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여권 핵심부가 사정기관들을 통해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자금 의혹과 관련해 다시 확인 작업에 나선 사실이 포착됐다. 사진은 2007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김대중 전 대통령 내외를 청와대로 초청한 모습. |
2009년 DJ와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올스톱’됐던 전직 대통령들 비자금 내사가 ‘재개’되자 야권이 긴장하는 기류가 감지되고 있다. 그 ‘불똥’이 자칫 야권 인사들에게 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집권 후반기에 접어든 이명박 정권이 DJ와 노 전 대통령을 향해 다시 사정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배경을 따라가 봤다.
정권이 바뀐 후 국세청 검찰 경찰 국정원 등 사정기관들이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업무 중 하나가 바로 지난 정부의 비리를 파헤치는 것이었다. DJ와 노 전 대통령 재임 기간을 ‘잃어버린 10년’으로 폄하했던 집권 여당 분위기와 정권 교체 시에 이뤄지는 사정기관 내부 ‘물갈이’가 맞물려 그 강도가 ‘유난히 셌다’는 평가다. 당시 한 사정기관의 고위 인사는 “마치 충성심 테스트라도 하듯 각 기관들끼리 경쟁적으로 자료들을 모으고 있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시절에 의혹이 제기됐던 사안들을 꼼꼼히 체크했고, 공개하면 파장이 클 것으로 보이는 파일들만 골라 정리해 윗선에 보고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청와대를 비롯한 여권 핵심부는 DJ와 노 전 대통령 본인은 물론, 최측근, 친인척들이 연루된 자료들에 많은 관심을 보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사정기관들은 수집한 ‘첩보’들에 대해 검증에 나섰다. M&A를 통해 급성장한 몇몇 호남기업들이 구여권 정치인들에게 리베이트를 줬다는 의혹이 불거졌고, 무기사업을 통한 해외 비자금 은닉 가능성이 제기됐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검찰 및 국정원 등은 해외에 체류하고 있는 지난 정권 인사들을 접촉하기도 했다.
또한 대통령 및 실세들과 친분이 두터웠던 기업인들도 ‘타깃’이 됐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를 촉발시켰던 ‘박연차 게이트’ 역시 이러한 과정의 한 부분이었다. 동시다발적이고 광범위했던 당시의 사정에 대해 대검 중수부의 한 관계자는 “비리 내용은 사정기관마다 다를 수 있었겠지만 최종 목표는 같지 않았겠느냐. 바로 VIP(대통령)를 잡는 것”이라면서 “이 때문에 최측근들이 받은 돈이 어디로 흘러들어갔는지를 밝혀내는 데에 수사력을 모았다”고 귀띔했다.
이러한 사정기관 움직임은 지난 2009년 여름 노 전 대통령과 DJ가 연이어 서거하면서 ‘제동’이 걸렸다. 노 전 대통령을 소환하고 DJ의 최측근을 접촉해 ‘결정적 증거’를 확보하는 등 상당한 성과를 올리자 큰 기대를 걸고 있던 여권 핵심부는 당시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대선캠프 출신의 한 여권 고위 관료는 “우리가 일일이 사정을 지시하지는 않았다”면서도 “다만 진보세력의 ‘도덕성’을 무너트리면 현 정권에게 이득이 될 것이란 생각은 했다. 군사정권과 싸웠던 전직 대통령들의 비자금 조성이 사실로 드러나면 국민들의 실망도 더욱 컸을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사정기관들이 모았던 방대한 파일들은 캐비닛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고 정치권에서도 노 전 대통령과 DJ의 비자금 문제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특히 ‘박연차 게이트’를 수사했던 대검 중수부는 ‘무리한 수사’라는 거센 비난을 받고 1년여 동안 휴업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지난해 하반기 들어 분위기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사정기관들이 수집했던 노 전 대통령과 DJ 관련 파일들을 다시 꺼내들었던 것이다. 정권 초와 비슷하게 새로운 첩보 수집에도 공을 들였다고 한다. 검찰이 노 전 대통령 후견인으로 알려진 문병욱 전 라미드그룹 회장(<일요신문> 967호)과 제2금융권으로부터 돈을 받은 혐의로 동교동계 K 의원에 대해 내사를 벌인 것(<일요신문> 970호)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듯하다.
경찰청의 한 정보담당 관계자는 “지난 정권과 관련된 X파일들 중 상당수가 접근하기조차 쉽지 않았다. 썩히기엔 아깝다는 내부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그런데 지난해 10월경부터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다. 일부 언론도 그 자료들을 입수하고 취재에 들어간 것으로 알고 있다”고 털어놨다. 복수의 사정기관 관계자들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니만큼 최대한 신중하게 ‘팩트’를 확인할 것”이라면서도 “자료는 충분하다.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자신했다.
DJ의 경우 현재 해외 비자금 부분이 사정기관들에 의해 ‘스크린’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와 관련, DJ 비자금의 ‘키’를 쥐고 있는 재미교포 무기중개상 조풍언 씨 ‘역할’이 주목받고 있다. 대우그룹 구명로비와 주가조작 의혹을 받았던 조 씨는 미국에 체류하다 지난 2008년 3월 귀국해 검찰 조사를 받았다. 조 씨는 일부 혐의에 대해선 유죄를 받았지만 핵심이던 대우그룹 로비 부분은 무죄를 선고받고 올해 초 미국으로 돌아간 것이 확인됐다.
그동안 법조계와 정치권에선 기소중지 상태이던 조 씨의 갑작스런 귀국에 대해 의구심을 제기해왔다. 평소 이명박 대통령과의 친분(고려대 경영학과 2년 선배)을 과시했던 조 씨가 현 정권과의 ‘교감’하에 한국으로 들어왔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었다. 결국 3년여간의 검찰 조사와 법정 공방 끝에 조 씨가 미국으로 돌아가자 이러한 소문은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다.
검찰 안팎에선 조 씨와 이명박 정부가 ‘딜’을 했을 것이란 추측이 확산되고 있다. 건강이 악화된 것으로 알려진 조 씨가 DJ 정권 시절 의혹을 풀 ‘단서’를 제공하는 대신 미국행을 보장받았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중수부 관계자 역시 “조 씨는 DJ 비자금 조성에 깊숙이 관여했던 인물이다. 조 씨가 협조만 한다면 판도라 상자는 열릴 것”이라면서 “조 씨가 한국에 머무르는 동안 의미 있는 진술들을 제법 많이 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검찰은 2009년 조 씨 증언을 바탕으로 국민의 정부 때 요직을 지낸 현역 의원을 내사한 바 있다. 조 씨가 검찰에 준 ‘선물’이 무엇인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검찰 관계자들에 따르면 DJ 비자금과 관련된 ‘힌트’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밖에 검찰이 계획 중인 지난 정권 대형 M&A 수사와 국세청이 지난해 11월부터 역점을 두고 있는 역외탈세 조사 역시 DJ 비자금과 무관하지 않다는 관측이다.
사정기관들은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체크도 강화하고 있다. 특히 노 대통령 부인 권양숙 여사와 자녀들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얼마 전 사정기관 관계자들이 권 여사가 관여한 의혹을 받고 있는 한 중소기업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미국을 방문했다는 얘기도 있다. 노 전 대통령 측이 참여정부 시절 차명으로 무역중개업을 하는 회사를 설립해 이권을 몰아줘 막대한 차익을 남긴 정황이 포착됐다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미국 방문은 “이 회사 계좌가 미국에 개설됐고 관련자들이 머물고 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권 여사가 이 계좌에 남아 있는 돈으로 재기를 노리는 친노 측 ‘실탄 창구’를 하고 있다는 소문도 나오고 있다. 또한 노 전 대통령 친인척이 지난 2004년과 2005년 사이 한 중견업체의 골프장 인수를 도와주는 대신 거액을 받은 혐의도 드러났는데, 사정기관들은 이 돈의 흐름에 대해서도 주시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처럼 사정기관들이 DJ와 노 전 대통령을 다시 ‘타깃’으로 삼자 야권은 그 의도가 불순하다며 강한 불만을 쏟아내고 있다. 민주당의 한 중진 의원은 “잠잠하다 싶더니 또 야권인사 길들이기를 하고 있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친노 측과 민주당 인사들을 압박하기 위한 것 아니겠느냐. 눈엣가시인 박지원 원내대표를 겨냥하고 있다는 말도 있다”면서 “정권 초에 그렇게 털어도 별 성과를 내지 못했는데 이제 와서 달라질 것은 없다. 결국 ‘역풍’을 맞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대해 청와대 민정라인의 한 관계자는 “전직 대통령 비자금 문제를 기획해서 다루진 않는다. 다만 비리가 있다면 수사를 할 수는 있는 것 아니냐. 또 그것이 국민으로부터 세금을 받는 사정기관의 임무다. 평상시의 활동을 놓고 야권이 비난하는 것은 월권”이라고 응수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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