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의 정의,폐악

일그러진 한국기독교 자화상

이경희330 2007. 9. 5. 01:02
일그러진 한국기독교 자화상
Again 1907을 돌아보다.
조양근 prayer103@nate.com

일그러진 자화상-Agian 1907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 이 땅에 성령의 바람이 휩쓸고 지나갔다. 1907년 평양에서 시작된 부흥의 물결은 전국을 퍼져가면서, 기독교가 이 땅에 터 잡고 살아가는 우리 선조들의 삶의 자리에 깊이 뿌리를 내렸고, 백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국민의 1/4이상이 기독교인일 정도로 한국사회에 엄청난 성장을 했던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2007년 교회들은 평양대부흥운동을 다시 조명하자고 한다. 최근 개신교회 교세가 줄어들고 사회에서의 인식이 나빠지면서 차츰 쇠퇴해가는 조짐을 보이고 있던 찰나에, 평양대부흥운동이 이 땅을 흔들어 놓은 지 백 년째가 된다는 것은 새로운 부흥의 전환점으로 삼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나 할까? 7월부터 각 교단교파마다 평양대부흥운동을 기념하는 행사들이 줄지어 왔다.


성령의 사건

   
 
   
 

평양대부흥운동을 성령의 역사로 말한다. 성령의 역사란 무엇일까? 평양대부흥운동을 이야기하는 대부분 교회에서는 성령이 임하면, 은사를 받고 거기서 능력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하지만 성령의 사건을 어떤 은사를 받는 것, 방언현상이나, 치유의 기적, 어떤 초인적인 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으로만 본다면, 성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성령의 사건을 여러 의미를 희석시킬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

사도행전에서는 성령이 각 사람에 임하는 사건은 소개되고 있다. 성령의 처음 체험했던 공동체는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한다. 이 사건을 방언을 말하는 사람과 방언을 듣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고자 한다. 한 곳에 모여 기도하고 있던 공동체는 예언자 요엘이 “내가 모든 사람들에게 나의 영을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딸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종들에게까지도 남녀를 가리지 않고 나의 영을 부어주겠다.”라는(요엘2:28)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듯이, 성령에 사로잡히자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한다. 예언자 요엘이 말하듯이, 남녀노소․신분차이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영이 임하는 것이다. 그 안에는 어떤 차별도 없고, 차이를 넘어서 하나가 되는 공동체의 탄생이 바로 성령의 체험했던 사람들일 것이다.

성령을 체험한 공동체를 목격한 사람들은 성령을 체험한 사람들이 방언으로 말하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란다.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들은 갈릴리 사람들이고,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바대 사람, 메대 사람, 엘람 사람, 메소포타미아와 유대, 갑바도기아, 본도, 아시아, 브루기아, 밤빌리아, 이집트, 구레네 근처의 리비아의 여러 지역 사람들, 유대 사람, 유대교에 개종한 사람, 크레타 사람, 아라비아 사람”들인데, 갈릴리 사람들이 여러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하느님의 큰일”을 알아들 수 있도록 말한 것이다.(행2:7~13)

방언을 말하는 사람과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에게는 성령의 사건을 체험하고 목격하기 이전에 어떤 사건에 연관되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벨론 포로기를 동시에 겪은 이들이라는 것이다. 포로에서 돌아온 귀환자들이나, 그 땅에 남아 고통 받던 백성들이나, 멀리 흩어졌던 유대인들이나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이 통치하는 이스라엘이 회복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 날이 되면, 하느님의 영이 모든 사람들에게 부어줄 것”이라는 예언자 요엘을 통해 선포되었던 하느님의 말씀이 성령을 체험한 공동체에 나타난 것이다. 또한, 성령을 체험한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이 왔던 곳이 어디인가?

그 지역들은 숱한 전쟁의 고통으로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정착해 살던 곳이다. 500년을 넘게 흩어져 살면서 너무도 달라진 언어는 더 이상 소통을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마치 창세기 11장에서 바벨탑 사건이 주는 교훈처럼 인간의 욕망이 하늘을 찌를 때, 신이 언어를 흩어놓음으로서 욕망을 분쇄시키듯이, 유대사람들은 소통의 단절을 경험하고, 공동체는 해체될 수 있는 대로 해체된 뼈아픈 경험을 하고 있던 것이다. 전쟁의 고통과 그로인한 공동체의 해체를 겪은 사람들이 이제는 하느님의 영이 부어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바벨탑 사건으로 인해 흩어졌던 모든 언어들이 성령의 사건을 통해 소통될 수 있는 놀라운 사건으로 바뀌는 것이다. 성령의 사건은 단절된 공동체가 하느님의 뜻을 통해 회복되어지는 것이다.


1907 평양대부흥운동

   
 
   
 

조선시대의 끝 무렵은 그야말로 혼란스러웠던 시기였다. 조선을 지탱시켰던 유교라는 가치체계가 붕괴되고 외세의 침략은 지역공동체를 해체시켰다. 지역공동체를 통합하는 가치를 상실한 조선사회는 사회 전반에 걸쳐 총체적 도덕적 아노미를 겪었다. 서양인들을 통해 소개된 기독교라도 해서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사실 평양대부흥운동이 있기 전에 이미 많은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이들을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인 데는 여러 가지 다른 이해관계가 있었다. 기독교를 받아들인 사람들 사회 엘리트들과 민중들이었다. 엘리트들은 당시 열강들의 기독교 국가라는 것을 보았다. 기독교를 신봉하면 부국강병을 할 수 있다는 기대가 엘리트들로 하여금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했고, 민중들에게는 선교사들을 통해 지원되는 구호품들이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적어도 평양대부흥운동이 있기 전까지는 기독교를 통해서 추구하는 목표가 서로 달랐다.

동상이몽을 하며 모인 교인들은 1903년 원산에서 시작된 부흥운동이 1907년까지 이어지면서 변화를 겪는다. 1903년 원산에서 선교사들이 자신들의 오만과 편견을 벗어버리고 대중 앞에서 회심의 눈물을 흘렸던 사건을 계기로 성도들은 총체적 회개운동을 한다. 모두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건으로 번져간다. 조선을 유지시켰던 유교라는 가치체계가 붕괴된 이후에 기독교는 사회를 통합하고 질서를 유지시킬 수 있는 새로운 도덕적 윤리적 가치체계를 형성해 주었고, 교회를 중심으로 새로운 공동체들이 생기기 시작한다. 전쟁의 상처와 고통으로부터 해체된 공동체가 다시 부활한 것이다.


2007년 한국사회

   
 
   
 

해방이후 한국사회는 또 다른 위기를 겪는다. 분단과 전쟁은 또 다시 공동체를 해체시켜버렸다. 그리고 미처 공동체가 회복되기도 전에 군사독재가 시작되면서 한국사회를 통합할 수 있는 가치는 또 다시 상실하였다. 군사독재 세력들은 자신들의 통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새로운 가치로 한국사회 전체를 통합하려고 한다. 그래서 저마다 노래 부르듯 외치는 구호가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를 외치며, 자본이 인간의 행복을 결정할 것이라는 왜곡된 가치가 사회를 통합할 도덕적, 윤리적 가치를 대신해 버렸다.

자본의 가치는 사회를 통합해 줄 수 없었다. 사람들을 끊임없이 차별하려고 하고, 그로인해 누군가는 배제되는 그런 사회를 만들었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산업화와 도시화는 지역 간의 불균형적 발전을 조장했고, 이는 곧 지역 사회의 생산성을 잃어버리게 했다. 많은 사람들이 돈벌이를 위해 도시로 몰리게 되고, 농촌은 농촌대로, 도시는 도시대로 계층, 계급, 지역, 세대 등 온 사회가 갈등을 겪고 있는 혼란 속에서 각 구성원들의 소통의 단절은 쉽게 치유되지 않고 오히려 도처에 깔린 차별은 사회양극화라는 엄청난 재앙을 맞이하였다. 심지어 교회조차도 자본의 가치에 함몰되어 이러한 갈등을 해소하기보다 군사개발독재시대와 보조를 맞춰서 물질의 축복을 강조하며 사회가 가진 양극화를 부추기고 있다.


일그러진 자화상

   
 
   
 

지난 7월 8일 월드컵 상암경기장에서 너무나도 다른 예배가 있었다. 경기장 위에서는 5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평양대부흥의 역사가 백주년을 맞이하는 2007년에도 일어나길 기대하는 예배를 드렸다. 그 밑에 상암경기장 홈에버 매장에서는 자신들의 삶의 자리를 박탈당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자신들이 탄식하는 소리를 하느님께 올렸다. 도대체 하느님은 어기에 계시는가? 똑같은 이름의 하느님을 부르는 사람들조차 자본이란 벽에 의해 소통의 단절을 겪은 것이다. 그로인해 누군가는 고통소리를 누군가는 영광을 돌리는 상반된 예배가 같은 시간, 같은 곳에서 열린 것이다.

8월 23일 부산에서 감리교영남선교대회가 엄청난 규모로 열렸다. 이 집회도 평양백주년운동을 기념하고, 성령의 역사가 2007년에도 일어나게 해달라는 염원을 담아 전국에 있는 감리교회가 부산으로 모였다. 이 집회가 성공적이었느냐를 평가하는 기준은 얼마나 성령의 역사가 드러났느냐는 물음이 아니었다. 이 집회에 ‘몇 대의 차량’이 동원되었으며, ‘몇 명’이 모였으며, ‘예산이 얼마나 들었을까’라는 물음들이었다.

상암에서 열렸던 평양대부흥운동 기념행사나 감리교 영남선교대회나 할 것 없이 한국의 교회는 성령의 역사를 수로 표현하려고 한다. 교인 수, 교회의 규모(size), 예산 등으로 교회의 성장을 판단하려는 시도는 교회가 더 이상 교회 공동체조차 해체하는 소통의 단절을 만들어 냈다. 도시와 농촌, 대형교회와 미자립교회 등, 교회조차도 사회양극화에 보조를 맞추는 것일까? 


신(申: 거듭되다) 바벨탑

   
 
   
 

바벨탑의 사건은 누가 더 높이 하느님이 있는 곳까지 갈 것인가라는 욕망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수(數)였다. 높이가 얼마인가? 몇 명의 사람들이 동원되었는가? 예산이 얼마나 사용되었는가? 그러한 가치가 다른 삶의 가치를 가진 이들보다 우수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다른 문화와 전통과 가치를 파괴하는 폭력으로 나타났던 사건이 바벨탑 쌓는 것이었다. 신기하게도 바벨탑을 쌓을 때 던지는 물음들이 최근 한국교회에서 그대로 재현되는 것이다.

수(數)로 표현되는 가치야 말로 자본이 만들어내는 가치일 것이다. 그러한 가치가 한국사회의 총체적 위기를 조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그런 가치를 대신할 도덕과 윤리의 잣대가 아닌 자본의 바벨탑을 쌓고 있는 사회와 똑같은 발상으로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오히려 바벨탑을 쌓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1907년에 있었던 평양대부흥운동은 기념한다는 한국교회는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던 바벨탑을 쌓는 일을 하고 있다.


새로운 2007년

   
 
   
 

Again 1907을 외치면서 1907년의 사건이 우리에게 가져다주었던 의미를 퇴색시키는 바벨탑을 쌓는 일들을 중단해야 하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는 바벨탑을 쌓으며 단절되었던 사람들이 성령의 체험을 통해 서로 소통하는 것이며 공동체를 세우는 일이었다. 1907년 이 땅에 불었던 성령의 바람은 전쟁과 수탈의 고통 속에서 절망하고, 도덕적 아노미 속에서 삶의 방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새로운 가치와 공동체를 회복시키는 놀라운 역사였다.

백 년 전 사건을 기념한다는 것은 오늘 우리를 반성함과 동시에 사회양극화라는 또 다른 아노미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를 물어야 한다. 성경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이 자신들의 성에서 굶주리는 것을 커다란 죄악으로 여긴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가 만들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전쟁으로 인한 가족의 해체였다. 오늘 우리 사회는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신자유주의라는 보이지 않는 전쟁이 가족과 공동체를 해체하고 있다.

돈벌이를 위해 고향을 등지고 이로 인해 부모와 떨어져 사는 아이들! 비정규직 노동자들! 장애인들! 이주노동자들! 국제결혼여성들! 무의탁노인들! 이들 모두가 빈곤의 고통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도처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 성령의 사건은 그야말로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의 영에 사로잡혀 “더불어 사는 세상”이다. 성경은 성령을 체험한 공동체는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고 말한다.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대로 나누어주었다고 말한다.(행2:44~45) 그로 인해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고 주님께서는 구원을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고 전한다.(행2:47) 성령을 체험한 사람들에게서 “더불어 사는 가치”가 회복되는 공동체가 세워질 때, 모든 사람들이 자본이 만들어내는 무한경쟁의 전쟁에서 고통 속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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