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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중인 지난해 7월 20일 박근혜 후보가 장애인위원회 전진대회에 참석한뒤 차에 타기에 앞서 강재섭 대표와 악수하고 있다. |
ⓒ 오마이뉴스 이종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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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가 지난해 당 대통령후보 경선에서 박근혜 전 대표를 은밀히 지원했음을 인정하는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강 대표가 자신의 주장처럼 경선 국면에서 중립을 지키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당 내에서 미묘한 파장을 예고하고 있다.
강 대표는 지난 17일 대구·경북지역 언론사 기자들과의 오찬 간담회를 했는데, 이 자리에서 그는 11일 이명박 대통령과의 청와대 주례회동을 언급하며 "이 대통령도 공천 결과에 충격 받았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강 대표의 발언은 '오프더레코드(비보도)'를 전제로 한 것이었지만, 일부 지역신문이 다음날 이를 보도한 후 상당수 언론이 <이 대통령 "한나라 공천, 나도 속았다">는 등의 제목의 기사로 보도됐다.
당일 오찬에는 대구 출신의 이명규 사무부총장(친 이명박)이 배석했고, 박근혜계의 최경환 의원과 구상찬·이정현 당선자도 뒤늦게 합류했다.
"박 전 대표가 밀어 승리... 겉으론 '중립' 유지했지만, 실제로는 '친박'"
그러나 오찬 참석자들을 정작 놀라게 한 것은 이 대통령의 '공천' 발언이 아니었다고 한다. <오마이뉴스> 취재 결과, 이날 강 대표는 지난해 대선후보 경선국면에서 자신이 박 전 대표를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소상하게 설명했다.
강 대표는 이날 고량주를 여러 잔 들이켰다고 한다. 한 참석자는 "18대 총선 불출마로 20년간의 의정 생활을 정리하게 된 마당에 고향의 친분 있는 기자들을 오랜만에 만나니 강 대표가 긴장을 늦추고 하고 싶은 얘기를 마음껏 한 것 같더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한 기자가 "(박 전 대표와의 불화 때문에) 대구에서 강 대표를 곱지 않게 보는 사람이 많더라"고 말하자 취기가 오른 강 대표가 이렇게 답했다.
"2006년 전당대회에서 박 전 대표가 나를 밀었고, 이 대통령이 이재오 최고위원을 밀었는데 내가 이겼다는 건 다 아는 사실 아니냐? 내가 겉으로는 '중립'을 유지했지만, 실제로는 '친박'이었는데 박 전 대표가 그걸 몰라주니 답답하다."
강 대표는 이렇게 운을 뗀 뒤 경선 당시의 비화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지난해 한나라당 경선을 앞두고 박근혜·이명박 양대 캠프는 경선 룰을 놓고 치열한 협상을 벌였다.
우선 경선시기를 놓고 양측 의견이 6월(친박)과 8월(친이)로 엇갈렸지만, 강 대표가 "8월에 선거인단 20만명으로 경선을 치르자"고 제안하자 양측 모두 이를 수용했다. (2007년 3월 중순, 이하 2007년) 강 대표는 "박 전 대표는 당헌당규 대로 '6월-4만명'을 고집했지만, 내가 '여론조사에서 너무 차이가 나기 때문에 6월에 경선하면 진다'고 설득해서 마음을 돌려놓았다"고 회고했다.
강 대표는 경선 기간 내내 자신이 '중립'임을 강조했고 하위 당직자들에게 "중립을 지키지 않으면 제재를 가하겠다"는 말까지 했지만, 실상 그 자신도 양대 계파 사이에서 중심을 잡지 못한 셈이다. 그런데 박 전 대표에 대한 강 대표의 '코치'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고 한다.
경선 시기를 합의한 후에도 양측은 선거인단의 20%를 차지하는 여론조사 반영방식을 놓고 지루한 협상을 이어갔는데, 5월 초까지도 결론이 나지 않아 경선 자체가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이명박에겐 미안하지만, 중재안 박근혜에게 유리했다"
강 대표는 5월 9일 기자회견을 통해 ▲선거인단 수 조정(20만명→23만1652명) ▲국민투표율 최저하한선(67%) 도입 ▲투표율 제고를 골자로 한 중재안을 발표했다. 문제는 강 대표가 중재안을 발표하기 전에 박근혜 캠프에만 자신의 구상을 미리 알려줬다는 것이다.
강 대표는 박 전 대표의 측근 A의원의 이름을 거론하며 "A의원이 주판알을 튕기더니 '이 정도면 우리에게 승산이 있다'고 환영했지만, 박 전 대표가 끝내 거부하더라. 하지만 이명박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 중재안은 박근혜에게 유리한 안이었다"고 설명했다.
강 대표는 5월 15일 상임전국위에서 중재안을 상정하려고 했지만 박근혜계의 김학원 의원(당시 전국위의장)이 "양측의 합의 없이는 중재안 상정은 불가하다"는 입장을 밝혔고, 한나라당의 분당 위기가 고조됐다.
강 대표는 5월 11일 '대표 및 국회의원 사퇴'라는 승부수를 다시 던졌는데, 이때도 박 전 대표에게 "내가 사퇴 카드를 던질 테니 이번에는 중재안을 수용해야 한다"는 언질을 줬다고 한다.
강 대표는 "내 전화를 받은 박 전 대표가 '지금 바로 수용하는 건 나로서도 곤란하니 한동안 '반대' 입장을 유지하다가 상임 전국위가 열리기 직전 수용하겠다'고 답하더라"고 술회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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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5월 21일 서울에서 열린 제3차 전국위원회에서 당시 이명박, 박근혜 한나라당 대선후보들과 함께 공정 경선을 다짐하며 손을 들고 있는 강재섭 대표. |
ⓒ 오마이뉴스 이종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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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강재섭 커넥션'을 모르고 있던 이명박 캠프는 강 대표가 계속 내놓는 카드의 의미를 읽느라 고심을 거듭했다. 이 대통령은 결국 '판을 깨면 안된다'는 온건파의 의견을 받아들여 상임전국위가 열리기 전날(5월 14일) 저녁 강재섭 중재안을 수용하기로 결정했다. 박근혜 캠프는 이 대통령의 입장 표명이 나온 뒤에야 '중재안을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강 대표는 "박근혜는 내가 어떻게 할지를 훤히 알고 있었지만, 이명박은 아는 게 없으니 막판 협상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자 친이 성향의 이명규 부총장이 "그렇다. 그래서 우리도 그 당시에는 정말 섭섭했다"고 맞장구를 쳤다고 한다.
그러나 이날 오찬에 배석한 이명규 사무부총장은 23일 기자를 만나 "내가 섭섭하다고 한 것은 그런 뜻이 아니다. 경선 때 양쪽 모두 강 대표에게 섭섭해하지 않았냐"고 해명했다. 이 부총장은 "강 대표는 자기 나름대로 박 전 대표를 배려했는데, 그걸 몰라주는 심정을 얘기한 것"이라며 "경선 당시 양측 모두에게 (기자회견에 앞서) 중재안을 알려주지 않았겠냐"고 말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의 핵심 측근(18대 총선에 당선)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강 대표가 중립을 지키지 않았고, 당내 사정이 결코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다는 정황은 우리도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알고 있었다"고 전했다.
박 전 대표측 '불쾌'... "별로 해준 것도 없으면서 상처만"
경선 룰 협상에 관여했던 박근혜 캠프의 B의원도 "내가 어떤 식으로 얘기하는가에 따라 강 대표가 곤경에 처할 수도 있고, 그 반대가 될 수도 있겠다"고 하면서도 "옛날 얘기는 안 하는 게 좋겠다"고 여운을 남겼다.
또한, 강 대표는 "나를 따르는 당협위원장과 당직자들에게도 박근혜를 지지하라고 했지만 둘은 끝내 거부하더라"며 나경원 의원(당시 대변인) 등의 이름을 거론했다고 한다. 나 의원은 한나라당 경선 국면에서 '중립'으로 분류됐다.
강 대표가 뒤늦게 자리에 합류한 박근혜계 배석자들에게 "내가 정말 열심히 도와주지 않았냐"고 하자 한 배석자도 "네, 네"라고 답했다는 게 한 참석자의 전언이다.
강 대표는 친박 의원들의 대규모 탈당을 불러온 '3·13 영남대학살'과 관련해서도 "김무성·박희태 등 양 계파의 상징적 인사들을 포함시키되 17명을 공천에서 탈락시키기로 계파 간의 암묵적 합의가 있었는데, 공천심사위원장(안강민 변호사)이 8명을 더해 25명을 잘라냈다"고 말했다. 강 대표는 자신이 관여해서 공천에서 탈락된 중진의원의 이름까지 거론했다고 한다.
강 대표의 말대로라면 안강민 공심위원장이 양 계파 수뇌부의 의중을 무시하고 공천탈락자 규모를 늘렸다는 얘기인데, 이것이 안 위원장의 소신에 찬 결정인지 아니면 친이 강경파(이재오·이방호)의 입김이 작용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강 대표는 "친박연대가 출범하기 전에만 해도 한나라당 예상의석수가 160석을 웃돌 것으로 봤는데, 영남에서 친박 열풍이 분 후에는 여의도연구소에서도 150석 안팎을 얻을 것이라고 보고하더라"며 "150석 이하를 얻으면 선거패배에 따른 문책론이 나올게 분명했기 때문에 지역구 불출마 카드를 던졌다. 결국 내 생각대로 되지 않았냐?"고 반문했다.
한편, 박근혜 전 대표 측은 강 대표의 오찬 발언에 대해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박 전 대표의 핵심측근은 "강 대표는 대표직에서 물러나면 이 대통령에게 더욱 의지할 수밖에 없고, 박 전 대표와의 관계도 끝내야 할 상황"이라며 "강 대표가 우리 쪽에게 별로 해준 것도 없는데 마지막까지 박 전 대표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는 것은 너무하는 것 같다"고 섭섭함을 표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