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서의 두 종류
정책에 대한 반대가 모두 똑같은 형태로 표현되지는 않는다. 우선 얼마나 완강한지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박정희 이래의 군사정권에 대해 민주 진영에서는 30년 이상을 완강하게 반대했다. 민주화가 진전하면서는 그런 이유로 정부에 반대할 이유는 줄었지만, 현 정권 이후 다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반대가 완강해지고 있다. 김대중-노무현의 대북 협상 정책에 대해 한나라당과 우익 신문들은 10년 동안 완강하게 반대했다. 현 정권이 북한과 대화 통로를 닫으니 그런 우익의 반대는 사라졌다. 이런 것들은 완강한 반대의 예다.
이명박 서울시장의 청계천 복원 사업에 대한 반대는 잠시 나왔다가 이내 사그라들었다. 설렁탕이나 불고기로 요리된 미국산 쇠고기를 모르는 척 넘어가면서 먹는 시민 중에, 말로 물으면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한다고 답할 사람도 많을 것이다. 이런 반대는 완강하지 않은 반대에 해당한다. 용산 4구역 세입자 중에서 현재의 철거 정책에 반대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다만 85%의 반대는 상대적으로 완강하지 않았을 뿐이고, 이번 농성에 참여한 사람들은 15% 중 일부로 특히 완강하게 반대한 사람들이다.
완강한 반대는 다시 담론형과 충돌형으로 나눌 수 있다. 김대중-노무현의 대북 정책에 대한 우익 신문들의 반대는 주로 담론의 형태였던 데 비해서, 철거민들의 농성은 충돌형의 전형에 해당한다. 담론형 반대에 공권력이 발동하면 표현의 자유 침해에 해당할 것이고, 충돌형 반대를 마냥 내버려두면 문명사회의 기본 질서가 흔들릴 것처럼 보인다. 위에서 일본어 위키백과를 인용했듯이, 공권력이란 "물리력으로 집행되는 국가의 통치행위로서 복종하지 않으면 처벌"되는 것이 마땅해 보이기 때문이다.
충돌형 반대를 "마냥" 내버려둔다면 문명사회의 기본 질서가 아마도 흔들릴 확률이 대단히 높을 것이다. 하지만 충돌형 반대라고 해서 "모두", 그리고 "어떤 비용을 치르더라도" 진압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지난 20년 가까이 방사성 폐기물 처리장 입지를 둘러싸고 대한민국의 여러 곳을 순회해가면서 벌어진 충돌형 반대의 사례들이 무수히 많았지만, 공권력의 발동은 언제나 일정한 절제의 한도 안에서 이루어졌다. 심지어 이번 용산의 경우에도 총격이 가해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곧 일정한 절제가 있었음을 그대로 말해준다.
요컨대 충돌형 반대와 사회질서 사이의 관계는 흔히 착각하는 바와는 달리 결코 양자택일의 이분법적 관계가 아니라는 말이다. 양자택일이 아닌 상황을 양자택일인 것처럼 착각하게 되는 주요 원인은 "모든"과 "어떤"의 구분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감정에 휘둘려 과장하는 경향이다. 이와 같은 과장은 또한 후건긍정의 오류를 마치 건전한 추론인 것처럼 밀어붙이는 수사학에 힘입어 횡행하게 된다.
중학교 수준의 기본적인 논리학을 상기해보자. "충돌형 반대를 전혀 강제 진압하지 않는다면 사회 질서는 무너진다"고 하면 맞는 말이다. 이 명제의 대우명제는 따라서 "사회 질서가 무너지지 않으려면 충돌형 반대 중에 어떤 것은 강제 진압해야 한다"가 된다. "전혀 강제 진압하지 않는다"의 부정은 "어떤 것은 강제 진압한다"이지 "모두 강제 진압한다"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 질서가 무너지지 않으려면 모든 충돌형 반대를 강제 진압해야 한다"와 등가가 되려면 "충돌형 반대를 하나라도 강제 진압하지 않으면 사회 질서가 무너진다"고 말해야 하는데, 이는 명백히 사실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지난 60년 동안 강제 진압되지 않은 농성과 시위가 무수히 많지만 사회 질서가 무너진 경우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
▲ "공권력, 다시 말해 물리력이 불가피한 경우라고 할지라도 다시 어느 정도의 물리력이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가 항상 고려되어야 한다." 참사가 일어나기 전인 지난 20일 밤, 철거민 강제 진압을 위해 경찰 병력이 이동하고 있다. ⓒ뉴시스 |
상대적인 정도의 문제로 접근해야 할 사항을 이분법적 흑백논리에 끼워 맞춤으로써 발생하는 혼동은 강제 진압과 방치 사이에서도 대단히 흔하다. 내가 군사 무기 전문가는 아니지만, 이번에 서울경찰청이 구사한 것이 대한민국 정부가 보유한 물리력의 최대치는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실제로 최대치가 어느 정도이든지, 그 최대치로부터 완전한 방치까지의 사이에는 무한히 많은 선택의 스펙트럼이 있다. 그러므로 공권력, 다시 말해 물리력이 불가피한 경우라고 할지라도 다시 어느 정도의 물리력이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가 항상 고려되어야 한다.
용산에서 발생한 인명 피해가 법질서 확립을 위해서 불가피했다는 식의 이야기는 그러므로 누구나 받아들여야 할 말이 아니라 특별한 정치이론이 개재되어 있는 주장이다. 그렇다고 하면, 농성자들의 불법 행위 여부와 경찰의 과잉 진압 여부는 서로 별개의 문제로 봐야 한다는 주장 역시 마찬가지로 특별한 정치이론을 함축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전자의 이론은 "사회 질서를 위해서 소수의 인권은 무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후자의 이론은 "소수의 인권을 존중해야 사회 질서가 바로 선다"는 것이다. 이처럼 현재 논쟁의 초점은 질서냐 생존권이냐 사이의 양자택일이 아니라, 어떤 질서를 우리 사회가 원하느냐는 문제로 집약된다.
전자의 이론은 사회 생활을 본질적으로 제로섬의 이익 다툼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권리는 기본적으로 강자가 정하기 나름일 뿐이다. 이 시각은 1월 23일자 <조선일보> 사설 "법 질서를 못 세우는 정부는 자격 없는 정부다"에서 잘 나타난다. 이 사설은 "화염병 400개", "염산병 50개", "대형 새총", "쇠파이프" 등으로 중무장한 "망루 투쟁"을 "아프가니스탄"과 "소말리아"에 빗대어 고발했다. 그리고 "한 줌의 전문 시위꾼이 도심 복판 건물을 점거해 도로를 향해 화염병을 던지면서 1000만 시민이 사는 도시를 전쟁터나 다름없게 만드는 걸 더 방치해선 안 된다"고 정부에 촉구했다.
<조선일보>가 이런 주장을 한다는 것은 별로 새삼스럽지 않다. 흥미로운 대목은 이 사설이 동시에 "정부는 조합과 세입자 간 분쟁을 중재할 수 있는 제도와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 권리금과 인테리어 비용으로 억대의 돈을 쓴 상가 세입자에게 1000만 원, 2000만 원의 보상금만 돌아가는 재개발 방식은 고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에 있다. 물론 이는 <조선일보>도 나름대로 사태의 근본 원인에 눈길을 주고 있다는 표지로서, 특별히 놀라울 것은 없다. 주목해 볼 만한 지점은 권리금과 보상금 사이의 불균형을 이 사설이 인정하면서도 농성전을 곧 "도시 게릴라전"으로 치부한다는 사실이다.
차라리 세입자들의 입장에서 억울할 것이 전혀 없다고 보는 인식 위에서 철거민에 대한 무력 사용을 정당화한다면 논리적으로 일관적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 우익 이론의 특징은 "세입자들에게 억울할 일이 있겠지만 묵종하라"는 형태의 주장에 있다. 억울한 면이 있다고 인정한다면 곧 보상금 협상과 철거 과정에 모종의 불공정과 불의가 자행되었음을 인정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런 불공정과 불의를 감수하지 않고 대들면 혼이 나야 마땅하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농성자들은 묻는다, 뻥튀기좌판에서 호프집이나 노래방, 동태찌게, 갈빗집에 이르는 자영업자들이 왜 화염병을 들게 되었는지는 왜 따져보지 않느냐고. <조선일보> 사설이 스스로 인정하듯, "권리금과 인테리어 비용으로 억대를 쓴 상가 세입자에게 1000만 원 2000만 원의 보상금만" 준다면 억울하지 않겠는가? 억울해서 동의할 수 없다고 버티는데 자본으로 용병을 고용해서 무력으로 몰아낸다면 분노하지 않겠는가? 용역회사의 무력에 맞서고자 전철연의 무력을 고용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모금한 것을, 무슨 "3자 개입"이니 "배후 세력"이니 낙인을 찍으면 피눈물이 나지 않겠는가? 합의되지 않은 조건을 강제하기 위해 조합과 건설회사가 고용한 무력은 합법이고, 강요당하지 않기 위해 철거민들이 고용한 무력은 불법이라면 합의서에 도장을 찍는 것과 안 찍는 것이 무슨 차이인가?
쫓아내려고 밀고 들어오는 철거반원의 무력이 합법으로 용인되는데, 말로만 반대해서 무슨 소용이 있는가? 우익 신문들이 햇볕 정책에 완강하게 반대하면서도 담론형으로 그칠 수 있었던 것은 나중을 기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의견과 주장을 통해서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공격해서 자기들에게 유리한 정권을 세우고 정책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세입자들의 경우 일단 쫓겨나면 그만이지 무슨 "나중"이 있겠는가? 그들이 화염병까지 들게 된 데에는 나름대로 사연이 있다.
우익의 주장에서 독특한 성격은 이 모든 사연들을 무시해도 좋다고 본다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해 우익이 말하는 "법 질서"란 칼자루 쥔 자의 이익, 트라시마코스의 표현으로 말하면 "정의란 강자의 이익"이 된다. 억울한 일이 있어도 그저 참으면 미덕이고, 대들면 혼난다는 말이다. 이런 발상에 기초한 질서는 오직 정치 세력 간에 힘의 균형추가 일방적으로 치우칠 때에만 유지된다. 억울함을 말했다가 피눈물까지 흘려야 하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계속 목숨을 걸고 저항할 것이고, 공권력이란 그런 저항을 힘으로 억누르는 역할을 담당한다. 그렇지만 이런 사회는 머지 않아 극소수 착취 계급과 대다수 피착취 계급으로 분열되고, 혁명이 일어나는 날에는 악에 받친 복수극이 펼쳐진다. 다행히 이처럼 잔인하고 불안정한 질서가 인간사회에게 허용된 유일한 종류는 아니다.
세입자에게 억울한 면이 있다면, 다시 말해 보상과 철거의 현행 방식에 불의가 있다면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 이것은 <조선일보>도 인정한다. 그런데 그 불의를 사회에 알려서 <조선일보>까지도 제도 개선의 필요성을 수긍하게 만든 사람들을 단지 화염병을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해야 하는가? 조용히 있지 않고 떠들어서 기어이 제도를 개선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어서 괘씸하다는 소리가 아니면 무엇인가? 강도를 피해 옆집 창문을 부수고 들어가 도움을 청한 사람에게 "도시 테러"라고 처벌하면서, 도둑은 잡지도 않고 "도둑을 방지할 제도를 만들자"고 떠드는 셈이 아닌가?
사람을 죽여도 정당방위라면 범죄가 아니다. 선행한 폭력과 불의에 의해 도발된 폭력이라면, 설령 실정법에 따라서 처벌을 해야 하더라도 정상을 참작해서 형벌을 감경해야 이치에 맞는다. 화염병 투척은 분명 그자체로 정당화될 수 없는 폭력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경우 어느 정도까지가 도발된 폭력이고 어디서부터는 자발적 폭력인지를 분별하지 않고, 무조건 마녀사냥하듯 화염병만을 매도해서는 원한과 증오밖에 남을 것이 없다.
진상 규명이 먼저라는 말은 지당하다. 그러나 저들 편의 진상과 우리 편의 진상을 구분해서 우리 편의 진상을 규명하겠다는 배짱은 인류의 이성과 언어에 대한 모욕이다. 진압 과정에서 불의의 사고가 나서 6명이 불에 타 숨졌다면, 추정된 시나리오를 흘리기 전에 확정할 수 있는 사실들을 묵묵히 찾아나가야 수사기관의 공신력이 생긴다. 진상에 근거한 세밀한 분별에 따라서만 정의가 실현될 수 있고, 그렇게 정의가 실현되는 곳에서만 정치 세력 간에 힘의 균형이 팽팽하더라도 무력 투쟁이 아닌 질서가 형성될 수 있다. 수사기관이 추정을 사실로 우기고, 반론과 의혹은 뭉개기에 급급하다면 질서는 발가벗은 무력에만 의존하게 되고, 따라서 사회생활은 끊임없는 힘겨루기 때문에 박살이 나고 말 것이다.
기축년 정초는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선택을 요구한다. 이것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의 선출보다 중요하고 본질적인 선택이다. 이런 선택의 계기는 4~5년 주기를 정해두고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느닷없이 기약없이 찾아온다. 그래서 한 번 잘못 선택하면, 아니면 잠시 나른하게 피워본 게으름만으로도, 천추의 후회를 낳을지도 모른다.
권력과 무관한 이치나 정의 따위는 아예 없다고 포기하고 사회의 기본 질서를 오로지 우월한 무력에서 구할 것인가? 아니면 진실에 입각해서 권리와 의무를 세밀하게 배분함으로써 사회 평화를 강구할 것인가? 공권력이라는 것을 강한 계급이 약한 계급을 청소하는 맹목적인 하수인으로 정의할 것인지, 아니면 계급 구분을 초월한 지평에서 오로지 이치와 사실의 균형추에 따라서 잘못에 비례한 만큼만 강제하는 스마트 파워로 정의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우리가 지금 어떤 사회에서 살고 있는지, 우리가 지금 어떤 사회에서 살고 싶은지, 그리고 후손에게 어떤 종류의 사회 질서를 물려주고 싶은지를 진지하면서도 단호하게 선택해야 한다.
/박동천 전북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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