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뭐래도 60년대는 비틀즈의 것이었지. 누가 뭐래도. 다른 뮤지션들도 많았지만, 그들은 그저 자신의 영역 에서만 최고였지만, 전 세계를 아우르고 다니면서, 음악계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던 밴드는 비틀즈 뿐이었어. 사람들은 독주하는 비틀즈를 향해 고함을 지르면서 환호해 주었지만, 지겨울 정도로 독주하는 비틀즈 쪽으로 쏠리는 음반시장을 우려하기도 했지.
그래서
비틀즈 VS 롤링 스톤스
1.비틀즈
Please please me
1950년대의 영국이 로큰롤에 주는 사랑은 엄청났어. (영국 뿐만 아니라, 전 유럽) 영국의 노동자계층은 매일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로큰롤에 열광했고, 거칠고 반항적인 이미지가 자기들을 대변해 준다고 생각했고, 기존의 재즈적인 음악은 상류사회층과 맞다고 생각했지.
비틀즈도 이런 시기에 활동을 시작해. 존 레런이 쿼리맨이라는 밴드를 55년도에 만들고, 58년도에 조지 해리슨을 영입해고 피트 베이스와 스튜어트 셔틀 클리프,그리고, 동네에서 만난 기타 좀 잘 치는 폴 매카트니를 만나. 실버 비틀즈를 만들어. 실버 비틀즈는 유럽 원정을 다니며 연주할 만큼, 실력이 뛰어났지, 유럽을 돌면서 연주를 하다가, 그래도 고향이 좋다고, 62년 부터 영국으로 돌아 와 리버풀의 캐번 클럽에서 연주하게 돼. 매일 밤, 수 십 차례.
2. 롤링 스톤스
Not fade away
비틀즈와는 달리 롤링 스톤스는 런던 출신의 아주 교양있는 가정에서 태어나고, 그냥 취미로만 음악하다가, 음악에 미친, 그런 형들이 모여 만든 밴드이지.
60년대 초반에 믹 재거, 키스 리처지, 브라이언 존슨, 빌 와이먼이 모여 결성 되어, 크로대디 클럽이라는 곳에서 연주하기 시작해. 그 연주를 보고, 레코드 계약사는아 너와 나는 운명 계약 하자, 그리고 레코드사와 계약을 맺고, 마이너에서 메이저로 뛰어 들게 돼.
(비틀즈가 플리즈 플리즈 미로 미국 시장을 활짝 연 뒤, 연주 잘 하는 친구가 있다고? 라면서 롤링 스톤스를 만나러 크로대디 클럽에 와. 그리고 롤링 스톤스와 비틀즈는 운명적인 만남을 가지게 되지.)
그러나 메이저로 뛰어 드는 게 쉽지가 않았어, 밴드가 그랬듯이, 찰리 와츠라는 멤버가 들어왔고, 존슨이 나가고, 믹 테일러가 나가서 론 우드가 들어 왔고, 그렇게 멤버구성에 차질을 빚다가, 결국, 현재 멤버, 믹 재거, 키스 리차드, 론 우드, 찰리 워츠.가 된 거지. ( 누가 누군지. )
3. I want to hold your hand
캐번 클럽에서 매일 밤 연주를 하고, 게다가 아무리 수준 높은 연주를 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뿐이었지. 매일 밤 연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내 음악 알아 줄 사람 어디 없나, 내 음악 누가 알려 줄 사람 없나 하고 고민 하고 있을 때,
그 손을 잡아 주고, 날개를 달아 줄 사람을 만나게 돼. 브라이언 옙스타인, 큰 레코드 가게를 리버풀에서 운영하면서, 매일 나오는 내 고장 전문 음악지 에서 나오는 비틀즈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느끼면서, 비틀즈 공연을 보러 다니면서, 비틀즈만의 매력을 찾게 되었지.
너 나랑 하자. 6대4. 케번 클럽으로 찾아가 비틀즈와 매니저 계약을 맺어. 옙스타인은 일단 레코딩 계약을 맺으러 비틀즈의 데모 테입을 들고 여러 회사를 찾아가지만, 매번 거절 당했지. 그러나, 그 지극정성을 아는지,마지막으로 EMI 와 합의 레코딩 계약을 맺게 되는데, 여기서 비틀즈는 또 한 명의 날개를 달아 줄 사람을 만나게 돼. 조지 마틴 프로듀서. 조지 마틴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원년 멤버 피트 베이스 대신, 링고 스타를 영입완전체 비틀즈를 만든 것이지.
최강 매니저와 최강 프로듀서를 오른쪽 왼쪽에 달고, 비틀즈는 나오는 노래마다 영국 싱글 차트 1위를 차지하지. 그러나, 옙스타인의 야망은 대단했어,
미국에도 가 보자, 거기서도 성공해보자, 전 세계를 장악 해 보자.
그리고 미국에서도 그의 비지니스 능력은 대단 한것이어서, 미국 시장의 이모저모를 조사하고 유행에 맞게 비틀즈를 변화 시켜. 게다가 에드 셜리반 쇼에 비틀즈를 출연 시키면서, 본격적인 미국 공략에 나서게 돼. 결국 그 효과로, (물론 곡이 좋았겠지만,)넘버 원 곡이 나오게 되었어. 그 후로 미국에서, 아니 전 세계적으로, 비틀즈는 미친 듯이 급부상 하게 돼. 짧게 자른 단정한 앞머리, 깔끔한 슈트, 언제나 겸손한 어투, 까지 지금이로 말하자면 엄친아 였던 거지. 비틀 매니아. 신조어까지 만들어졌지. 60년 대에만 넘버 원 싱글 히트곡이 18곡 ( 70년 대 까지 치면 20곡, 종전 기록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18곡 )20장 앨범 가운데 16장이 앨범 차트 넘버 원. 그리고 아주 신기한 빌보드 챠트도 만나게 되지.
1964년 4월 4일 빌보드 차트
1. Can't by me love
2. Twist and shout
3. She love you
4. I want to hold your hand
5. Please please me
비틀즈에게는 영광의 순간이겠지만, 빌보드 1위를 하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에겐, 마치 악몽과도 같은 순간.
마치 넘버 원 곡 만들기가 뭐가 어렵다고
4. Satisfation
롤링 스톤스에게도 유명한 매니저가 있었어.앤드류 루그 올드햄. 당시 롤링 스톤스는 버디 홀리 곡을 리메이크한 Not fade away 로 영국차트 3위에
오르면서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었지. 아이러니하게도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가 써 준,I wanna be your man 으로 한 몫 잡았고, 그 기세를 몰았지. 1위 한번도 못 한 밴드가 난리를 치자, 영국인들은 비틀즈와 비교를 하게 돼
그러다가, 앤드류는 아 그렇다면!! 비틀즈와 상반되는 이미지를 만들어 것다 같다 붙이지. 더부룩 머리, 청바지에 아무렇게 입은 옷, 껄렁함, 거칠고 투박함. 게다가 주로 흑인음악을 많이 연주하게 했어. 그리고, 무대포로 너희들은 할 수 있어 라면서 히트곡 하나 없이 무작정 미국공연을 잡아 버리지. 미국공연장에 들언 관객들은 당연히/ 어라 이거 뭐지 라면서 관객들은 반응을 하긴 했지만,
이미 비틀즈의 것이 되버린 미국은 롤링 스톤스를 겨우 그냥 그런 존재로 생각하게 돼. (왜냐하면, 아또..이야기가 세는데, 애니멀즈 Houes of rising 부른 밴드가, 롤링 스톤스보다더 많은 인기를 얻었기 때문이야.)
롤링 스톤스가 아, 우린 비틀즈 때문에 안 되겠어 라고 포기했다면 그냥 그런 밴드로 남았겠지만, 각성하기 시작했지, 왜냐, 어찌 보면 활동했던 곡들이 전부 선배들이 불렀던 곡을 리메이크 한 곡이었거든, ( 애니멀즈가 해 뜨는 집 이후로 또 1위를 했거든, 그래서 더 각성 했나봐. )그렇게 자작곡을 만들어야만 해 라는 원초적인 고민에 고민하다가 드디어 키스 리처드가 한방 해내지.
5.대망의 빌보드 차트 1위곡
비틀즈 초기의 음악은 대부분 따라 부르기 쉬운 멜로디와 가사, 그리고 짧은 시간으로 대중들에게 널리 어필되었지만, 꼭 그랬던 것만은 아니지, 그랬으면 전설로 남지 않았겠지.
그러나 66년 후부터 발매한 음반들은 스튜디오 안에서 녹음하는 동안, 많은 장비로 새로운 사운드를 만들고, 가사도 철학적이고, 사회바판적인 곡들을 많이 썼지. 후반기 작품들은 더 했지, 1년에 3장씩 내던 앨범들 숫자도 줄어 들고, 더 명상적이고, 강한 사운드가 들어가고, 클랙식과 포크를 결합 시키고, 그러다가 여튼 최고의 앨범을 발표하지.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1967)
6.그러나 악동 역활을 자처했던, 나는 비틀즈와 다르다. 그래서 성공한 롱링 스톤스는 더 악동적이고 더 선정적이고 퇴폐적으로 변했는데, 이때가 완전 전성기였지. 비틀즈를 잠 재워 줄 밴드다 라는 소리와 아니다 이제 비틀즈를 넘어 섰다. 아니다 롤링 스톤스를 재조명 해야 한다 라는 소리가 평론가들
사이와 음악 팬들 사이에 나오게 되지.분명 이 시기에 롤링 스톤스는 그 기괴한 무너대너 대신 음악성으로 인정 받기 시작하는 거지. 뭐 여튼 이 최고의 앨범 때문이었겠지만,
7. Aftermath (1966)
8. 비틀즈와 롤링 스톤스에게는 참으로 이상한 공연이 있었어.
애플 옥상 Get back
조용하던 점심시간, 웅장한 기타소리와 함께 비틀즈의 노래가 도심에 퍼지자 사람들은 미친 듯이 몰려 나오지.
참으로 수상한 공연이었겠지만, 시민들에게 아마 즐거운 볼꺼리가 아니었나 싶어 그리고 70년 4월 공식해체를 선언하지, 엡스타인은 죽고, 음악 대신 손 댄 사업은 할 수록 무너지고, 음악성도 달라지고, 오노 요코도 그렇고, 앨런 클라인 이라는 새로운 매니저도 그랬고, 여튼 문제가 아주 많았던 시절. 어쨌든 마지막 콘서트가 되어 버렸지. 그리고 그들은 돌아 오지 않았어.
9. 앨터몬트 고속도로 Under my thumb
* 노약자, 임신하신 분, 무서운 거 못 보시는 분, 보지 말 것,
1969년 롤링 스톤스는 미국 순회 공연 마지막으로 앨터몬트 고속도로에서 무료 공연을 하는데, 롤링 스톤스 경호원이 흥분한 흑인 관람객을 칼로 찔러 죽이는 사고가 터져. 이로 인해 모든 공연은 취소되고, 미국에서 추방 당하게 돼.
10. 비틀즈에게는 최고의 공연이 되었고, 롤링 스톤스에게는 최악의 공연이 되었던, 참으로 이상했던 공연. 그러나 비틀즈 최고의 공연은 비틀즈의 해체를 암시 헀고 롤링 스톤스 최악의 공연은 롤링 스톤스가 더 강해질 것이란 걸 암시한, 참으로 이상했던 <무료> 공연. 참으로 무료하지 않지.
11. 비틀즈는 10년만에 해체 되었지만, 폴은 여전히 비틀즈 시절 노래를 레파토리로 공연을 다니고. 존의 노래에 대한 음악성은 여전히 회자 되고, 재해석 되고 있으며, 조용한 비틀즈라고 불리던, 조지는 갠지스 강 아래를 조용히 흘러 다닐 것이고, 링고는. 음, 음악 활동 하고 있겠지. 짧은 밴드 기간이었겠지만, 여전히 그들은,
길고도 험한 길을 걷는 우리 앞에 서있고,
그것도 영원히 감동과 아름다움으로,
12. 44년간을 악동적이고 퇴페적이고 선동적이 이미지로 활동했지만, 시니컬하고, 말 할 거 하고 때릴 만한 것을 때리는, 위협적인 그들이었어도, 그래도 마음 한 구석은 따뜻할 거야.
비 온 뒤, 아름다운 무지개처럼.
13. 사실 비틀즈와 롤링 스톤스는 라이벌이 아니지. 어찌 보면 동지이자 파트너이자, 선의의 경쟁자였지. 오히려 비틀즈와 비치 보이스가 라이벌 아니겠어?
영국을 대표하는 밴드로, 전 세계에 자국의 음악력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겠지만, 결국 팬들과 평론가들이 두 밴드를 라이벌로 만들었던 거 같아.
하지만, 어찌보면 철저히 달랐던 건 맞는 거 같아. 태어난 환경에서부터 외모, 전성기, 짧은 밴드기간과 긴 밴드 기간, 음악성 모두. 그러나, 두 밴드의 음악만은 대단 했었고, 대단 했고, 앞으로도 대단 할 것 같아. 이런 밴드와 동시대에 살았던 것만으로도, 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어쩌면 행복하다 라고 느껴야 할 것 같아.
14.롤링 스톤스가 해체 할 것으로 보인다 라는 기사를 읽고, 마음이 울쩍해졌어. 영원한 것은 없구나 라면서.
15.
VS
자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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