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중국의 행태를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 가운데 조선과 중국 명청 왕조의 관계까지 걸고 넘어지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의 국제 정세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판단이 있겠지만 지나간 역사에 대해서는 좀 정확한 얘기들을 하기 바란다.
나는 조선을 무턱대고 중국의 속국인 것처럼 폄하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일제가 심어놓은 식민사관의 포로들임을 지적하고자 한다.
일제는 자신들의 침략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마치 조선을 중국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처럼 주장했다. 민족의 역량이 늘어나는 것과 전혀 무관하게 대한제국만 선포한 것이 우리 역사에서 무슨 큰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전에 고종이 스스로의 호칭을 ‘대군주 폐하’라고 바꾼 것 또한 일제가 벌인 호들갑을 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결론적으로 조선 역사에서 중국이 조선의 속국이었던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어떤 사람들은 중국임금인 ‘황제’가 조선임금인 ‘왕’을 책봉했다 해서 조선이 속국이라고 여기기도 한다. 조선왕이 중국 황제의 제후라 생각하는 것이다.
잘못된 역사인식이다. 일제가 악의적으로 심어놓은 그릇된 사고 방식이 여태까지 널리 퍼져 있는 것이다.
속국이냐 아니냐를 가리는 가장 확실한 기준은 중국 임금이 원하는 때 언제든지 조선 임금을 폐할 수 있었느냐 여부다.
우리 역사에서 임금이 중국에 의해서 폐위된 것은 단 한번, 고려 충혜왕이 원나라로 압송된 것 뿐이다. 물론, 원나라 침략기의 고려 만큼은 여러 모로 속국에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충’자로 시작해서 ‘왕’자로 끝나는 이 시기의 임금들은 사실상 국정을 원나라 세력에 떠맡기다 시피한데다 일부는 고려보다 원나라 심양에 가서 머물기를 좋아하기도 했다. 왕마다 원나라에 가서 장가드는 것을 백성들은 민망하게 여겼지만, 당사자들은 외갓집 가는 길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조선에 들어와서는, 설령 중국 황제가 조선 국왕을 몹시 싫어하더라도 폐위시키는 일은 꿈도 꿀 수 없었다. 혹자는 광해군 즉위에 대해 명나라가 간섭한 사실을 지적한다. 이 또한 오직 간섭이나 외교적 압력이었을 뿐, 명나라가 광해군을 어쩔 수 있는 형편은 절대 아니었다.
다만, 광해군 즉위 초는 임진왜란 직후의 특수사정이 존재했다. 조선에 대한 명나라의 발언권이 유례없이 높아져 있는 시기였다.
임진왜란 때 파병을 한 명나라 신종에게 중국사관들은 ‘조선 황제’라는 별명을 붙였다. 조선에 대한 군사지원은 엄청났지만 정작 명나라 정치를 엉망으로 만들어 후대에 가서 만주족에게 대륙을 내준 빌미를 만든 인물이기 때문이다.
어떻든 그 정도로 명나라 신종의 신망은 중국보다 조선에서 더욱 드높았다. 병자호란으로 조명관계는 끊어지고 청나라와 조공관계를 맺은 후에도 상당수 조선 사대부들은 자신의 묘비에 명나라 신종의 연호를 썼을 정도다. 이것은 청나라 측에서 언제든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일이었다.
명나라가 유일하게 자신의 존재감이 드러나는 조명관계에서 무리하게 공자의 법도를 들고 나온 것이 광해군 즉위에 대한 간섭이다. 그 결과는 오히려 조명 동맹관계의 약화를 초래했을 뿐이지 광해군의 위상을 직접 흔들지는 못했다.
명나라 초기 공녀들의 중국행을 꼬투리 잡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확실히 고려로부터 이어져 온 중화 국가와의 외교관계에서 크게 벗어난 사례다. 하지만 이는 원나라 침략기의 관행이 명 초기까지 이어졌을 뿐이다. 조선과 명의 관계가 전통의 한중관계로 복귀하면서 이는 점차 사라졌다.
병자호란 직후 청에게 바친 가혹한 세폐를 거론하는 사람도 있다. 이 때는 조선과 청이 두 차례나 전쟁을 치른 후다. 통상의 한중 관계가 아니라 승전국과 패전국의 관계다. 명과의 결전을 앞둔 청이 배후에 있는 조선의 저항을 근원제거하기 위해 세폐는 더욱 가혹했다. 그러나 청이 대륙의 새 주인으로 위상을 굳히고 전쟁을 벌일 일이 없어지면서 두 나라간의 조공 무역은 전통적인 형태로 환원됐다.
조선의 천주교도 박해 때, 서양국가들이 이를 청나라에 대해 항의했지만, 청나라 황실은 “조선은 별도의 국가로서 우리가 간섭할 수 없다”고 밝히는 당시 문서도 있다고 한다.
군사적으로나 실질 주권적으로 명실상부한 독립국가인데 그럼 왜 기분 나쁘게 황제 밑의 왕 노릇을 자처했을까. 거기에는 동아시아 국가들간의 이념적 유대관계가 존재한다.
조선과 명, 청은 유교 이념을 공유한 동맹국가다. 당시의 공맹사상은 오늘날의 민주주의와 마찬가지다. 이 체제에서 중국의 황제는 단순히 옆에 있는 큰 나라의 국가원수일 뿐만 아니라 공자에게 가장 큰 제사를 올리는 교황의 지위를 겸했다.
중국 황제들이 현명했던 것은 아무리 큰 나라라도 온 천하를 상대로 싸워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는 것이다. 주변 수많은 민족 가운데 하나라도 공격을 하면 천하의 민심이 불안해지고 천자 자신이 위태로워진다는 이치를 알고 있었다. 중국 황제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도 200년 주기로 반복되는 이민족들의 침략이었다.
조공무역이란 이런 현실에서 생겨난 외교 해법이다. 천자는 세상 모든 나라들의 고유한 경계와 풍속을 존중하는 대신 주변 국가들은 중원을 넘보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것이다.
병자호란 때 그토록 혹독한 고생을 하고도 북벌을 하자고 나섰던 조선이다. 북벌이 실행되지 못한 건 청나라가 갈수록 강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청나라가 예전 몽고와는 달랐음을 확인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원의 쿠빌라이는 공자묘에 화살을 날렸지만 청나라 황제는 이 곳에 가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렸다. 자금성 주인의 출생지와 헤어스타일만 달라졌을 뿐이지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은 변한 것이 없었다. 죽기를 각오하고 만주까지 쳐들어가야 할 이유가 사라졌던 거다.
오늘날 한미동맹이 굳건하다고 하는데 아직 1950년 이후 60년에 불과하다. 고려가 송나라와 통교한 이후 조선-청까지 한민족과 중국 왕조는 800년이 넘는 종교적 군사적 동맹관계를 지켰다.
이 동맹관계에서는 다른 나라 군대를 도성에 상주시키는 일도 없었고 작은 나라의 시장이 큰 나라에 종속되는 일도 없었다. 오늘날 국제관계와 비교하면 이상형에 가까운 구석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교문서 한 구석에 있는 “신(臣)”자 몇 개를 가지고 속국이었다고 스스로의 역사적 자부심을 짓밟는 사람들이 있다.
얼마 전 영화 속에 어처구니 없는 장면이 있었다.
중국 사신이 칙서를 우렁차게 읽어대는데 조선 임금이 무수한 신하와 함께 근정전 뜰에 엎드려 있는 것이었다. 만약 이런 일이 실제로 있었다면 아마 조선의 담당 외교관들은 바로 약사발을 들어야 했을 것이다.
섣부르게 들은 사실을 함부로 영상으로 만들어내는 폐해다. 통상적으로 중국의 사신이 황제의 대행으로 온다 해도 그가 노란 색 옷을 입고 황제를 대신해 조선 국왕의 예를 받는 것은 정전 안에서 극히 제한적으로 이뤄진다. 이 절차가 끝나면 칙사 또한 본연으로 돌아가 조선 국왕 앞에서 자신을 “외신(外臣)”이라 칭하며 낮추는 것이다.
혈통이 다른 두 민족이 점차 커져서 국경을 접하게 되면 충돌이 불가피하다. 한민족과 중국인들은 활동영역이 확대되면서 고구려와 수, 당의 전쟁기를 거쳤다. 그러다가 두 민족이 모두 북방 기마민족의 공격을 받았다.
전통적인 한-중 국가관계가 형성된 것은 11세기 고려 문종이 송과의 국교 수립에 나서면서다. 이 때 고려와 송나라 사이에는 강성한 거란 족의 요나라가 천자국 노릇을 하며 버티고 있었다. 요나라는 고려와 송의 교류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래도 문종은 송과의 수교를 밀어붙였다.
이게 바로 한중 관계의 원형이다. 만약 한중 관계가 군사적 압력에 의한 속국 관계라면 무시무시한 거란의 압력을 받아가면서까지 송나라와 교류에 나설 이유가 있었겠는가.
오늘날 자기 정치세력의 입장이 섞여서 그러는지는 모르지만 함부로 우리 조상들이 슬기롭게 이웃나라 사람들과 만들어낸 공존의 모델을 함부로 폄하하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 그것은 민족혼을 더럽히는 일이다.
장경순/칼럼니스트
나는 조선을 무턱대고 중국의 속국인 것처럼 폄하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일제가 심어놓은 식민사관의 포로들임을 지적하고자 한다.
일제는 자신들의 침략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마치 조선을 중국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처럼 주장했다. 민족의 역량이 늘어나는 것과 전혀 무관하게 대한제국만 선포한 것이 우리 역사에서 무슨 큰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전에 고종이 스스로의 호칭을 ‘대군주 폐하’라고 바꾼 것 또한 일제가 벌인 호들갑을 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결론적으로 조선 역사에서 중국이 조선의 속국이었던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어떤 사람들은 중국임금인 ‘황제’가 조선임금인 ‘왕’을 책봉했다 해서 조선이 속국이라고 여기기도 한다. 조선왕이 중국 황제의 제후라 생각하는 것이다.
잘못된 역사인식이다. 일제가 악의적으로 심어놓은 그릇된 사고 방식이 여태까지 널리 퍼져 있는 것이다.
속국이냐 아니냐를 가리는 가장 확실한 기준은 중국 임금이 원하는 때 언제든지 조선 임금을 폐할 수 있었느냐 여부다.
우리 역사에서 임금이 중국에 의해서 폐위된 것은 단 한번, 고려 충혜왕이 원나라로 압송된 것 뿐이다. 물론, 원나라 침략기의 고려 만큼은 여러 모로 속국에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충’자로 시작해서 ‘왕’자로 끝나는 이 시기의 임금들은 사실상 국정을 원나라 세력에 떠맡기다 시피한데다 일부는 고려보다 원나라 심양에 가서 머물기를 좋아하기도 했다. 왕마다 원나라에 가서 장가드는 것을 백성들은 민망하게 여겼지만, 당사자들은 외갓집 가는 길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조선에 들어와서는, 설령 중국 황제가 조선 국왕을 몹시 싫어하더라도 폐위시키는 일은 꿈도 꿀 수 없었다. 혹자는 광해군 즉위에 대해 명나라가 간섭한 사실을 지적한다. 이 또한 오직 간섭이나 외교적 압력이었을 뿐, 명나라가 광해군을 어쩔 수 있는 형편은 절대 아니었다.
다만, 광해군 즉위 초는 임진왜란 직후의 특수사정이 존재했다. 조선에 대한 명나라의 발언권이 유례없이 높아져 있는 시기였다.
임진왜란 때 파병을 한 명나라 신종에게 중국사관들은 ‘조선 황제’라는 별명을 붙였다. 조선에 대한 군사지원은 엄청났지만 정작 명나라 정치를 엉망으로 만들어 후대에 가서 만주족에게 대륙을 내준 빌미를 만든 인물이기 때문이다.
어떻든 그 정도로 명나라 신종의 신망은 중국보다 조선에서 더욱 드높았다. 병자호란으로 조명관계는 끊어지고 청나라와 조공관계를 맺은 후에도 상당수 조선 사대부들은 자신의 묘비에 명나라 신종의 연호를 썼을 정도다. 이것은 청나라 측에서 언제든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일이었다.
명나라가 유일하게 자신의 존재감이 드러나는 조명관계에서 무리하게 공자의 법도를 들고 나온 것이 광해군 즉위에 대한 간섭이다. 그 결과는 오히려 조명 동맹관계의 약화를 초래했을 뿐이지 광해군의 위상을 직접 흔들지는 못했다.
명나라 초기 공녀들의 중국행을 꼬투리 잡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확실히 고려로부터 이어져 온 중화 국가와의 외교관계에서 크게 벗어난 사례다. 하지만 이는 원나라 침략기의 관행이 명 초기까지 이어졌을 뿐이다. 조선과 명의 관계가 전통의 한중관계로 복귀하면서 이는 점차 사라졌다.
병자호란 직후 청에게 바친 가혹한 세폐를 거론하는 사람도 있다. 이 때는 조선과 청이 두 차례나 전쟁을 치른 후다. 통상의 한중 관계가 아니라 승전국과 패전국의 관계다. 명과의 결전을 앞둔 청이 배후에 있는 조선의 저항을 근원제거하기 위해 세폐는 더욱 가혹했다. 그러나 청이 대륙의 새 주인으로 위상을 굳히고 전쟁을 벌일 일이 없어지면서 두 나라간의 조공 무역은 전통적인 형태로 환원됐다.
조선의 천주교도 박해 때, 서양국가들이 이를 청나라에 대해 항의했지만, 청나라 황실은 “조선은 별도의 국가로서 우리가 간섭할 수 없다”고 밝히는 당시 문서도 있다고 한다.
군사적으로나 실질 주권적으로 명실상부한 독립국가인데 그럼 왜 기분 나쁘게 황제 밑의 왕 노릇을 자처했을까. 거기에는 동아시아 국가들간의 이념적 유대관계가 존재한다.
조선과 명, 청은 유교 이념을 공유한 동맹국가다. 당시의 공맹사상은 오늘날의 민주주의와 마찬가지다. 이 체제에서 중국의 황제는 단순히 옆에 있는 큰 나라의 국가원수일 뿐만 아니라 공자에게 가장 큰 제사를 올리는 교황의 지위를 겸했다.
중국 황제들이 현명했던 것은 아무리 큰 나라라도 온 천하를 상대로 싸워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는 것이다. 주변 수많은 민족 가운데 하나라도 공격을 하면 천하의 민심이 불안해지고 천자 자신이 위태로워진다는 이치를 알고 있었다. 중국 황제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도 200년 주기로 반복되는 이민족들의 침략이었다.
조공무역이란 이런 현실에서 생겨난 외교 해법이다. 천자는 세상 모든 나라들의 고유한 경계와 풍속을 존중하는 대신 주변 국가들은 중원을 넘보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것이다.
병자호란 때 그토록 혹독한 고생을 하고도 북벌을 하자고 나섰던 조선이다. 북벌이 실행되지 못한 건 청나라가 갈수록 강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청나라가 예전 몽고와는 달랐음을 확인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원의 쿠빌라이는 공자묘에 화살을 날렸지만 청나라 황제는 이 곳에 가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렸다. 자금성 주인의 출생지와 헤어스타일만 달라졌을 뿐이지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은 변한 것이 없었다. 죽기를 각오하고 만주까지 쳐들어가야 할 이유가 사라졌던 거다.
오늘날 한미동맹이 굳건하다고 하는데 아직 1950년 이후 60년에 불과하다. 고려가 송나라와 통교한 이후 조선-청까지 한민족과 중국 왕조는 800년이 넘는 종교적 군사적 동맹관계를 지켰다.
이 동맹관계에서는 다른 나라 군대를 도성에 상주시키는 일도 없었고 작은 나라의 시장이 큰 나라에 종속되는 일도 없었다. 오늘날 국제관계와 비교하면 이상형에 가까운 구석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교문서 한 구석에 있는 “신(臣)”자 몇 개를 가지고 속국이었다고 스스로의 역사적 자부심을 짓밟는 사람들이 있다.
얼마 전 영화 속에 어처구니 없는 장면이 있었다.
중국 사신이 칙서를 우렁차게 읽어대는데 조선 임금이 무수한 신하와 함께 근정전 뜰에 엎드려 있는 것이었다. 만약 이런 일이 실제로 있었다면 아마 조선의 담당 외교관들은 바로 약사발을 들어야 했을 것이다.
섣부르게 들은 사실을 함부로 영상으로 만들어내는 폐해다. 통상적으로 중국의 사신이 황제의 대행으로 온다 해도 그가 노란 색 옷을 입고 황제를 대신해 조선 국왕의 예를 받는 것은 정전 안에서 극히 제한적으로 이뤄진다. 이 절차가 끝나면 칙사 또한 본연으로 돌아가 조선 국왕 앞에서 자신을 “외신(外臣)”이라 칭하며 낮추는 것이다.
혈통이 다른 두 민족이 점차 커져서 국경을 접하게 되면 충돌이 불가피하다. 한민족과 중국인들은 활동영역이 확대되면서 고구려와 수, 당의 전쟁기를 거쳤다. 그러다가 두 민족이 모두 북방 기마민족의 공격을 받았다.
전통적인 한-중 국가관계가 형성된 것은 11세기 고려 문종이 송과의 국교 수립에 나서면서다. 이 때 고려와 송나라 사이에는 강성한 거란 족의 요나라가 천자국 노릇을 하며 버티고 있었다. 요나라는 고려와 송의 교류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래도 문종은 송과의 수교를 밀어붙였다.
이게 바로 한중 관계의 원형이다. 만약 한중 관계가 군사적 압력에 의한 속국 관계라면 무시무시한 거란의 압력을 받아가면서까지 송나라와 교류에 나설 이유가 있었겠는가.
오늘날 자기 정치세력의 입장이 섞여서 그러는지는 모르지만 함부로 우리 조상들이 슬기롭게 이웃나라 사람들과 만들어낸 공존의 모델을 함부로 폄하하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 그것은 민족혼을 더럽히는 일이다.
장경순/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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