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정 기자 wel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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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오후 4시, 경기도 안양 샘병원에서 피랍자 중 가장 먼저 풀려난 김경자(37)·김지나(32)씨가 기자회견을 통해 피랍 당시 상황과 심경을 밝혔다. 이들은 피랍상황 중 제기된 의문점들에 대해서도 답했다.
아프가니스탄으로 떠나기 전 유서를 쓴 적이 있느냐는 물음에 이들은 "좀 더 의미 있는 삶을 살자는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진행을 했었다"면서 "아프간팀이 구성된 후에 유서를 쓰고 싶은 사람은 쓴 것이기 때문에, 팀원 중 절반이 유서를 작성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지영씨가 석방을 양보했다는 언론보도는 사실임을 확인했다. 이씨가 건네준 쪽지가 늦게 공개된 이유에 대해선 "지영 언니 메모를 가지고 (먼저) 전해주면 마음만 아프니까 하지말라는 말도 있었고, 언니 어머니가 부산에서 올라오셨다고 할 때 전해드린 것"이라고 말했다.
이씨가 쪽지에 '부모님께'라고 쓴 이유에 대해선 "처음에 2~3줄만 썼다가 탈레반이 '왜 이것밖에 안 되느냐, 마더 파더'라고 하니까 얼떨결에 쓴 것 같다"고 설명했다.
고 심성민씨가 살해된 것을 알았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이들은 "몰랐다. (피랍자) 4명이 밖에서 산책을 하고 있는데 (탈레반이) 성민이만 오라고 했다"면서 "(나중에 탈레반에게) 어디 갔냐고 물으니까 '한국 갔다'고만 했다"고 답했다.
앞으로 이번과 같은 선교활동을 갈 수 있을 것 같느냐는 물음에는 "지금 구체적으로 그 생각을 정리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라며 "당분간은 못 갈 것 같다"고 답했다. 이슬람권 선교를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를 묻는 질문에도 "그렇게 거창한 것까지 생각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라며 선교와 관련된 질문엔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이들은 "잡혔을 때 탈레반이 분장을 한 상태로 얼굴에 가면을 쓰고 총칼을 든 채로 카메라를 찍었다"면서 "지금 (기자회견장의) 카메라도 두렵고 무섭다. 귀국해 병원에 입원한 다음날 불꽃놀이소리를 듣고 총성으로 착각해 잠을 설친 적이 있다"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내용.
▲아프간으로 가기 전 어떤 프로그램을 준비했고 현지에서 봉사단이 어떤 활동을 했는지
=(김지나)가기 전에 그 쪽 문화에 대해 서로 공부했고, 거기 계신 분들은 현지 의상이나 차도르 같은 거 준비해주신다고 해서 갔다. 가서는 아이 머리 깎아주고, 축구하고, 놀아주고, 약을 주는 일을 했다. 13일 낮 출발해서 북경, 두바이, 카불 거쳐 14일 저녁에 마자리샤리프 도착했다. 16일 17일은 동네 아이들에 봉사했다. 18일 밤에 마자리샤리프에서 카불로 이동해 아침에 도착했다. 저녁 7시 30분이면 해가 진다고 해서 그날 오전 10시 30분에 (카불) 출발해서 19일 오후 5시에 칸다하르 도착할 예정이었다.▲외교부에서 여행 자제 요청했다는 사실을 알았나?
=몰랐다.▲피랍 당시의 상황과 이후 억류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대부분이 자고 있거나 힘든 상황이었고, 기억이 단편적이었다. 모여서 피랍상황을 정리했다. 가즈니에서 주유를 하기 위해 20분 정도 주차했고, 그 후 운전사와 운전사 조수가 자기 친척들이라며 앞 마을에 내려주겠다고 하며 2명을 태웠다. 40~50분 후에 멀리서 총 가진 2명이 차 정차하라고 신호를 보냈고, 운전자가 과속해서 가려고 하니까 총을 발포했다. 차 엔진에 맞아서 급정거했다. 자고 있던 팀원들이 깨어났고, 차를 옆으로 뺐다. 총 쏜 사람 말고 다른 사람이 타이어에 쏴서 멈추게 했다. 먼저 총 쏜 사람이 카메라, 핸드폰 다 압수하며 내리라고 했다. 그 이후에는 시키는 대로 따라갔다.▲억류 당시 상황?
=처음 5일 정도는 함께 다 있었고, 다음부터는 처음에 나눌 때부터 한국에 가는 거라며 데리고 다녔다. 각 팀마다 경우가 달라서 다른 팀은 모르겠다.▲밤에 이동을?
아니다. 오전에 떠났고 낮 2시 40분에 납치당했다.▲태운 2명은?
그 사람들은 돌려보냈다고 하더라. 그냥 버스다. 커튼을 내려놔 밖은 잘 못 봤다. 전세를 내서 빌린 버스였다.▲억류 과정에서 예배 등 나름대로 종교행위를 했는지, 탈레반이 종교행위에 시비를 걸거나 개종을 강요했는지?
=억류된 후 예배는 하지 않았다. 눈을 뜨고 대화를 하는 것처럼 기도했다. 창문에서 망을 보면서. 큰 소리를 낸 적도 없고, 그쪽 사람도 불쾌한 감정 낸 것 없었다. 너희가 무슬림이라면 지금도 풀어줄 수 있다는 얘기를 통역을 통해 들었다. 기도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남자들은 이슬람 기도문을 외우지 않아 구타를 당했다는 얘기가 있는데?
=잘 모르겠다.▲통역은 누가?
=임현주, 간단한 통역은 박혜영씨가 두팀으로 나뉜 후부터 했다. 이지영씨가 간지 8~9개월 밖에 안 돼서 간단한 것만 됐다.
▲우선 석방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석방 이후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점은 무엇이었는지?
=석방된 이유를 모르겠다. 아무 조건이 없었다고 말을 하더라. 저희도 모르겠다. 석방된 후에는 목사님과 심성민씨 피살 소식 듣고 충격을 받았다. 잡혀서 탈레반이 비디오를 찍었는데, 분장을 한 상태로 얼굴에 가면을 쓰고 총칼을 들고 카메라를 찍었다. 지금 카메라도 두렵고 무섭다. 지금 풀려나서 병원에 입원한 다음날 불꽃놀이를 듣고 총성인 줄 알고 잠을 설친 적이 있다.▲유서 비슷한 거 쓴 적 있나?
=좀 더 의미 있는 삶을 살자는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진행을 했었다. 팀원 중에 절반 이상이 유서를 작성하지 않았다. (교회에서) 프로그램을 소개해주고, 그런 걸 참여하고 싶으면 제출하고 가는 것으로. 아프간팀이 구성된 후에 유서를 쓸 사람은 쓴 것이다.▲아프간현지 일정은 누가 책임지고 짠 것?
=배목사, 현지인솔자들이 같이 의논한 것으로 안다. 가서도 의논을 해서 잘 모르겠다.▲유서를 두분 다 작성?
=(김지나)네. 부모님께 감사하고, 제가 살아온 삶이 감사한 삶이었다 정도.
(김경자)저는 간단한 기도제목을 써놓은 정도.▲가시기 전에 공항에서 여행자제구역 표시판 앞에서 사진을 찍은 이유는?
=사진을 못봐서 모르겠다.▲통상적으로 다른 데 갈 때도 유서를 쓰나?
=(김지나)개인적으로는 처음이다.▲석방 직전 이지영 씨가 기회를 양보했다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탈레반이 어떻게 지시했고 이지영 씨는 김경자, 김지나 씨에게 무엇이라고 말하며 양보했는지? 또 이지영 씨가 메모를 쓰고 전해줄 당시의 상황에 대해.
=(김경자)8월 15일 오전, 탈레반이 오더니 지영이와 지나를 지목하더니 한국에 갈 것이다라는 얘기를 했다. 걔네들이 했던 말이 늘 그랬다. 한국에 갈 것이다. 두명과 한명을 나누는구나. 그 상황에서 혼자가 될 것이라는 두려움때문에 저도 모르게 울고 있었다. 두려워서 울고 있었는데, 지영이가 3명이 다 같이 가면 안 되느냐고 했는데 그게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기가 남겠다고 했다. 걔네들이 메모지를 주더니 마더 파더 브러더 하면서 뭘 쓰라고 하더라. 지영이가 안쓰려고 했다. 왜 쓰라고 하는지 몰랐다. 편히 있다는 식으로 쓰라고 해서. 어머니한테 전해주지는 말아달라. 원해서 쓴건 아니니까.
(김지나)저희 3명은 한국 간다는 말을 한번도 믿을 수가 없었다. 이동할 때마다 한국을 간다고 했다. 이틀 후면 한국간다. 입버릇처럼 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상황이 안 좋아지면, 한명씩 찢어놓은 줄 알았다. 영어가 아니라 바디랭귀지로 했다.
이지영씨 혼자 두기로 한 상태에서 너무 걱정이 돼서 어떻게 되느냐고 묻자, 3명과 합류될 것이다. 우리가 합류되는 걸 보고 가겠다. 그건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더라. 지영 언니가 와서 물어보니, 출발할 때 간다고 했는데 하루 더 머물고 4명 있는(임현주, 고세훈 팀)으로 합류됐더라.▲석방 뒤 1주일 가량 지나서 이지영 씨의 메모가 공개된 이유와 어머니만 계신 이지영 씨가 ‘부모님께’라고 적은 이유는?
=지영 언니 메모를 가지고 전해주면 마음만 아프니까 하지말라는 말도 있었고, 어머니가 부산에 있다고 하더라. 언제 올라오실지 몰라 고민하고 있다가 올라오셨다고 해서 글씨라도 보면 반가워하지 않을까 전했다. ‘부모님께’라고 한건 처음엔 2~3줄만 썼다가 탈레반이 왜 이거밖에 안되느냐. 마더 파더 그러니까 얼떨결에 쓴 것 같다.▲나머지 인질들의 석방 합의 소식을 언제 들었고 당시 심경은?
=수도병원에 있을 때 뉴스로 들었고, 19명 나온다는 소식 듣고 굉장히 기뻤다. 하지만 성민이, 목사님 생각 때문에 펑펑 울었다.▲우선 석방된 뒤 이지영 씨는 어떻게 지냈다고 하는지? 앞서 김경자, 김지나 씨와 함께 있을 때와 다른 점은 무엇이었는지?
=하루 더 그 집에 있다가 4명과 합해졌다고 한다. 2~3일에 한번 이동했었는데 그 집(민가) 간 뒤론 매일 이동했다고 한다. 우리가 26일 있었는데 총 이동 장소만 17곳 정도. 마굿간, 헛간, 부자처럼 보이는 곳도 있었다. 외부로 나가진 못했다. 밤에 들어가서. 방 하나에 갇혀 있는데 또 밤에 이동하니 형태를 기억하지 못한다. 눈을 가리지는 않았다.▲다른 인질들의 억류 상황에 대해서도 얘기를 들었을 텐데 김경자, 김지나 씨 상황과 차이점은 무엇인지?
=팀마다 상황이 달라서 자세히 모르겠다. 나중에 19명에 물어보는 게 나을 것 같다.▲서명화 씨가 바지에 피랍일지를 썼는데 서명화 씨는 어떤 상황에서 일지를 작성했는지? 입고 있었던 바지인지, 아니면 갖고 있던 다른 바지인지?
=(김지나)명화가 입고 있던 바지는 맞다. 저희와 헤어질 때까지 입고 있던 바지는 맞다. 5일 정도 같이 있었다. 종이나 이런걸 뺏기지 않았다. 그때까진. 12명으로 나뉜 다음에 책이나 이런걸 뺏겼다. 그쪽 팀도 11명으로 나뉜 다음에 뺏겼을 것. 나는 빈 노트는 뺐지 않아서 거기에 기록했다. 숫자가 써 있는 걸 보면 다 가져가더라. 기록할 때도 숫자도 한국말로 풀어 쓰거나, 일기처럼 안 보이게 하기 위해 서술형으로 썼다. 제가 갖고는 있다. 인질생활을 하면서 생각하는 것밖에 못하니까 적어두고 싶었따. 어떻게 이동했는지 모르고, 달력도 만들어야 했고. 풀려날 거라는 확신을 했다.▲일지 내용 공개할 수 있나?
=개인적으로 편지를 쓴 게 있어서 좀 그렇다. 개인적인 부분만 빼고 공개하는 것은 생각해보겠다.▲여벌 옷은?
=잡히자마자 짐 검사했다. 옷은 캐리어에 있었는데 이미 다 뺏겼다. 개인 가방 하나만 들고 다녔고, 단벌로 다녔다.▲풀려날 거라는 확신을 어떻게 했는지?
=탈레반으로부터 들은 건 “너희들 모두 무사히 한국 갈거다”라는 말. 종교적 확신이라기보다는 그렇게 믿지 않으면 버티기 힘들어서 그렇게 믿고 있었다.▲말을 먼저 꺼낼 수 있는 분위기였나?
=이틀에 한번 집 옮기고, 탈레반마다 성향이 달랐다. 어떤 애들은 위협하려고 총 만지는 애들도 있고 아닌 애들도 있고. 눈치를 봐서 말을 걸어볼만하면 말을 걸었다.▲고 심성민 씨랑 함께 있었는데 심 씨가 살해된 것을 전혀 몰랐는지?
=몰랐습니다. 4명이서 밖에서 산책을 하고 있었는데, 성민이만 오라고 하더라. 어디갔냐고 하니까 한국 갔다고 하더라.▲혹시 고 배형규 목사, 심성민 씨와의 특별한 기억이 있는지? 고인과 고인의 유가족에게 하고 싶은 말은?
=배 목사님 같은 경우, 안정을 시켜주려고 했고. 4명 함께 있을 때 우린 밤에 이동할 땐 죽으러 갈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성민이가 가장 막내였는데도 “걱정하지 마세요. 괜찮을거에요"라며 안심을 많이 시켜줬다. 유가족분들께는 같이 돌아오지 못해서 정말 죄송합니다.(울먹이며) 그런 말 밖에 못하겠다.▲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텐데 특별히 걱정되는 점은 무엇인지?
=나가면, 상황이 전보다 많이 달라져 있을 것이고, 어려운 상황이 있을거라고 생각한다. 잘 버틴 것처럼, 힘든 일이 있어도 잘 이겨낼 거라고 생각한다.
=걱정되는 것이 굉장히 많지만, 어쨌든 살아오기까지 걱정해주신 분들이 많은 만큼, 빚진 마음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구체적이지 않지만, 걱정되는 걸 잘 해결 할 수 있을 것.▲앞으로도 이런 선교활동 갈 것 같나?
=(김지나)당분간은 못 갈 것 같다. 지금 구체적으로 그 생각을 정리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매우 어려운 상황을 경험했는데 혹시 자신의 인생관이나 가치관, 앞으로 삶의 목표에 있어서 변화가 있는지?
=(김지나)인생관은 거창하고. 일단, 거기 가서 생각한 게 우리나라에 대해 감사했고. 좋은 나라에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었구나. 물도 없고 전기도 없고, 그런 불편함을 겪고 참 축복받은 사람이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인질 사태가 있었고, 이와 같은 일이 인간적인 실수 때문인지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지?
=저희 동료들이 죽었고, 그게 그렇게 빨리 정리될 수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이슬람권에 대한 선교를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그렇게 거창한 것까지 생각할 것을 요구하는 건 무리다.▲기자회견 마련한 계기?
=많은 분들이 염려해주시고, 정부에서 많은 어려움 있었다고 알고 있고. 궁금해 하는 것에 대해선 어느정도 알려 드려야한다는 책임을 느끼고 있다.▲심성민씨 데리고 나갈 당시 상황을 더 구체적으로 말해달라
=23일에 11명과 12명으로 나뉘고, 25일에 6명이 같이 있다가 4명이 또 따로 나왔다. 5일 정도 같이 생활했다. 7월 31일에 아프간 시간으로 오후 7시쯤에 탈레반 한명이 와서 잠시 불렀다. 낮에는 실내에 있는데 해가 지지 않는 시간이라 산책을 해도 된다고 해서 산책하고 있는데, 누군가 와서 성민이 이름을 불렀다. 따라 나갔다. 남자들이 성민이 얼굴에 차도르(이슬람 여성들이 머리에 쓰는 천)를 뒤집어 씌웠다. 그리고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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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가니스탄에서 억류 됐던 김경자 김지나씨가 4일 오후 안양 샘병원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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