다. ‘구제금융안이 금융위기를 진정시켜 주지 않겠느냐’는 전망을 하기엔 아직 비관적인 근거들이 너무나 많다.
월가 부자에 대한 지원
특히 미국 하원에서 29일 구제금융법안이 부결된 데에는 ‘월가 부자에 대한 지원’이라는 성난 민심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상원의원과는 달리 지역구 민생 챙기기가 주임무인 하원의원들로서는 ‘정치적 판단’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영국 BBC는 30일 “구제금융 청사진의 성격에 대해 민주-공화 양당 모두 불만이라는 사실은 모두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법안을 부결시킬만큼 강렬할 것이라곤 거의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의원실에는 민주, 공화 양당을 막론하고 투표 직전까지도 구제금융법안에 반대하는 이메일과 편지, 전화가 폭주했다. 거리에선 항의 시위도 잇따랐다. 앞서, 26일 AP 여론 조사에선 응답자의 30%만 구제금융 법안에 찬성한 반면, 45%가 반대했으며, 25%는 결정하지 못했다고 답했다. BBC는 “미국 유권자들은 현재의 금융위기를 서민들의 실제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지 않으며, 구제금융안도 초라한 신세가 된 월가의 부자들을 위한 복지사업으로 여긴다”고 전했다.
비난 여론이 거센데다 △정치적 신념과 경제관의 차이 △조지 부시 행정부에 대한 실망과 레임덕 등 여러 요인들도 겹쳤다. 이번 투표는 당론보다는 의원 각자의 정치적 생존에 따른 자유투표에 가까웠다. 이런 경향은 집권여당인 공화당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조지 부시 행정부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공화당 의원 중 133명이 반대 쪽으로 몰표를 던졌다. 찬성 65표의 2배가 넘는 수치다. 공화당 의원 대다수는 구제금융안이 자본주의의 기본 원칙을 폐기하는 것으로, ‘미국적 방식’이 아니라고 본다. 공화당의 한 의원은 투표 직전 “법안이 통과되길 원한다”면서도 “그러나 다른 사람이 찬성표를 찍길 바란다, 난 아니다”고 말했다. 젭 헨살링 의원(공화당)은 “구제금융안은 연방정부가 최후의 보증인이 된다는 것인데, 이것은 이 나라를 사회주의로 기울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럴 아이사 의원(공화당)도 <크리스찬사이언스모니터>와의 인터뷰에서 “찬성표를 던진다면 ‘레이건 시대’를 끝장내는 것인데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순 없다”며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민주당 의원들에게도 법안은 ‘뜨거운 감자’였다. 찬성표를 던진 캐롤린 멀로니 의원은 “이 표결로 의원직을 잃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은 30일 “금융시스템 구제 계획안이 부결된 것은 워싱턴의 정치적 리더십 실패의 산물”이라고 지적했다.
구제금융 반대파 "후회없다"..美의회 견해차 여전
조지 부시 미 대통령과 하원의 지도자들이 29일 구제금융 법안이 하원에서 부결된 데 대해 충격과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반면 부결투표의 장본인들은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담담한' 표정이다. 부시 대통령이 30일 조속한 재의결을 촉구하고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과 양당의 원내대표진도 대통령에게 보내는 서한을 통해 법안처리를 위한 노력을 경주할 것임을 확인했지만 정작 `키'를 쥔 일부 당사자들은 기존의 강경한 반대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어 이들의 애를 태우고 있다. 정가 주변에선 정부와 그외 법률통과에 이해관계를 가진 이들의 로비활동이 이번처럼 무력한 모습을 보인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부시 대통령은 법안 처리에 앞서 수 차례 대국민 성명 등을 통해 법안처리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또 미 재계를 대변하는 상공회의소는 하원의 투표 몇 시간 전에 의원들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 "미국인들은 재난이 발생하는 것을 지켜보자는 이들의 행위를 묵과하지 않을 것"이라며 법안가결을 종용했다. 그러나 강도 높은 법안가결을 위한 로비활동도 `금융귀족'을 세금으로 도울 수 없다는 대중정서의 벽을 넘지 못했으며 그 결과는 법안의 부결이었다. 법안에 찬성표를 던진 공화당의 존 캠벨 의원은 "로비스트들의 공세도 거대한 대중의 반대여론을 거스를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하원의 부결사태 이후 증시폭락을 경험하면서 하원의 결정을 비난하는 여론도 확산되고 있으나 여전히 반대입장의 의원들은 뜻을 꺾지 않고 있다. 일라이저 커민즈 메릴랜드주 민주당 의원은 7천억 달러 규모 구제금융 계획이 유권자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아 반대했다면서 "나는 내가 한 일에 대해 후회가 없다"라고 말했다. 커민즈 의원은 자신의 선거구에서 만난 집 잃은 시민들에 대해 "그 사람들은 수년간 세금을 내왔고, 국가에 피, 땀, 눈물을 바쳤다"고 밝혔다. 오리건주의 피터 데파지오 민주당 의원도 "나는 후회하지 않으며, 그것은 내 생애 최고의 투표였다"며 금융산업을 살리기 위해 납세자의 돈이 아닌 월스트리트에서 모은 돈으로 구제금융을 대체할 기금을 마련할 것을 요구했다. 로이드 더깃 텍사스주 민주당 의원은 하원 지도부에서 수정된 구제금융안을 내놓아 통과시키려는 시도에 대해 성공하지 못할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커민즈, 데파지오, 더깃 의원은 구제금융이 아닌 대안적 경제구제안을 계획하는 의원 모임에서 활동하고 있다. 다급해진 정부와 의회 지도부 등은 예금보호 한도 증액 등 수정안을 제시하며 반대의원들의 압박에 나서고 있다. 공화당의 존 뵈너 하원 원내대표는 연방예금보험공사(FDIC)의 예금자 보호 한도를 기존 10만달러에서 25만달러로 증액하자는 양당 대선후보의 제안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상공회의소는 이번 부결사태에 대해 의회가 경제를 잘못 이끄는 분명한 사례라며 대량실업과 경기침체를 막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