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랬다 저랬다 못믿을 성경말씀 갈라디아서 5:9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같은 단어인데도 본문마다 뜻이 다르게 쓰이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그 뜻을 올바로 간파하지 못하면 ‘이랬다 저랬다 못믿을 성경말씀’이 되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단어인데도 왜 본문마다 쓰임이 다른지를 알아야 한다. 그럴 때 말씀의 의미에 입각하여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잘 알아 들을 수 있게 된다. 본문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 알아야 “나를 향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제대로 순종할 수 있게 된다. 무슨 뜻인지 잘 모르는 말씀에 제대로 순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마다의 뜻이 무엇인지 올바로 잘 이해하도록 해야 한다. 더군다나 말씀은 믿으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라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본문의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더욱 더 잘 알고 이해하도록 해야 말씀에 충실한 신앙생활을 할수 있게 된다. • 말씀을 토막내어 이해하고 적용하려고 하면 전체 의미와 상관이 없게 된다. 위의 갈5:9의 진정한 뜻은 무엇일까? 바울이 제빵원리 강의를 했던 내용일까? 아니면 누룩의 확장특징을 통해 교회성장이나 전세계를 향한 선교강의를 한 것일까? 단순하게 본다면 “누룩으로 인해 부풀어서 커진 반죽된 밀가루의 외형”에 어떤 의미를 심어 그것으로 무언가를 말하고자 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앞뒤 내용없이 토막난 것같은 위의 구절만 갖고서는 대체 바울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인지를 제대로 알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일차적으로는 위의 구절이 들어 있는 문맥을 앞뒤로 살펴 보아야 한다. • 마음에 드는 구절을 토막내서 단어의 뜻으로만 해석하면 안된다. 위의 구절이 들어 있는 본문은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은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역설하는 내용 중에 담겨 있다. 그러므로 “누룩”은 할례를 받아야만 한다고 말하고 다니는 자들의 주장에 감염되어 그들의 “거짓 교훈”에 넘어가는 것을 염두에 둔 말이다. 따라서 10절에 이어서 나오는 “다른 마음”이라는 말은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은혜 폐기론”적 유혹의 감언이설에 넘어가지 않을 줄 안다는 뜻에 연결되어 결국 “누룩”이란 ‘유대교적 성향을 갖는 거짓 교사들’의 ‘할례의 타당성’ 주장에 대한 바울의 일갈(一喝)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토막내어 바울이 제빵원리에 관한 강의를 했다거나 세계선교를 말하기 위해서, 혹은 교회성장의 원리를 강의하면서 영역 확대적 선교를 주장했던 말이라고 보아서는 안된다. • 저자의 입장에서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된 “누룩” 그런데 위에서 본대로 바울은 “누룩”이란 단어를 “할례의 타당성을 주장하는 거짓교훈”이라는 개념으로 사용한 반면, 복음서 저자들은 그와는 달리 또 다른 뜻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복음서의 본문들을 통해 알수 있다. • 마가복음에서의 뜻-무지하고 둔한 제자들 마가복음8:14~21 예수께서 경계하여 가라사대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가라사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이와 같은 마가복음의 본문만 보면 여기서 이야기된 “누룩”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그 뜻이 매우 불분명하고 또 그 뜻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것이 상당히 어렵다. 그래서 마가복음의 본문을 대할 때 나름대로의 근거를 제시하면서 “누룩”에 대해 제각각 해석하게 되는 여지를 갖게 된다. 그래서 이런 경우 여러가지 해석방법들을 동원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과연 마가복음은 이 본문속에서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이란 용어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일까? 마가복음 저자는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을 듣기는 들어도 그것이 무슨 뜻인지 도무지 깨닫지 못하였다면서 그들의 우둔함과 무지를 적나라하게 지적한다. 그리고 이어서 계속하여 그 다음의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이와 같은 흐름속에서 전개되는 마가복음의 본문을 대하는 독자들도 이 구절에 나타나 있는 “누룩”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를 모르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자체가 아무런 암시도 하지 않은 뜻을 이리저리 추론해서 “이것이다”라고 지목하는 것은 본문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누룩”이란 용어가 바리새인과 헤롯과 연결되었기 때문에 부정적인 의미에서 사용된 것만이 분명하다는 윤곽만 짚을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일단 여기서 “누룩”의 뜻을 밝히는 것과는 상관없이 다음으로 계속 이어져 가도록 하는 것이 마가복음 저자의 의도이다. 마가복음 저자는 “누룩”이란 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정확하게 그 뜻을 나타내지 않은 채 예수의 제자들의 우둔함과 무지함을 지적하는 것으로 몰아간다. 독자들도 당연히 마가복음 저자가 말하는 “누룩”이란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모른 채 예수의 제자들과 다를 바 없이 둔하고 무지한 입장에 서게 된다. 그런 다음 독자들도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수난과 부활에 관한 가르침을 조금씩 깨달아 가는 “점진적인 깨달음”의 과정에 동참하게 된다. 말씀을 깨달아 가도록 인도하는 마가복음 저자의 탁월한 문학적 재능이다. • 마태복음에서의 뜻-조금은 똑똑한 제자들 마태복음 저자는 마가복음의 저자와는 다르게 매우 친절하게도 “누룩”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를 독자들도 쉽게 알아맞출 수 있게 다듬어 놓았다. 마태복음 저자는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라는 구절을 첨가하므로서 마가복음에 나타난 제자들과는 달리 마태복음의 제자들은 좀 똑똑하게 비추어지도록 했다. 이로 인해 그들은 이 수수께기 같은 예수의 말씀이 결국 “예수의 교훈이 아닌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정확히 해석하게 되었다. 따라서 마가복음에는 없는 이 한 구절로 인해 마가복음의 둔하고 무지한 제자들이 마태복음에서는 똑똑한 제자들로 묘사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마태복음 16:6~12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 누가복음에서의 뜻-제자들과 전혀 무관 하지만 누가복음에서는 제자들의 똑똑함의 문제와는 전혀 상관없는 상황속에서 이 “누룩”이라는 단어가 씌였다. 그리고 이 “누룩”이라는 용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예수께서 친히 해석까지 곁들여 가면서 차분하게 권면하는 형태로 기술되어 있다. 누가복음 저자는 이 “누룩”이란 단어가 “위선(외식)”의 의미로 사용된다는 것을 나타내면서 누룩에 의해 부풀어진 반죽된 밀가루의 외형은 누룩이 가미되지 않았던 원래의 밀가루 반죽이 변질되어 부푼 것임을 지적하고 이런 류의 외형적 가식과 위선 혹은 거짓으로 치장된 것과 같은 삶은 결국 모조리 폭로되고야 만다는 것을 강조한다. 눅12:1~3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 • 갈라디아서와 동일 저자인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사용한 또 다른 의미로서의 “누룩” 한편, 바울의 친서인데도 불구하고 고린도전서를 기록할 때에는 자신의 친서인 갈라디아서 5:9에서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이 “누룩”을 사용했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의 친서에서 같은 “누룩”이란 용어를 서로 다른 뜻으로 사용한 본문은 다음과 같다. 고린도전서 5:7~8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여기서 인상지워지는 “누룩”의 의미는 매우 부정적이다. 그렇다면 이 “누룩”은 어떤 뜻으로 사용된 것일까? 본문이 있는 앞뒤 문맥을 살펴보면 도저히 생각하기 어려운 ‘비도덕, 비윤리’, ‘반인륜적 행위’로서의 ‘음행’의 문제를 말하는 내용안에 이 “누룩”이라는 용어가 들어 있음을 볼수 있다. 고린도교인들 중의 어떤 인간은 ‘아비의 아내를 취하고도(5:1)’ 방자하게 교만하여져서(2절) 그것을 자랑하는데까지 이르렀다(6절). 뿐만 아니라 교회는 그 일에 대해 가슴을 치는 일도 없었을 뿐만이 아니라 그 일에 대해 어떤 징계조치 조차 취하지 않았다(2b). 방기한 것일까?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라는 명분하에 오히려 ‘남들은 생각도 못하는 것을 너는 해냈구나’는 식으로 잘했다고 해대는 형국이었다. 이런 상황속에서 바울은 크리스챤 윤리문제를 제시하며 교인으로서의 품위유지 문제와 전도의 문제를 상호연관시켜, 이런 경우 교회와 크리스챤은 어떻게 이런 문제에 대응해야 하는지에 대한 해법을 제시한다(9절~13절). 따라서 동일인 바울이 기록한 서신임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서와 고린도전서에 사용된 같은 어휘인 “누룩”이 서로 다른 뜻으로 사용되어 서로 다른 교훈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수 있다. •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설명에 사용된 “누룩” 하지만 지금까지의 부정적인 의미와는 달리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의 설교에 사용된 “누룩”은 매우 긍정적인 의미에서 사용되었음을 볼수 있다. 마태복음 13:33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누가복음 13:20~21 또 가라사대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할꼬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 이 두 본문에서의 차이는 마태복음의 천국이라는 용어와 누가복음의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의 차이 외에 다른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비유에서 사용된 “누룩”은 ‘영역확장’의 의미를 띤 선교지향적 뜻을 갖고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수 있는데 이 두 본문은 위에서 본 본문들과는 달리 “누룩”의 속성이 긍정적으로 사용된 경우에 해당한다. • 다른 의미로의 전용에 의한 ‘이랬다 저랬다’의 “이런 뜻 저런 뜻”의 원리 여기서 신약편저자들의 용어사용에 대한 하나의 법칙을 볼수 있다. 그것은 위에서 본 대로 “누룩”이라는 단어는 어디서든지 같은 발음(쥐메)으로 표현됨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입장이나 의도를 표현하기 위해 단어가 지니고 있는 원래의 일차적인 뜻과는 전혀 무관한 의미를 갖도록 신약 본문의 저자들은 자신의 입장에서 그 뜻을 새롭게 규정하여 사용한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나 대상자의 입장에서는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일차적인 뜻이 어떻게 다른 의미를 갖고 사용되는지를 파악하여야 본문이 나타내고자 하는 원래의 뜻에 접근할 수 있다는 원리를 보게 된다. 그러나 신약의 편저자들이 용어의 뜻을 전용할 때 마구잡이식으로 자기 멋대로 뜻을 만들어 사용한 것은 아니다. 일차적인 뜻에 연결된 어의 확대를 통해 나타난 그림을 기초로 그것에서 새로운 의미를 규정해 내어 사용하기 때문이다. • 단어의 일차적인 뜻에서 파생되거나 연상되는 의미의 전용 누룩은 반죽에 첨가되므로 인해 대체로 두가지의 현상을 나타낸다. 하나는 반죽을 부풀게 만드는 외형적인 변화이다. 이것은 “확장력"을 상징하므로 예수의 비유에 나오는 대로 하나님 나라, 혹은 천국 확장을 뜻하는 선교적 의미에서 사용될수 있다. 실제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공히 두 본문은 겨자씨가 심기워져 거대한 겨자나무로 성장한다는 비유에 이어서 이 ”누룩“비유를 소개하고 있다. 외형적 변화에 어휘의 의미를 연관시켜 단어를 사용하므로서 일차적인 의미를 벗어나 새로운 뜻을 갖게 하였다. 따라서 단어 자체의 뜻이 어떻게 변화되어 사용되고 있는지를 알 때 본문의 올바른 의미를 알수 있게 된다. 다음으로 이외의 경우에 있어서는 대체로 부정적인 인상을 주는 용어로 사용되었는데 그것은 누룩이 반죽에 영향을 끼쳐 처음에 누룩을 넣지 않았던 때와는 달리 누룩이 들어간 후로 약간 시큼하게 변화된 인상과 연결지어 “변질된, 부패된”의 의미를 갖는 어휘로 사용했음을 알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되지 못한 것을 대변하는 부정적인 것으로 인상지워져 경계해야 할 것, 주의를 기울여야 할 대상, 없애야 할 것 등을 나타내고자 할 때 “누룩”이라는 용어로 의미를 전용하여 사용했음을 볼수 있다. • 한 단어 같은 발음으로 이런 뜻, 저런 뜻의 예 이와 같이 똑같은 발음의 한 단어가 쓰임새에 따라 다른 뜻을 갖는 위의 경우에서와 비슷한 예를 좀 더 들면 이렇다. 사도행전에서 “불”은 “성령”의 임재와 연결되어 사용된다. 아마도 열정,열심을 강조하기 위한 용어의 ‘어의전용’일 것이다. 그런데 이 “불”이 야고보서에서는 “혀”에 연결되어 모든 것을 불태우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도행전에서는 긍정적으로 사용된 반면 야고보서에서는 격졍, 분노, 진노와 같은 그림을 떠올리게 하는 용어로 사용되어 “혀”의 통제를 말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이렇기 때문에 같은 발음의 한 단어라고 할지라도 본문안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살필 때 본문의 원의를 좀 더 잘 알게 되어 신약의 편저자들이 애당초 무엇을 말하고자 했던 것인지를 제대로 이해하므로서 본문의 의도를 올바로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 결과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교훈을 갖고 나에게 다가오시는 것인지를 제대로 깨닫게 된다. 깨달으면 깨달은 것 만큼 순종으로 연결되어야 하기 때문에 말씀을 믿는다고 하면 그것은 말씀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믿으려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았다면 그 뜻이 생활속에서 열매로 나타나도록 하는 말씀에의 순종이 이행되어야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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