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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검찰 수사관들이 석유공사 본사를 압수수색 후 나서고 있다. 많은 공기업들은 높은 연봉에 비해 방만한 운영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연합뉴스 | |
사기, 횡령, 뇌물수수, 위·변조, 배임, 편취…. ‘신이 내린 직장’이라 불리는 공기업에 대한 검찰수사 결과 적발된 혐의들이다. 직무 관련 민원을 들어주는 대가로 뇌물과 향응을 제공받는 것부터 정부 지원금을 횡령해 자기 주머니를 채우다 못해 성접대까지 받은 그야말로 ‘비리 전시장’이다. 한 공기업 직원이 공금을 횡령해 1년에 3000만 원이 넘는 돈을 유흥비로만 탕진했고 회사도 몇 년 동안 이 사실을 발견해내지 못했다면 공기업의 도덕적 불감증이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지 짐작할 수 있다.
국가가 국민에게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국민의 세금을 투입해 만든 공기업들이 이처럼 각종 비리에 쉽게 노출되면서 공기업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공기업 직원들이 받는 적지 않은 연봉까지 감안한다면 국민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은 훨씬 크다. 공기업들이 이처럼 비리불감증에 물들어 있다면 ‘신이 내린 직장’이 아닌 ‘신도 저버린 비리의 온상’이라는 비판을 들을 날도 머지 않아 보인다.
최근 검찰이 발표한 공기업 비리 백태를 들춰봤다.
공기업 비리의 가장 전형은 뇌물수수. 공기업 특성상 해당분야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들이다. 자체 감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면 비리가 구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인 것. 이번에 검찰에 적발된 공기업 직원들은 해당분야 관계자들의 각종 민원(?)을 해결해 주는 대가로 갖가지 뇌물을 제공받았다.
한국도로공사 이 아무개 실장 등 2명은 2005년 말 무면허 공사 업자에게 공사를 발주해준 대가로 무료 해외 여행길에 올랐다. 업자가 두 사람을 데리고 2박3일간 태국에서 머무르는 동안 쓴 돈은 1080만 원. 이들은 수영장이 갖춰진 빌라를 빌린 뒤 현지 접대부 등을 불러 성매매를 하는 등 이른바 ‘황제 여행을’ 즐겼다. 이 실장은 평소에도 공사 업자로부터 수시로 수백만 원 상당의 술과 골프 접대를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공사 발주 및 업무 편의 대가로 받은 돈만 총 4000만 원. 뇌물, 성접대, 골프접대 등 공기업 직원이 지위를 악용해 저지를 수 있는 각종 비리가 골고루 포함된 사례다.
경기도시공사 1급 간부 신 아무개 씨(53)는 수원시 광교신도시 개발 예정지 보상 평가기관으로 11개 감정평가법인을 선정해 주고 그 대가로 평가법인들이 800만∼900만 원씩 갹출해 모은 9500만 원을 감정평가사 명의의 차명계좌로 송금받았다. 특히 이 건은 선정 기관들이 비슷한 금액을 일괄 갹출해서 발주처 간부의 차명계좌로 송금하는 관행화된 구조적 비리라는 것이 검찰 측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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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시설관리공단 최 아무개 전 이사장은 뇌물 1000만 원을 받고 면접 점수를 조작해 직원을 채용했다. 최 전 이사장은 승진 대가로도 뇌물을 받았으며 직원 격려금도 유용한 것으로 드러나 부산지검에 구속됐다.
횡령도 대표적 공기업 비리의 하나다. 지난 6월 구속된 근로복지공단 5급 직원 하 아무개 씨(35)는 3년간 총 14억 3000만 원의 돈을 횡령해 이를 모두 탕진했다. 하 씨가 처음 횡령한 돈은 6억 원. 모두 주식에 투자했으나 땡전 한푼 건지지 못하고 다 날려버렸다. 오기 반 두려움 반으로 또 다시 수억 원을 횡령해 이번에는 경마 경륜 로또 등 사행성 짙은 게임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로또를 구입하는 데 친인척 명의까지 도용해 한 주 동안 1000만 원을 사용한 적도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하 씨는 유흥업소나 안마시술소에도 적지 않은 돈을 썼다. 그는 횡령 사실을 감추기 위해 각종 공문서와 사문서를 위조했다. 하 씨의 이런 범죄행위는 3년이나 지속됐지만 한 번도 내부 시스템에 걸려들지 않았다. 근로자들의 기초생활보호를 위해 쓰여야 할 돈이 30대 중반의 한 남자의 욕망을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사용되고 있었던 것.
한국기계연구원 부설 연구소 전·현직 연구원 6명은 과학 기자재 도매상으로부터 물품을 구입한 것처럼 서류를 꾸며 22억 원을 빼돌렸다. 이 중 책임연구원 한 명은 6년간 무려 9억 4000만 원을 편취해 이 중 2억 원을 유흥업소 술값으로 사용했다. 1년이면 3000만 원이 넘는 돈을 술값으로 탕진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지난 7월 25일 대한주택공사를 전격 압수수색한 경찰은 “고구마 줄기처럼 파면 팔수록 수사대상자가 늘고 있다”며 혀를 내둘렀다. 당초 경찰은 건설브로커 나 아무개 씨(53)를 수사하면서 나 씨로부터 740만 원 상당의 향응을 제공받은 판교사업단 전문위원 김 아무개 씨(51)가 설계변경 대가로 건설업체로부터 2억 7000만 원을 챙긴 사실을 확인했다. 경찰은 이어 김 씨를 수사하면서 주공의 전 서울본부장 권 아무개 씨(61)에게 인사청탁의 대가로 3700만 원을 건넨 사실을 밝혀냈으며 또 권 씨에 대한 은행계좌 추적을 벌인 결과 퇴직 후 토목설계회사의 부회장으로 입사한 뒤 주공 임직원들에게 7000만 원 상당의 향응을 한 혐의를 확인하고 현직 임직원 10여 명에 대한 수사를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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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 비리 수사와 함께 진행된 국가 보조금 비리 수사에서도 공무원들의 도덕적 해이가 나타났다. 검찰은 국가 보조금을 유용·편취한 사례를 62건 적발하고 183명에 대해 수사 중이다. 이들이 유용한 보조금만 440억여 원에 달한다.
전주지검 등 3개 지검·지청은 허위 서류를 작성해 유가 보조금을 가로챈 운수업자 3명을 구속기소하고 44명을 불구속 기소했다. 이들 중에는 시청 공무원이 직접 1억여 원을 빼돌린 사례도 있었다.
대형마트로 인해 죽어가는 재래시장을 지원하기 위한 보조금이 재래시장 간부들에 의해 빼돌려지는 경우도 있었다. 정부가 전통 재래시장의 경쟁력 강화차원에서 재래시장 현대화 사업에 지원한 수십억 원의 돈이 일부 재래시장 관계자들에 의해 횡령된 것.
이외에도 대체에너지 기술개발 정부 출연금, 중소기업 기술개발 지원을 위한 한국산업기술평가원 출연금도 줄줄이 새나간 것으로 파악됐다.
검찰 수사까지 이어지지 않았지만 공기업의 방만 경영 실태는 감사원 감사를 통해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한국가스공사, 한국가스기술공사, 석유공사 등은 중식보조비나 통근보조비 등을 기본급에 통합해놓고도 2~3년 사이에 모두 부활시켜 매월 1인당 최소 5만 원에서 최고 27만 원까지 지급했다. 중식보조비, 통근보조비, 자기계발비 등의 명목이다.
한국수출보험공사는 대학생 자녀에 대한 학자금을 무상이 아닌 융자로 지원하는 규정을 무시한 채 노사합의 하에 사내 복지기금에서 학자금을 무상 지원하고 있다. 특히 이러한 혜택은 연봉에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를 연봉에 포함해 계산하면 공사 직원들이 받는 급여는 발표된 것보다 높은 수준인 셈이다.
박혁진 기자 phj@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