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좌익의 소리

정권이 바뀌었다고 '역사'가 달라지나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문제를 바라보며

이경희330 2008. 10. 13. 23:29
현 정부의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를 둘러싼 행태를 보면 점입가경이다. 급기야는 지난 10월 6일 교육과학부 국정감사장에서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가 북한 교과서를 베꼈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뿐만 아니라 검정의 중립성을 보장하기 위해 공개하지 않게 되어있는 검정심사 결과 원칙까지도 교육과학부가 스스로 깨고 기습적으로 공개하는 등 자기모순적인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현재 사용되는 한국근현대사 교과서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교과서는 김영삼 정권 당시 만들어진 교육과정에 따라 만들어졌다. 특히 근현대 교과서는 1980년대 이후 활발해진 역사연구의 성과를 담기보다 박정희-전두환 정권 당시 교육과정과 더 많이 닮았다는 평가를 당시부터도 받았었다. 게다가 교육과정이 교과서 서술의 구체적인 내용까지 매우 상세하게 규정하여 교과서 간의 차이가 그리 큰 편이 아니었다.

이를 바탕으로 현재의 7차 교과서는 김대중 정권을 거쳐 개발되어 검정 과정을 거쳤다. 검정은 학계의 중견학자들과 중견교사들이 참가하여 엄격하게 진행되었으며, 참가한 인사들 중 이념성을 뚜렷하게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새로운 교과서가 나온 이후 대부분의 역사관련전문 단체와 학회에서 교과서 검토 작업을 벌였으나, 좌파적이라는 평가를 받은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이와 같이 엄격한 절차를 거쳐 합법적으로 만들어진 검정교과서는 학교별 채택 과정도 원칙에 따라 정상적으로 이루어졌다. 대다수 교사들은 아무런 외압 없이 교육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교과서를 선택했고, 결과적으로 특정 출판사 교과서가 높은 비중을 차지한 이유도 이념성 때문이라기보다, 풍부한 학습자료와 학생활동을 담아 학생 스스로 역사를 탐구할 수 있도록 하였기 때문이었다.

교과서에 대한 문제제기, 처음부터 '정치적'이었다

교과서에 대한 문제제기는 처음부터 정치적이었다. 근현대사교과서 문제는 비단 이번만이 아니라 2004년 보수적 언론 매체인 '월간조선'에서 처음 문제를 제기했다. 2004년 권철현 한나라당 의원(현 주일대사)이 국정감사 때 근현대사교과서를 친북·좌파적이라고 제기하였고, 이를 보수적인 언론매체가 다시 확대하여 보도하면서 마치 대단히 좌파적인 교과서가 현장에서 활용되는 듯한 상황을 연출했다. 2004년 이후 교과서 포럼, 뉴라이트로 알려진 인사들이 한나라당-보수언론과 한편이 되어 지속적으로 특정 교과서를 공격했다.

이러한 문제제기에 따라 2004년 한국사연구회와 한국역사연구회, 역사교육연구회 등 역사학 관련 학회들이 심포지엄을 열어 "교육부의 7차 교육과정에 제시된 근현대사 교과서 집필 원칙에 충실했다"고 공개 검증까지 마친 상태다. 오히려 역사학계는 한나라당이나 뉴라이트 계열의 비뚤어진 역사의식과 교육을 정치에 예속시키려는 의도를 비난한 바 있었다. 뿐만 아니라 지난 10월 8일 프레스센터에 모인 한국역사교육학회, 한국역사연구회, 한국근현대사학회, 한국사연구회 등 21개 역사학회는 다시한번 현정부와 여당에 대해 교과서 수정시도를 중단할 것을 촉구한 바 있다.

한편 근현대사교과서가 친북 좌파적이라는 제기가 있었던 2004년은 노무현 정부 아래서 친일청산활동, 독재정권 시절의 인권탄압에 대한 조사가 본격화된 시점이었다. 그것은 친일 보수세력들의 노무현정부에 대한 공격이자 민주화세력 전반에 대한 색깔 공세였으며, 자신의 잘못된 역사관에 대한 반대를 잠재우기 위한 포석이었다.

최근 근현대사 교과서를 친북·좌파적이라고 문제제기를 하며 왕성한 활동을 하는 교과서 포럼이 2008년 3월에 출간한 소위 대안교과서를 보면, 일제의 침략보다는 우리 민족의 책임을 강조하고, 일제강점기 동안의 경제성장을 강조하며, 건국60주년을 운운하며 독립운동을 부정하고, 노골적으로 독재를 찬미하고 있다.

정권이 바뀌었다 해서 역사가 달라질 수는 없다. 전두환 정권을 정의사회로 기술하듯, 교과서를 정권의 홍보물로 여기는 역사의 퇴행은 중단되어야 한다. 교과서 포럼에 참가한 특정 단체가, 대한상공회의소라는 기업인들의 임의 기구에서 내놓은 의견서를 근거로 교과서를 개편하려는 것은 전혀 학술적이지도 교육적이지도 못하며, 과거 독재정권 시절 일부 어용학자가 밀실에서 교과서를 펴내는 상황을 연상하게 한다. 교과서는 학문의 문제이며 교육의 문제다. 문제가 있다면 학술적이고 교육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지, 합법적 절차를 거쳐 제작되고 사용되는 교과서에 부당한 이념공세를 퍼붓고 힘으로 매장하려는 행위는 당장 중단되어야 한다.

가장 원칙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 검정을 정권이 바뀌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다시 하라고 한다면, 이는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과 민주주의의 최소 원칙인 절차적 민주주의를 짓밟는 일이다.

 

왕홍식 전국역사교사모임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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